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74 - 업보(1)
모라와의 대화가 끝나고 가족들과 애인끼리 진득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라기보다는 상담에 가까운 형식이었는데, 아무래도 나조차 모르고 있던 기억인지라 민감할 수밖에 없다.
지구 신들조차 인정할 정도로 영혼이 망가지는 기억. 내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뚫릴 정도로 위험한 기억이다.
다행히 이 세상을 살면서 그 구멍들은 점차 메워지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충격밖에 되지 않았다.
또한 훗날 악마 숭배자들이 이 구멍을 비집고 들어올 수도 있었기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했고.
그래도 나를 개복치 취급하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깨지기 쉬운 유리 공예품 취급하는 것 같달까.
나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오히려 내가 다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게 말뿐이라는 건 다들 알고 있다.
당분간 이런 분위기가 이어질 거라고 예상했기에 쓴웃음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 또 하나.
"아이작. 한 번 엄마라고 불러보겠니?"
전생의 비극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생각이신지, 어머니가 나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부탁하셨다.
여태까지 나는 전생의 부모를 엄마나 아빠라 불렀고, 현재의 부모님은 대부분 존칭을 사용해 어머니나 아버지라 불렀다.
미묘한 차이지만 일종의 '거리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옛날에는 단지 교육 때문에 그런 줄만 알았으나 사실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그 사실을 깨닫고 나에게 저런 부탁을 한 것이다. 처음에는 다소 머뭇거렸지만, 진실을 마주하고나니 마음이 변했다.
이 분들도 나의 부모이자 전생의 부모님 못지 않은 사랑을 퍼부어주셨는데 차별을 해야겠냐고. 이래나 저래나 내가 사랑하는 분들이라고.
"······엄마."
"우리 아들."
그래서 어머니 아니, 엄마의 품에 꼭 안겼다. 엄마도 나를 따스하게 안아주시며 등을 토닥여주셨다.
그 어떤 곳보다 아늑하고 포근한 품. 나는 간만에 어린애처럼 어리광을 부렸다.
비록 아픔을 이겨내지 못 했지만, 다른 행복으로 그 아픔을 조금씩 극복하면 될 터.
오늘부터 조금씩 이겨내면 그만이다. 늦었다고 정말 늦은 게 아니다.
"나는 그냥 아버지라 부르거라."
"당신은 눈치도 없어요?"
"아니, 그냥······ 아빠라 하니 뭔가 어색해서 그래."
이래나 저래나 부모님, 그리고 가족과의 거리가 가까워진 계기는 충분해졌다. 모처럼 모라에게 감사할 일이 생겼다.
대신 당분간은 꼬박꼬박 모라 신전을 방문할 예정이다. 모든 생을 통틀어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던만큼 악몽으로 재현될 수도 있다.
그 악몽을 없애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악몽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의 비극을 겪거나 아니면 행복을 얻거나.
당연하게도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미쳤다고 전자를 택하겠나.
"그러고 보니 어디서 들은 적이 있어. 누군가를 껴안고 자면 숙면을 취할 수 있다던데?"
"상관없겠네. 어차피 순번을 돌려가면서 잘 텐데."
"대신 아이작이 편히 잘 수 있도록 방법을 강구해야지."
애인들도 머리를 맞대며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나를 개복치 취급하는 것 같아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그만큼 나에게 진심이라는 소리이니 웃으며 넘어가기로 정했다. 나에게 좋으면 좋지, 나쁘지는 않을 테니까.
또한 1년 후면 사랑의 결실이 등장할 예정이다. 그 결실이 무럭무럭 성장하는 걸 지켜보면서 행복을 얻는 방법도 있다.
"우다다다다!"
"릴리야! 아리엘! 릴리 좀 데리고 와!"
"알았어. 릴리 고모! 거기 서!"
아니면 릴리와 아리엘의 조합을 느긋하게 지켜봐도 되고.
걸음마를 한 지가 언젠데 벌써부터 이곳저곳 쏘다니고 있는 릴리, 그리고 그런 릴리의 뒤를 추격하는 아리엘.
물론 짧은 다리로 도망칠 수 있는 곳은 한정돼 있다. 릴리는 아리엘에게 붙잡힌 채 아둥바둥거렸으나 소용 없었다.
"아빠! 릴리 고모 잡아왔어!"
"잘했어. 그나저나 동물도 아니고 잡아왔다는 게 무슨······"
나는 말을 하다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리엘의 품에서 바둥거리던 릴리의 표정 때문에.
마치 뭔가 힘을 주고 있는 표정이랄까. 두 손은 앙증맞게 꽉 말아쥐고 토실토실한 볼살은 부들부들거렸다.
