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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 (559)화 (560/763)

Chapter 558 - 통조림(4)

자주 언급했겠지만 나는 내 스스로가 놀라울 정도로 집중력이 뛰어나다.

집중력은 인내심 즉, 정신력에 부합하는 능력. 그리고 정신력은 체력이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이 부분은 내가 아버지로부터 기초 훈련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버지는 릴리가 태어나기 전, 삼남매 모두 기사가 되기를 원했으며 늦둥이로 태어난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머니를 닮아서 그런지 아니면 신체 재능이 개화되지 않아서 그런지 훈련을 받을 때마다 빌빌거렸다.

심지어 한여름에 훈련하다가 탈수로 쓰러진 적도 있어서 아버지가 화들짝 놀라신 적도 있다. 그 이후로 훈련은 반쯤 포기하셨다.

그래도 체력만큼은 어떻게든 키우셨다. 어딜 가든 간에 체력이 중요할 거라고, 언젠가 쓸 일이 있다고 말이다.

덕분에 펜을 집으면 웬만해서는 집중력이 끊기지 않는다. 신성력을 얻고 난 후에는 이 점이 더 상승했다.

'백색방도 아니고 왜 저러는 거지?'

나는 바닥에 누워 늘어져 있는 칼즈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밖으로 보내달라고 호소하다가 지쳐 잠든 것이다.

잠도 잘 필요가 없고, 식사도 할 필요도 없이 일만 하면 된다고 분명히 말했다.

게다가 백색방이 폭포수가 흐르는 숲이라던지, 풀벌레가 우는 환경이라던지 등등. 미치지 않도록 도움을 줬다.

그런데 사흘도 되지 않아 밖으로 보내달라고 아우성을 치더라.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딴짓을 할 수도 없는데.'

전생의 격언이 하나 있다. 작가는 엉덩이가 무거워야 된다.

오랫동안 의자에 앉아야 결과물이 나온다는 소리다. 여기에는 딴짓하지 말라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

나도 이 말에는 지극히 동의하는 것이,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시기 전에 딴짓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글을 쓰다가 조금 막힌다 싶으면 유튜브를 뒤적거리고, 또 막힌다 싶으면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눕고, 그러다가 시간이 훅훅 흘러간다.

좆됐다 싶어서 부랴부랴 집필하고 난 후에도 달라진 게 없다. 작심삼일은커녕 작심삼분도 안 되더라.

이것조차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진짜 폐인마냥 글만 썼다. 아마 슬픔을 잊기 위해서 그랬던 거겠지.

'여기는 유튜브도 없고 인터넷도 없고 그냥 작업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러나 이 세상은 놀 게 없다. 빈말이 아니라 유흥이라 할만한 놀이가 거의 없다.

최근에 내가 바둑을 전파했다지만 그것마저 느릿느릿하게 퍼지는 상황이고, 체스 비슷한 보드 게임이 있지만 하는 사람만 한다.

평민들 사이에서 놀만한 거?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 없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쁜 것도 있지만 유흥거리가 거의 없다.

사형 집행마저 유흥거리로 알려져 있으니 말 다했지. 제논 일대기가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던 요인도 이것 때문이다.

그래서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놀 게 없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을 하면 되지 않는가.

어째서 고통스러워하는지 모르겠다. 칼즈도 즐겁게 그림을 그리는 줄 알았는데.

[너는 억지로 글을 쓰라고 하면 안 괴롭니?]

내 생각을 읽은 모라가 어처구니 없다는 목소리로 묻는다. 이에 곰곰히 생각했다.

덕업일치라고, 취미가 일이 되는 순간만큼 기쁜 날도 없을 것이다. 전생의 나도 그랬고.

그러나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꼈다. 아마추어는 '취미'로 끝낼 수 있어도 프로는 '일'로써 이어나가야 된다.

하기 싫은 날에도 글을 써야 하고, 연중을 하게 될시 수입에 큰 타격을 받는다.

나는 수입보다는 댓글을 보려고 연재했다만 타격을 입는 건 다르지 않다. 보는 사람이 줄어든다는 뜻이니까.

'옛날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딱히? 그런 건 없어요.'

지금은 아니다.

제논 일대기부터 시작하여 피와 강철까지. 이 두 작품 모두 내가 쓰고 싶어서 쓰는 작품이다.

예언가고 성자고 나발이고 부수적인 부분에 가깝지, 독자들의 반응을 보며 낄낄거리는 게 더 좋다.

수입도 마찬가지. 아버지 말씀에 따르자면 창고에 금괴가 너무 많이 쌓인 나머지 투자를 할까 생각 중이라고.

시간이 흘러도 책을 쓰는 이유가 순수한 '취미'라는 건 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누군가 쓰기 싫은 글을 억지로 쓰라고 한다면 차라리 손목을 자르겠죠. 하지만 피와 강철은 제가 쓰고 싶어서 쓰는 거예요. 뒤에 벌어질 일들은 제가 책임지면 되는 거고.'

