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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 (597)화 (598/763)

Chapter 596 - 재능 기부(4)

전생에 TRPG라는 게임이 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상황극과 RPG를 합친 오프라인 게임이다.

일반적인 RPG 게임이라 하면 대부분 컴퓨터 혹은 비디오 게임을 떠올리기 마련. 그러나 TRPG는 오직 상황극으로만 이어진다.

게임 마스터가 컴퓨터를 대체하는 역할을 하지만 무한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시나리오를 이어나간다. 다시 강조하지만 상상력이다.

컴퓨터 게임은 일종의 편법은 있어도 자유도에 있어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TRPG는 그런 거 없다. 무한한 자유도를 자랑한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TRPG는 사회성 게임이라는 것이다. 서로 간의 존중은 필수이며 마구잡이로 한다면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게임을 이어가는 게임 마스터든, 시나리오를 이끌어가는 플레이어든 상상력을 발휘하여 끝을 달리는 게임.

마니아 중의 마니아만 하는 게임이지만 자유도가 넓다는 강점 하나만으로 두터운 매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다.

물론 나는 안했다. 질병겜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친구들 관심이 없었으니.

솔직히 말해 룰도 잘 모르고 있다. 유튜버에서 몇 번 본 게 끝이며 주사위를 굴려야 한다는 것만 알고 있다.

'원조 운빨좆망겜이지.'

이 세상에 TRPG를 뿌리든 말든 관심 없는 일이고, 지금은 아리엘과 노는 게 중요하다.

아이들의 싹수도 확인할 겸 피와 강철 다음에 쓸 신작의 설정도 보충할 겸 겸사겸사.

아이들의 상상력은 간혹 어른을 뛰어넘는 경우가 많으니 나름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근데 뭔 주사위가 이리 많지?'

역시 도박이 한창 문제일 때의 시기여서 그럴까. 아이들이 구한 주사위는 다양했다.

기본적인 정육면체부터 시작해서 각각 8, 10, 12, 심지어 20까지. 주사위 종류가 다양하다.

어차피 내 임기응변과 대강적인 세계관 설명만 할 거라 마구잡이로 사용할 예정이다.

그래도 납득이 되는 선에서 말해야지. 유튜버에서 재미있게 본 영상대로 하면 될 것이다.

"자. 됐다."

따로 구비한 종이와 펜에 임시적인 직업 및 능력치를 적고 끝냈다. 종족은 주사위를 굴리지 뭐.

뒤이어 진득하게 기다려준 아이들을 바라보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기야 주사위를 구하는 것도 이상한데 갑자기 종이에 펜으로 뭘 끄적거리니 의아할 수밖에 없겠지.

세계관도 생소할 것이다. 2차 악마 전쟁으로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세계. 어긋난 순리로 인해 죽은 자가 부활하는 곳.

'제논 일대기도 나쁘진 않지만 그건 차차 생각하고.'

어디까지나 즉흥적인 이야기다. 사실상 TRPG라 부르기에도 애매하다.

아이들의 눈에는 좀 더 체계적인 역할 놀이처럼 느껴지겠지. 나는 순수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준비는 끝났단다. 먼저 주사위를 굴릴 사람 있니?"

"나!"

가장 먼저 아리엘이 힘차게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꽤 기대되는지 황금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주사위를 건네며 굴리라고 지시했다. 처음에는 일반적인 정육면체다.

또르륵-

"6! 좋은 거 떴다!"

역시 천사여서 그럴까. 주사위를 굴리는 것부터 심상치 않다.

나는 처음 6으로 설정했던 종족을 아리엘에게 말했다.

"당신은 엘프입니다."

"엘프?"

"의외로 평범하네."

"아리엘은 엘프보다는 천사인데."

아리엘의 역할을 엘프라고 지정해주자 수근거리는 아이들. 하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다.

"이제 정이십면체 주사위를 굴려주세요."

"정이십면체가 뭐야?"

"눈이 20개인 주사위."

또르륵-

아리엘은 내 말대로 정이십면체 주사위를 3번 굴렸다.