저거 설마······
뿌득!
"엑!! 릴리 고모 똥 쌌다! 에엑! 우엑!"
불길한 소리가 들리자마자 아리엘이 기괴한 소리를 내뱉었다. 뒤이어 후다닥 릴리를 땅에 내려놓는 것이 아닌가.
당연하게도 자유의 몸이 된 릴리는 짧은 두 다리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황망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방금 웃었지?'
도망치기 직전에 릴리가 씨익 웃는 걸 볼 수 있었다. 착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아빠! 릴리가 아리엘 보고 바보래!"
"······확실하니?"
"응! 바보라고 했어! 아리엘 바보 아닌데! 아빠가 혼내줘!"
"하하하."
릴리가 조금만 더 성장하면 집안에 바람 잘 날이 없겠구나. 1년 뒤에 태어날 아이와의 관계가 어떻게 될 지 더 궁금해진다.
어쨌거나 아장아장 도망다니던 릴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유모에게 잡혔다. 이럴 줄 알고 근처에 대기하고 있었다고.
날이 가면 갈수록 재미있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지만,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았다.
그중 대표적인 건 단연코 제논 축제라 할 수 있다. 축제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다.
그래서인지 영지는 벌써부터 시끌벅적했다. 겉으로 본다면 세계 최대의 축제라 불려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크고 작은 문제가 조금씩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었다.
"너무 혼잡하구나."
대표적인 문제 중 하나라 혼잡성이다. 나는 아버지의 설명을 차근차근 들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피와 강철은 없었기에 제논 일대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으나 이번부터는 다르다.
제논 일대기는 완결됐고 피와 강철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상황. 피와 강철도 섞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제논 일대기의 인기가 떨어진 건 절대 아니다. 비율만 따지자면 서로 팽팽한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다.
축제의 정체성은 벗어나지 않겠지만 너무 난잡해서 문제다.
"음······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걸요? 그냥 그대로 해도 될 거예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느냐?"
"제가 살던 세계도 그랬거든요."
누구는 중세 갑옷을 입고 다니고, 누구는 아이언맨 슈트를 입고 다니는 축제가 있었다.
이 부분은 그 누구도 이견을 달지 않았다. 단지 아, 저 사람은 저 캐릭터를 표현했구나라며 넘어간다.
오히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건 퀄리티다. 퀄리티가 높으면 높을수록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
이 세상은 코스프레라는 개념이 없어서 그림 같은 예술로 대체하는 편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어차피 제가 쓴 작품들을 기반으로 둘 거잖아요? 그러니 다들 저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오히려 그 혼잡성이 매력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음. 일리가 있구나. 다만 음악 관련 부분은 살짝 조정해야겠군. 마족과 엘프가 도와준다지만 이것만큼은 분류하는 게 낫겠어."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시며 서류에 무언가를 작성하셨다. 나는 그걸 바라보다가 다른 질문으로 넘어갔다.
"다른 건 없나요?"
"굳이 있다면 시간인데······ 축제의 기간을 더 늘려야 될 수도 있어. 특히 네 작품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말이지. 그리 된다면 아카데미 개학 기간도 지연시켜야 되고. 다른 건 몰라도 시간만큼은 조정하기가 참 곤란하구나."
아버지가 골치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거리셨다.
축제를 위해서 각 국의 아카데미는 여름에 일찍 방학하는 편이다. 이건 작년부터 생긴 관습 아닌 관습이다.
대신 개학이 그만큼 빨라지는데, 축제의 기간이 늘어나면 개학도 미루어질 수밖에 없다.
별로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현재 시대에는 상당히 큰 편이다. 비행기는커녕 이제 막 증기 기관차가 발달한 세계이니.
물론 증기 기관차가 상용화되고, 대중화까지 발전한다면 문제는 없을 것이다.
에인스도 가능하면 마이샬 영지에도 정거장을 세우고 싶다며 언급했다.
'얼마나 걸릴 지 모른다는 거지만.'
드워프의 재능을 보면 지구보다 훨씬 빠르겠지. 하지만 그게 언제일지 아무도 모른다.
당장 미친듯이 상승하는 석탄의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그쪽에만 몰릴 게 뻔하니까.
나는 여러가지를 고려해야 되는 문제에 턱을 매만지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논 축제는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축제를 표방하고 있어요. 그런데 시간이 없어서 예술가들이 본인의 결과물을 선보이지 못하는 건 다소 아쉽네요. 현재 참여한 예술가들, 그러니까 극단이나 악단의 수는 몇이죠?"