이제는 슬슬 흐릿해진 기억이지만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레오르트와 리나가 내 정체를 얼핏 눈치채 압박했던 사건.

테르스 왕국에 비해서는 신사적으로 대해준 거지만 그때 나는 회의감이 들었다. 고작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가족에게 피해가 간다고.

다행히 휴재를 하면서 독자들이 시위를 펼친 덕분에 유야무야 해결됐지만, 이후에도 꾸준히 회의감이 들었다.

전생은 하기 싫은데도 써야 하고, 환생 후에는 쓰고 싶은데 주위의 눈치 때문에 못 쓸 것 같았으니.

이제는 전부 의미 없는 말이다. 악마 숭배자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나에게 직접적인 간섭을 할 수 없다.

책임을 확실하게 짊어지되, 즐기는 마음으로 쓰자. 이것이 현재 내가 갖고 있는 마인드다.

그런고로.

"칼즈 씨."

"··· ···"

"깨어난 거 알고 있으니까 말씀하세요."

"······잠시나마 돌이 되고 싶습니다."

이대로 칼즈를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통조림은 끝나지 않았다.

칼즈는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기야 다시 일어나서 일을 하기 싫겠지.

그도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취미가 아닌 일을 한다면 나 같아도 싫어할 것이다.

"굳이 제가 준 스케치에만 집중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칼즈 씨가 원한다면 다른 그림을 그리셔도 돼요."

"제논 님."

"네. 말씀하세요."

"어떻게 사람이 하나만 파고들 수 있습니까? 그것도 사흘 내내."

기력이 쇠했는지 칼즈는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나에게 질문했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 보며 그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그의 눈에는 다양한 감정이 섞여있는데, 나를 향한 존경심과 경외감이 두루 섞여있었다.

"아무리 기사여도 그만한 집중력을 보이는 건 불가능합니다. 불굴의 정신력과 궤를 달리하는 인내죠."

"그런가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

"허허."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해하자 칼즈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다.

대신 신성을 섭취했으니 아예 짐작이 안 가는 건 아니다. 전에 받았던 고행의 효과가 있을 수도 있고.

이래나 저래나 칼즈 입장에서는 내가 무시무시하게 느껴질 것이다. 내가 아버지와 형제들을 보면서 대단하다고 느끼는 것과 비슷하겠지.

"자자. 우선 일어나서 일부터 합시다. 이번에는 무슨 배경을 원하시죠?"

"음······"

칼즈도 어느 정도 진정됐는지 슬금슬금 몸을 일으켰다.

뒤이어 그는 백색으로 가득 채워진 방을 둘러보다가 나에게 물었다.

"이 공간은 아이작 님이 원하는대로 바뀌는 겁니까?"

"네. 제가 상상하는대로 바뀝니다."

"그러면 피와 강철 속의 장면도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어디까지나 상상이잖습니까."

"음?"

생각치도 못한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거라도 문제가 없다. 폭포수가 흐르는 숲과 밤하늘 아래의 모닥불도 상상에 지나지 않았으니.

칼즈가 나를 환생자라 의심할 여지도 없다. 단지 상상한 거잖아요~ 라고 넘어간다면 그도 납득하고 넘어갈 것이다.

'그런데 이건 모라 님이 내 생각을 읽고 바꾸는 게 아닌가?'

[아냐. 네 상상에 따라 배경이 바뀌는 거야. 내가 엄마한테 끌려갔을 때도 네 마음대로 바꿨잖니?]

내 의문에 곧바로 모라가 대답해줬다. 사적인 이야기라서 백색방 전체가 아니라 뇌리에만 목소리가 울렸다.

그렇다면 칼즈도 되는 게 아닌가. 나는 생각을 거친 후에 입을 열었다.

"칼즈 씨는 되나요?"

"아뇨. 아무리 상상해도 안 됩니다. 아마 아이작 님만 되는 것 같아요."

[칼즈는 신성력이 거의 없어서 그렇단다. 반면 아이작은 필멸자 중에서 두 번째로 많고.]

이번에는 공간 전체에서 모라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칼즈는 그녀의 말을 듣고 흠칫거렸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고 멈칫거렸다. 필멸자 중에서 두 번째라니, 그렇다면 첫번째는 케이트인가.

그럴 가능성이 높다. 케이트는 현재 신성력으로만 따지자면 교황을 웃돌았다는 소문이 팽배해 있다. 본인은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알겠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원하시나요?"

"피와 강철 속에 묘사된 전쟁을 보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이해가 가지 않는 질문이라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 묘사는 꾸준히 했는데 뭐가 부족한 걸까.

칼즈는 내 물음에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아이작 님의 묘사가 부족하다는 건 아닙니다. 단지 세계 자체가 상식과 동떨어져 있다 보니 그림으로도 설명하기 힘들죠. 이건 저도 다를 게 없습니다."

"계속 설명해주세요."

