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59 - 통조림(5)
[이 해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이미 죽은 자와 곧 죽을 자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그것도 피의 오마하 해변에 참전한 병사의 증언이다.
그리고 칼즈는 그 상황을 실시간으로 체험하며 한동안 혼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전쟁은커녕 싸움 그 자체와 거리가 먼 사람이다. 멘탈이 나갈만 하다.
설령 전투와 가까운 사람이라고 해도 피의 오마하 해변은 지옥도 그 자체다.
히틀러의 전기톱에 문자 그대로 '갈려나가는' 병사들. 포격으로 팔다리가 날아가는 병사들. 극한의 공포 속에서 어머니를 찾는 병사들.
매캐한 화약 냄새와 바다의 짠 냄새, 마지막으로 피비린내가 뒤섞이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악취가 풍긴다.
포격으로 인하여 이명이 울리고, 사방에서 병사들의 외침과 비명 소리가 뒤섞인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총알 세례는 덤.
"괜찮으세요?"
"······전혀 안 괜찮습니다."
속에 있던 내용물을 전부 비워낸 칼즈가 파리한 안색으로 답한다.
포격으로 사람의 사지가 분해되는 것도 충격적일 텐데 내장 파티를 여는 건 더 끔찍했겠지.
나는 이 모든 것들이 허구라는 걸 알고 있기에 놀라는 정도로 그쳤지만, 칼즈는 실제와 다를 게 없을 것이다.
그래도 모라의 케어 덕분에 멘탈이 완전히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모라의 전문분야는 정신 쪽이었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방금 그건 모두 허구입니다. 너무 과하게 몰입하지 않아도 돼요."
"그 장면을 생생히 보여줬으면서 과하게 몰입하지 말라고요? 양심 뒤지셨습니까?"
이제는 대놓고 욕을 하는구나. 이해는 간다.
내가 할 말이 없다는 듯이 쓴웃음을 짓자 칼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이작 님의 머리를 엿보고 싶습니다. 평소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길래 저딴 끔찍한 상상을 하실 수 있습니까?"
"그냥 상상입니다. 모라 님의 도움도 빌렸고요."
"아무리 그래도······ 아니. 아닙니다. 깔끔히 포기하겠습니다. 지금 제가 여기 있는 것도 말이 안 되니까요."
칼즈는 피식 웃으며 현타가 온 표정을 지었다. 상식에서 벗어난 상황이 연달아 이어지다 보니 포기한 모양이다.
마음 같아서 '제가 환생자라 그래요'라고 답하고 싶다. 이러면 또 설명해야 될 것 같아 관뒀다.
더구나 칼즈는 그 정도 인연이 아니다. 단지 굴리기 좋은 노예 아니, 삽화가일 뿐이지.
딱 이 정도 관계가 적당하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칼즈는 내 부탁에 따라 그림을 그리면 끝이다.
"그러면 삽화를 그리는데에 문제는 없겠죠?"
"문제만 없겠습니까? 피와 강철이 어떤 느낌인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독자들도 이걸 한 번 봐야하는데."
칼즈는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슬금슬금 자리를 옮겼다.
"어디 가세요. 거기는 출구인데."
"일주일 지나지 않았습니까?"
"이제 겨우 5일입니다."
"아, 제발."
다시 끌고 왔다. 칼즈는 캔버스 앞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자마자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붓을 잡았다.
동시에 눈빛이 달라지면서 프로의 모습으로 돌아온 칼즈. 이윽고 그가 삽화를 그리기 시작하자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피와 강철이 어떤 분위기인지 직접 경험했으니 믿을 건 그의 역량이다. 솔직히 말해 분위기를 알아도 그림으로 표현하기는 힘들다.
글로 설명해줘도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가 다르니 어쩔 수 없다. 전생에서 일러스트를 받고나서 고개를 갸웃거린 적도 있지 않은가.
그나마 지금은 내 스케치 덕분에 완전히 엇나가는 경우는 없었다. 뭔가 어색한 부분이 있어도 감지덕지하며 넘어갔다.
'나도 써볼까.'
현재 독소전쟁 파트가 진행 중이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고, 스탈린의 삽질로 인해 소련이 무기력하게 쓸려나가는 파트.
그 과정 속에서 핀란드가 나치 독일과 붙어 영토를 수복하고, 발 빠르게 빠지는 과정도 보여줄 예정이다.