"매트릭스 극단과 리루스 악단을 제외하면 극단은 13개. 악단은 무려 20개가 넘는구나."
"원래 이렇게 많았나요?"
"작년 축제를 보고 꿈을 키우던 자들이 대부분이지."
덕분에 현재가 문화의 절정기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동시에 제논 축제의 영향력도.
앞으로 늘어나면 더 늘어나지, 절대 줄어들지 않을 숫자.
내가 적절한 시간 배분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무언가 생각난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여셨다.
"아. 그러고 보니 한 곳 더 있구나. 극단도 악단도 아닌 곳이."
"예?"
"가이스트가 이곳으로 온다고 편지를 보냈단다. 본인들의 작품을 이끌고 말이지."
"······?"
처음 듣는 소리인데.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자 아버지가 어떤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나는 그 편지를 말없이 받아들였다. 헌데 편지 봉투부터가 범상치 않다.
"이 편지······"
"그래. 원래 황궁으로 보낸 편지야. 국가 대 국가로서 보낸 편지인데, 사실상 우리 영지에 보낸 거나 다름없어. 우리 영지에 편지가 워낙 많이 와서 말이지."
에인스, 한다이, 기아스 이 세 명은 '가이스트'라는 활동명으로 혁명을 일으켰다. 이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한 나라의 수장이 된만큼 국가의 지도자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일 터.
나에게 직접 보내기에는 내가 너무 바쁘다고 생각하거나, 늦게 받을 거라고 생각하여 이런 식으로 보낸 모양이다.
이에 편지를 펼치고 나니.
[우리는 전차를 끌고 갈 겁니다. 우리 가이스트의 걸작이자 정수가 담긴 전차를!]
[우리는 전쟁을 하러 가는 게 아닙니다! 단지 제논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그리고 우리의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 끌고 가는 겁니다!]
[우리를 적대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시험에 쓰일 포탄을 챙겨가기는 할 테지만 어디까지나 보여주기 위한 용도입니다.]
이 난쟁이 새끼들이 어째서 미네르바 제국에게 편지를 보냈는지 알 것 같더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작정 전차를 끌고 왔다면 전쟁을 하러 왔다! 라며 소리치는 거나 다름 없겠지.
'······벌써부터 뒷골이 당기네.'
그래도 루미너스가 전에 말했던 대로라서 허탈하지는 않았다.
세 드워프가 전차를 끌고 올 거라는 미래를 남겨놓았으니까. 그게 오늘로 현실이 될 뿐이다.
"······뭐. 상관없겠네요. 다른 건 없나요?"
"매트릭스 극단의 영화를 어디에 배치할 지······"
업보가 조금씩 돌아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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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이 호크와 축제 관련 사안으로 의견을 나누고 있을 시각.
혁명 이후 상승세를 그리고 있던 마키나는 현재 축제 관련으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빨리 빨리 움직여! 거기 석탄 제대로 운반해!"
"곧 있으면 출발한다! 시원한 맥주는 반드시 챙기고!"
"늦장 부리는 놈이 있으면 걷게 할 거다!"
짧은 두 다리를 열심히 움직이며 보급품(?)을 수송하는 드워프들.
그들이 짐을 옮기고 있는 곳은 다름아닌 전차였다. 가이스트의 걸작이자 제논의 지식이 결합된 강철 괴물.
헌데 그 강철 괴물이 한 대가 아니다. 가장 앞에 서 있는 전차 뒤로 여러 대의 전차들이 나란히 도열해 있었다.
"우리는 이 전차들을 끌고 마이샬 영지로 향한다! 우리 종족의 정체성을 제대로 보여줄 기회라고!"
"우리는 인간처럼 배움이 빠르지 않다! 마족이나 엘프처럼 마법에 능통하지 않다! 수인처럼 강력한 신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강철 괴물을 만들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을 모두에게 보여주는 거야!"
루미너스가 전에 말하길, 세 드워프가 전차를 끌고 올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당시'의 기준으로 말한 것이지, 현재에는 미래가 약간 변했다.
쿠르르릉!
"가자! 동지들!"
"우리의 능력을 보여주러 가자!"
전차가 아니라 전차들이 올 것이고.
[대장간의 불은 땀이 되어 흐르고, 땀은 우리의 가치이자 증명이다.]
[힘찬 망치 소리는 노래가 되어 흥얼거리네.]
[내 손에서 새로움이 탄생한다네. 우리의 손으로 거대한 산을 쌓아올리고 있다네.]
[함께 만들자. 함께 노래하자. 함께 춤추자.]
본래 국가였던 노래는 어느새 행군가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