"아시다시피 저도 전쟁은 전투와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총을 쏜다는 묘사, 폭탄이 터져 사지가 분해됐다는 묘사, 전차가 우렁찬 포효를 내질렀다는 묘사 등등. 눈으로 직접적으로 보지 않는 이상 그것이 어떤 위력을 나타내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칼즈 씨의 말씀은, 좀 더 정밀한 삽화를 위해 어떤 장면인지 보여달라는 말이죠?"

"정확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피와 강철은 전차, 비행기, 전함 같은 기계 병기뿐만 아니라 특정 장면도 삽화로 등장한다.

폴란드 침공 당시 폭격기가 민간에 폭격을 가한다던지, 낫질 작전에서 전차들이 전격전을 펼친다던지 등등.

묘사로도 설명하기 힘든 건 삽화로 보충하고 있지만 그것마저 부족했다.

칼즈는 폭격기가 얼마나 위력적인지 모르며, 육중하면서도 날렵한 전차의 움직임도 모르니까.

"그걸 보여준다면 그림으로 묘사할 수 있다는 거죠?"

"아이작 님께서 설명해주시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죠. 아, 물론 아이작 님의 설명이 부족하다는 건 아닙니다. 단지 세계관 자체가 너무 달라서 그런 거예요."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또 길이 갈렸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칼즈에게 물었다.

"어떤 걸 원하십니까? 원하신다면 삽화를 그릴 때마다 보여드릴 수는 있습니다."

"솔직히 인물은 필요없습니다. 아이작 님께서 보내주신 스케치만으로 충분하니까요. 단지 피와 강철 속 전쟁이 얼마나 잔혹하고 무자비한지만 알려주십시오."

"그런 거라면······"

아주 적당한 게 하나 있다. 2차 세계 대전의 참혹함을 제대로 보여준 장면이자 전쟁 영화의 교과서였으니.

대신 이건 영화 속의 장면이라 상상만으로는 힘들다. 주인공보다는 전쟁의 참혹함 그 자체에 집중한 탓에 장면이 중구난방으로 바뀐다.

무엇보다 직접 체험하지 않았다. 폭포수나 모닥불은 소리로나마 들었어도 영상으로는 한계가 명백하다.

'모라 님?'

[당시 있었던 일을 그대로 묘사해줄까, 아니면 영화 속의 장면을 재현해줄까?]

내 생각을 미리 읽고 있던 모라가 내가 원하는 질문을 꺼냈다. 나는 여기서 후자를 선택했다.

아주 미미한 고증 오류는 있어도 실제와 다를 바 없는 현실감을 자랑하는 영화다.

오죽하면 참전용사가 '그때와 다른 건 냄새뿐이었다'라며 회환에 젖을 정도다.

이쯤되면 모두 예상했겠지만 앞으로 칼즈에게 보여줄 건 '라이언 일병 구하기' 속 노르망디 상륙작전.

그것도 '피의 오마하 해변'이라는, 2차 세계 대전의 끔찍함을 제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큰 충격을 받으실 수도 있어요. 그래도 괜찮습니까?"

"괜찮습니다. 심심하기도 하고, 보다 더 나은 삽화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수할 겁니다."

"··· ···"

저거 어디선가 많이 본 태도인데. 누구였더라.

[저거 너잖니. 아무 생각없이 일을 저지르던 너.]

나였구나! 어쩐지 익숙하더라.

나는 모라의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는 영화 속 그 장면을 떠올린다.

파도가 넘실거리는 해변. 그 해변 위에 박혀있는 철구조물들. 마지막으로 구름이 끼어 우중충한 날씨.

짜디 짠 바람이 불어오는 해변 너머로 수십 개의 상륙정이 바다를 가로지르고 있다.

"어, 어어? 여기가 어디지? 설마 바다?"

상상을 하고 있을 때 칼즈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나는 한 쪽 눈을 뜨며 주변을 살펴봤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상륙정 안에, 나와 칼즈가 덩그러니 들어가 있었다. 주변에 미군들로 가득 채워진 채.

군복을 입고 있는 미군들과 다르게 우리는 입고 있던 옷 그대로다. 다소 이질적이다.

[상륙까지 30초 전!]

뒤쪽에서 배를 운전하는 병사가 손가락 3개를 펼치며 크게 외친다. 그와 동시에 앞에서 지휘관이 뭐라뭐라 명령을 내렸다.

여기까지는 영화와 똑같다. 나는 30초 뒤에 벌어질 비극을 기다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긴장으로 신에게 기도를 하거나 구토를 하는 병사들. 손을 덜덜 떨면서 소총을 붙잡는 병사들.

지휘관들이 병사들을 독려하지만 본인도 긴장되기는 매한가지다.

그리하여 상륙정이 해변에 도달하고, 입구가 개방되면서 들리는 건······

드르르르륵!

히틀러의 전기톱이 가동되는 소리였다.

******

이후로 시간이 흘러 피의 오마하 해변씬이 종료되고.

"우웨에엑!"

"괜찮으세요?"

"아, 아ㄴ······ 우욱!"

나는 칼즈의 등을 열심히 두드려줬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