'그전에 북아프리카 전선도 보여주고, 이탈리아의 삽질도 보여줘야겠지.'
세계 대전이라는 이름값을 하듯이, 전쟁은 세계 곳곳에서 발발했다. 북아프리카도 그중 하나다.
사실 북아프리카 전선은 그닥 중요한 전선은 아니다. 무솔리니가 고대 로마의 영광을! 이라며 지랄해서 그런 거지.
심지어 그 히틀러조차 저 새끼 뭐하냐고 뒷목을 잡았다는 낭설 아닌 낭설이 있다. 이때만 해도 히틀러는 '나름' 정상이었다.
'진짜 이탈리아가 1인분만 했어도······'
나치 독일은 내부적으로 따졌을 때 히틀러가 전부 말아먹었다면, 외부적으로는 이탈리아가 거하게 트롤링을 시전했다.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되는 그리스를 건드린 것부터 시작해서 1인분조차 못 했으니.
오죽하면 훗날 많은 사람들이 이탈리아는 추축국에서 제외해도 되지 않을까? 라며 진지하게 논의할 정도다.
'롬멜이 없었다면 진작에 말아먹었겠지.'
비록 몽고메리의 등장으로 롬멜은 본토로 소환됐지만 롬멜도 상당히 억울한 상황이었다.
본토는 소련 침공을 준비한다고 보급을 안 주지, 사막 특유의 좆 같은 날씨에 고생하지, 이탈리아는 옆에서 트롤짓을 하지.
괜히 롬멜이 사막의 여우라 칭송받는 게 아니다. 그만한 악조건 속에서 분전하는 것마저 대단한 성과다.
게다가 독소전쟁 이후 히틀러의 행보를 보면 패배는 확정된 상황이다.
'진짜 똥꼬쇼는 모델이 했고.'
모델의 등장은 독소전쟁 중후반이다. 그것도 주도권이 소련에게 넘어간 상황에서.
지금은 바르바로사 작전, 그리고 곧 등장할 홀로코스트를 집중적으로 다룰 계획이다.
겸사겸사 외전격으로 등장할 '오스카 쉰들러'와 '안네 프랑크'도 간간히 등장시키고.
'홀로코스트는 제논 축제 이후에 등장시키자.'
제논 축제까지 약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다. 아마 그 축제에서 다양한 볼 거리가 쏟아져나오겠지.
여기에 나치 독일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가능성이 아니라 100%다.
지금도 '멋과 매력을 사로잡은 악의 집단'이라며 칭찬 받고 있는 상황이다.
어쩌면 홀로코스트가 등장한 후에도 열심히 빨아줄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피와 강철은 가상의 이야기 즉, '판타지'니까. 상종 못할 쓰레기로 평가가 바뀔지언정 볼트모트처럼 되진 않을 것이다.
'혹시라도 옹호하는 걸 막기 위해서 이걸 넣어야지.'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라는 금언이 있다.
나치의 만행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는 않았어도 침묵하는 것만으로 책임이 된다는 글이다.
누군가 나치 독일의 폭정에 어쩔 수 없이 따라야했다고 의견을 낸다? 저 글 하나로 모두 반박할 수 있다.
특히 최근 마키나에서 혁명까지 발발했으니 저 글이 더 깊이 와닿겠지.
"······작 님."
"··· ···"
"아이작 님."
"예?"
집중해서 글을 쓰는 도중에 칼즈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타자기에서 시선을 뗐다.
고개를 드니 칼즈가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딘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고서.
"여기 있습니다."
"······뭐가 말이죠?"
"피와 강철을 표현할 수 있는 그림이죠."
흡족한 표정으로 나에게 캔버스를 건네는 칼즈. 저렇게나 후련한 얼굴은 이곳에 들어와서 처음 본다.
나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캔버스를 받고는 그림을 확인했다. 뒤이어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아까 봤던 그 장면을 토대로 표현한 겁니다. 어떻습니까?"
칼즈의 설명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만큼 훌륭한 그림이다.
그림에는 한 병사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무어라 외치고 있다. 아마 돌격! 이라 외치고 있지 않을까.
만약 병사만 존재했다면 그저 그런 그림이었겠으나 그 뒤에 전차, 비행기, 전함 등등. 다양한 전쟁 병기들이 정밀하게 그려져 있었다.