원래는 정십면체를 3번 굴려야 하는 걸로 알지만 설정을 짜지 않아 이십면체로 대체했다.

그리하여 나온 숫자는 각각 20, 15, 3. 힘과 민첩은 다 좋은데 지능이 매우 후달린다.

······뭐 이딴 숫자가 나오지?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아는대로 말해줬다.

"당신의 능력치는 힘 20, 민첩 15, 지능이 3입니다."

"와! 엄청 강해보인다!"

"20이 가장 높다고 했으니 엄청 높네. 근데 지능이 3이잖아. 빡대가리라는 뜻 아냐?"

아리엘이 환호도 잠시 마르스가 팩트를 찔렀다. 설정상 빡대가리는 맞지만 저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지.

"너 그런 말 어디서 배웠니?"

"제논 일대기에서요."

"······형이 미안해."

다 내 탓이구나. 언어를 가지고 놀던 내 업보다.

이다음으로는 직업 설정. 직업은 얼마 없는 탓에 다시 한 번 정십이면체 주사위를 굴리라고 말했다.

아리엘은 빡대가리라는 마르스의 팩트에 기분이 살짝 상했는지 볼을 부풀린 채로 주사위를 굴렸다.

그리하여 나온 숫자는 4. 나는 그걸 보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사제입니다."

"지능이 낮고 힘이 강한 사제? 이게 뭐야?"

뭐긴 뭐야. 가끔 가다가 튀어나오는 혼종이지. 하다못해 팔라딘도 아니고 사제다.

물론 자유도가 높은 게임이니만큼 뭘 해도 상관없지만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건 변함이 없다.

"다시 굴리면 안 돼?"

"안 돼. 다음에는 눈이 6인 주사위를 굴리렴."

주사위를 굴리자 6이 나왔다. 왜 이리 편차가 심한 건지 모르겠다.

"당신의 외모는 정말 아름다운 수준입니다.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조각한 외모라 칭송받습니다."

"우와~"

"아리엘은 편하겠다. 그냥 바보 연기만 하면 되잖아."

탁한 금발을 허리까지 기른 소녀가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주근깨가 있긴 하지만 소녀도 귀여운 외모를 갖고 있다.

이렇듯 아리엘의 캐릭터 설정은 끝났다. 지능이 매우 낮지만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엘프 사제로.

처음부터 괴랄한 조합이 튀어나왔다. 아리엘이 이러면 다른 애들은 어떨까.

"당신의 능력치는 힘 6 민첩 14 지능 12입니다."

능력치가 저런 식으로 평범하게 나와도 의미가 없다.

"추하게 생긴 드워프 대장장이? 제가 맡은 역할로 뭘 할 수 있어요?"

"동료들의 무기를 강화시키거나 상대방의 무기를 파괴시킬 수 있습니다. 단, 주사위에 따라 강화시 무기가 파괴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재미있게 만들 예정이거든. 평범한 역할 놀이와 색다른 설정에 아이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드워프 대장장이까지 끝냈겠다, 다음으로 이어졌다. 벌써부터 듬직하게 생긴 소년의 직업은 인간 전사다.

능력치도 각각 13, 7, 9라는 무난한 능력치. 외모도 무난하게 3이다.

그러므로 남은 건 골목대장처럼 느껴지는 마르스.

또르륵-

"당신의 능력치는 8, 5, 13입니다."

"좋았어! 힘이 낮지만 이제 기사만 뜨면 돼!"

어림도 없지. 주사위는 공평하다.

"당신의 직업은······ 마법사입니다."

"엑."

마법사라고 하자마자 인상을 구기는 마르스. 싫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도 겸허히 받아들인 상황에서 본인만 바꿔달라 할 수 없는 노릇.

외모는 준수하게 5의 수치를 받았지만 종족이 수인이다. 이때까지 수인이 마법 쓰는 건 못 봤지만 게임이니까.

"여러분은 각각 어느 한 무덤가에서 무덤을 박차거나 흙을 뚫고 등장합니다. 밖으로 나온 세상은 온통 회색빛이었으며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째서 자신이 부활했는지 알 수 없고, 단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아리엘 님."