심지어 밋밋하게 그려진 것도 아니고 전차와 전함이 포를 뿜거나 비행기가 폭격을 떨구는 등. 그들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무엇보다 가장 돋보이는 건 배경이다. 2차 세계 대전 특유의 암울함과 허무함을 드러내는 듯, 전반적으로 회색이 짙은 배경이었으니.
마치 2차 세계 대전으로 배경으로 둔 게임 표지 같다. 이게 정말 물감으로만 표현한 거라고?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칼즈의 실력이 뛰어난 모양이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다.
"정말······ 대단하네요. 딱 제가 원하는 그림이에요. 어떻게 그리신 건가요?"
"어떻게 그리긴요. 아까 말했듯이 방금 눈으로 봤던 그 장면을 토대로 한 겁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마음에 들고 말고요. 표지로 써도 되겠는데요?"
한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다. 제논 일대기는 물론 피와 강철도 표지가 밋밋한 편이다.
제논 일대기는 칼즈와 같은 삽화가를 구할 수 없어서 그렇다 쳐도 피와 강철은 아니다. 표지로 적당한 그림이다.
피와 강철이 어떤 세계관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표지. 지금 이 시대에 이만한 표지는 돈 주고도 못 구한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건 나중에 머스크 씨와 상의를 해야겠네요. 표지로 써도 상관없죠?"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캔버스의 그림을 표지로 쓸 수 있습니까?"
"그건 머스크 씨한테 물어봐야죠. 보아하니 마법이나 기술을 따로 쓰는 것 같으니까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훌륭한 그림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 뭘요. 이게 제 일인데. 그나저나······"
칼즈는 내 칭찬에 머쓱한 지 헛기침을 했다가 눈치를 살살 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여기서 보내줄 수 있냐고 묻는 듯했다.
이에 나는 빙긋 웃어주며 입을 열었다.
"더 그릴 수 있죠?"
"네?"
"전 칼즈 씨만 믿고 있을게요. 아, 혹시 돈이 더 필요하신가요? 원하신다면 최고급 미술품 세트를 구해줄 용의가 있습니다."
"··· ···"
처음에는 이 새끼가? 라는 표정을 짓고 있던 칼즈가 내 말에 점점 현혹됐다. 꾸준히 언급하지만 미술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게다가 칼즈는 주식을 꼴아박은 바람에 절대적으로 돈이 필요한 상황.
돈이냐, 아니면 휴식이냐. 칼즈로서는 일생일대의 고민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 부탁하겠습니다. 이걸 구해주신다면 기꺼이 받겠습니다."
고민을 거친 칼즈가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손을 내밀며 무엇이든지 말하라는 제스쳐를 선보였다.
뒤이어 그는 입을 오물거리더니 단호한 음성으로 나에게 부탁했다.
"알븐하임에는 세계수의 잎을 사용한 물감, 그리고 전용 붓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마나를 흘려보낸다면 원하는 색으로 변하는, 미술가들이 꿈꾸는 물감이죠."
"계속 말씀하세요."
"여기에 세계수의 껍질을 이용한 종이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종이는 작품을 잘못 그려도 붓으로 수정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세계수 잎을 사용한 물감, 전용 붓, 마지막으로 종이. 이렇게 세 개라는 말이죠?"
"예. 그게 아니라면 여기서 보내주시면 됩니다."
못 구한다면 여기서 나가겠다고 선언한 칼즈. 속이 뻔히 보이는 요구였지만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다.
"알겠습니다. 구해드릴게요."
"좋습······ 예? 구할 수 있다고요?"
"네. 알븐하임의 여왕이랑 친하거든요."
아르웬과 나는 밤일까지 치른, 끈쩍한 관계의 연인이라는 점.
세계수 잎 시가를 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아르웬에게 부탁하여 모든 물품을 구하면 된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들었다면 저런 부탁을 하지도 않았겠지. 그러나 칼즈는 지금까지 갈려나가고 있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칼즈 님이 말씀하셨어요? 전부 구비한다면 제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아니. 잠깐만요. 아무리 알븐하임 여왕이랑 친하다고 한들 여왕님에게······"
"제 애인이에요. 됐죠?"
"··· ···"
어딜 빠져나가려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