"응?"

"무슨 행동부터 취할지 말씀해주세요."

"음······ 나는 다른 건 다 좋아도 지능이 낮은 사제니까······ 우선 갖고 있는 게 뭐야?"

"당신은 생전에 입던 수녀복, 그리고 손에는 십자가 형태의 목걸이가 쥐어져 있습니다."

내 말을 듣고 난 아리엘은 한동안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사제니까 기도부터 할게. 신들마저 세상에 관여할 수 없지만, 그래도 사제니까."

"그럼 주사위를 굴려주세요."

"주사위를 굴려야 돼?"

"응."

아직 생소하지만 내 말대로 주사위를 굴리는 아리엘. 당연하지만 정이십면체 주사위다.

주사위의 눈은 5가 나왔다. 이것만 본다면 좋은 수치겠지만 문제는 지능이 3이다.

이에 아리엘이 역할을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려던 찰나, 나는 웃음기를 머금으며 나레이션을 읊었다.

"당신은 신에게 기도를 드리려고 했으나 기도문을 잊어버렸습니다."

"신이시여······ 에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정말 지능 3다운 반응을 내버린 아리엘. 눈을 깜빡거리는 것까지 완벽하다.

어쩌다 보니 설정에 완벽히 부합하는 연기여서 다른 아이들도 웃음을 터뜨렸다.

"푸흐흐······ 이런 거구나."

"대충 뭔지 알 것 같아. 재미있어 보인다!"

"빨리빨리!"

역시 애들은 애들이다. 재미있는데다가 새로운 거면 다 따라하고 싶어지겠지.

나는 그들에게 잠깐 진정하라 부탁한 뒤, 어딘가 어벙해져 있는 아리엘에게 말했다.

"아리엘. 계속하면 돼."

"······아무거나 해도 되는 거지?"

"응. 네가 상상하는대로 하면 돼."

"음······ 일단 무덤 밖으로 걸어갈래."

"당신은 회색빛으로 가득한 무덤 밖으로 걸어갑니다. 무덤은 협곡과 비슷한 곳에 있었으며 사방에는 뼈들로 가득합니다."

처음에는 튜토리얼 형식으로 어떻게 진행하는지만 알려줄 예정이다. 워낙 생소한 개념이니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아까 말했듯이 시나리오는 멸망 직전의 세계다. 전생에서 하드코어한 난이도로 유명했던 게임의 설정을 차용했다.

순리가 어긋난 걸 넘어 완전히 박살난 세상. 죽은 자가 부활하는 건 기본이요, 악마들이 곳곳에서 설치는 세계다.

"그때 당신의 앞에 스켈레톤이 어슬렁거리며 등장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발견하더니 턱을 딱딱거리며 달려듭니다!"

"어, 어? 싸우는 거야?"

"싸워야지. 평소 역할 놀이를 하는 것처럼 해. 스킬을 쓰기 전에 아빠한테 말하고."

"스, 스켈레톤? 사제니까 신성주문을 외울게!"

당황한 것도 잠시, 아리엘은 평소 하던 역할 놀이처럼 진행했다. 사제 역할을 맡겼더니 기도에 충실하다.

그러나 주사위는 잔인하리만치 공평하다. 나는 아리엘에게 주사위를 굴려달라고 말했다.

또르륵-

결과는 15. 지능 3 가지고는 택도 없고 반대로 패널티를 줘야하는 수준이다.

그래도 튜토리얼이니 패널티 없이 가야겠지. 아리엘이 절망하든 말든 나는 묵묵히 시나리오를 이어갔다.

"당신은 다급히 기도했으나 기도문을 잊어버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스켈레톤이 검을 높게 들어올립니다!"

"으아아아! 구르기! 어떻게든 피해야 하니까 데굴데굴 구르기!"

"주사위를 굴려주세요."

그래도 지능이 낮을 뿐이지 다른 스탯은 상위권. 민첩이 15나 되는데다가 힘은 최상치인 20이다.

이윽고 주사위 값이 10이 나오면서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상황이 연출됐다.

"후우······ 신이시여. 이 또한 당신의 뜻. 힘을 주지 못한다면 저 스스로 타파하겠습니다! 목걸이를 쥔 손으로 스켈레톤의 얼굴을 때리겠습니다!"

꽤 몰입했는지 반말이 아니라 존댓말을 사용하기 시작한 아리엘. 나는 만족하며 그녀가 굴린 주사위값을 확인했다.

루미너스와 모라도 이걸 재미있게 보는 건지, 아니면 기본적인 행운이 강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주사위값이 무려 1이나 나왔다. 나는 물론이요, 지켜보는 아이들까지 감탄했다.

"당신은 목걸이를 쥔 손으로 스켈레톤의 얼굴을 강타했습니다. 스켈레톤의 두개골이 산산조각나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신의 가호로 능력치 1을 올릴 수 있습니다."

"와아! 멋지다!"

"저거 사제 맞아? 팔라딘 아니야?"

"팔라딘보다는 몽크겠지. 그래도 기도문을 읊었으니 넘어가자."

기도문을 읊지 못하는 힘 20 사제. 아리엘도 꽤 똑똑한 것이, 위급한 상황에서도 기도문을 읊으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만약 다짜고짜 주먹부터 나갔으면 컨셉에 어긋났겠지. 아이들도 그 점을 어렴풋이 느꼈는지 다들 납득하고 넘어갔다.

이처럼 첫 시작부터 다사다난했던 아리엘의 턴이 종료되고, 다른 아이로 넘어갔다.

그리고······

"신의 가호로 능력치 1을 올릴 수 있습니다. 어떤 능력치를······"

"무조건 힘! 마법사여도 힘!"

"··· ···"

전설의 힘법사가 탄생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르스가 지팡이로 스켈레톤을 박살낸 것도 아니다.

반대로 자기 역할에 아주 충실했다. 마법을 쓰면서 스켈레톤을 아주 가루로 만들어버렸으니.

그런데 힘을 찍었다. 나는 혹시나 해서 조용히 물었다.

"······힘을 찍는다 해서 나중에 마법사의 역할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힘도 언젠가 쓸 때가 있겠죠!"

자신만만한 대답에 또다시 할 말이 없어졌다. 그렇게 마르스의 턴까지 끝나니 시간이 벌써 저녁이다.

저녁이 되면 언제나 아이들의 부모님이 부르는 법. 아무리 나라지만 아이들의 부모님을 걱정시킬 수 없는 노릇이다.

"형! 형! 내일도 하는 거죠?"

"글쎄? 시간 보고 정할게. 형이 좀 바쁘거든."

"같이 해줘요! 진짜 재미있는데!"

틱틱거렸던 마르스도 마음에 들었는지 꼭 다시 하자는 말을 남겼다.

싹수가 노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다. 하기야 아리엘도 눈치가 있는데 천성이 나빴다면 어울리지도 않았겠지.

아이들의 부모님도 내게 감사 인사를 올리면서도 무슨 게임을 했는지 궁금해하는 듯하다. 어른들도 재미있게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나중에 좀 더 세밀한 룰을 짜고 난 후에 알려줘야겠지. 꾸준히 언급했지만 오늘 한 건 어디까지나 즉흥적이라 구멍 투성이다.

"아빠. 아빠. 집에 가서도 엄마들이랑 같이 하면 안 될까? 할아버지도 같이!"

"그럴까? 마리 엄마한테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으니 괜찮겠네."

"응! 응!"

날개까지 파닥거리는 걸 보면 아리엘도 재미 들린 모양이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리하여 집에 도착하고 난 후, 아리엘이 원하는 대로 사람들을 불러모아 간략하게나마 게임을 진행시켰다.

"저기······ 슬슬 자야하지 않을까?"

"한 턴만 더 하자! 한 턴만!"

[허허허. 손자가 이 할애비의 장례식을 계속 늦추는구나.]

"··· ···"

예상보다 굉장한 반응에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저택에 활력을 불어넣은 것 같아 다행이다.

'다른 의미의 노예가 된 것 같은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수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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