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39 - 신화(3)
한 가지 질문을 하겠다. 신을 믿는 신자들이 없다면, 그 신은 존재 의의가 있는가?
신은 자신을 믿는 신자들의 신앙을 통해 존재할 수 있다. 설령 그 신앙에 대한 보답을 해주지 않아도 말이다.
지구는 머나먼 과거, 각 민족마다 고유의 신들을 모셨으나 현재는 대부분 하느님을 믿고 있다.
이렇다 한들 그들이 믿던 신들의 존재가 아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신화는 최초의 설화이자 철학이 되어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평가받고 있었으니까.
따라서 신의 존재가 완전히 소멸하기 위해서는 기록은 물론 말에서 말로 전해지는 설화마저 없어져야 된다.
그리고 그 방법 중 가장 쉬우면서도 효과적인 게 바로 물리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것.
히틀러가 모든 유대인을 말살시키기 위해 홀로코스트를 운영했듯이, 루미너스 또한 이와 비슷한 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추정됐다.
"······루미너스 님께서 학살을 저지르셨다고요?"
나는 예상을 훨씬 넘어선 루미너스의 과거를 듣고 놀람 반, 의문 반의 심정으로 물었다.
루미너스의 숨겨진 권능이 '전쟁'이라는 것마저 놀라운데 홀로코스트와 비견되는 학살까지 일으켰다니.
평소 그는 온화하고 다정한 형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헌데 꽤나 무시무시한 과거가 숨겨져 있다.
동시에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그 전쟁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됐기에 루미너스가 대학살을 일으킨 것일까.
과연 납득이 될만한 이유가 있을지, 아니면 순수 욕심 때문에 그런 것인지 궁금해졌다.
원래 착한 사람이 화나면 무섭다는 말도 있으니까.
[흠. 이것까지 말할 수 있을지 몰랐군. 보통 같으면 말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루미너스 그 놈이 너를 믿고 있나 보구나.]
"예?"
그런데 모건 왕이 생뚱맞은 이야기를 꺼냈다.
턱을 쓰다듬으며 신기해하는 것이, 자기가 얘기해놓고 그게 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다.
[아무것도 아니니라. 아무튼 루미너스가 모처럼 제약을 완화시켰으니 할 이야기도 늘어나겠군. 그 놈이 어째서 신의 존재마저 소멸시킬 대학살을 저질렀는지 궁금한 게냐?]
"네. 루미너스 님이 전쟁의 신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만한 학살은 분명 이유가 있겠죠."
난징 대학살조차 전쟁이 낳은 광기라며 어느 정도 납득하고 넘어가는 수준이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는 전세계가 말 그대로 발칵 뒤집어진, 세계사에서 더 없을 끔찍한 학살극으로 남았다.
아무리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한들 미친 행위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루미너스는 저것과 똑같은 행위를 저지른 거다.
차이점이라면 나치 독일은 패배했고 루미너스는 승리했다는 것.
기록마저 싸그리 없어진 걸 보면 더 깊은 사연이 있는 걸로 보였다.
[그럴 만한 이유라... 안타깝지만 그것조차 정확하지 않아. 우리가 바다를 건너서 기록을 찾았지만 그것마저 온전치 않았으니.]
"모른다는 건가요?"
[정확하지 않을 뿐, 모르는 건 아니지.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전쟁은 광기를 낳는다는 것. 그리고 전쟁의 신조차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지.]
전에 루미너스가 말했던 것과 똑같다.
전쟁은 광기를 낳지만 정작 그 전쟁을 선포하는 자들은 지극히 이성적이라고.
다시 말해 전쟁의 신조차 광기에 빠질 정도로 온갖 비극이 넘쳐나는 전쟁이었다는 뜻이다.
애당초 신들의 전쟁이었으니 광기가 넘쳐나는 건 당연한 일일 터.
하지만 그 루미너스에 광기에 빠져 신은 물론 신자들까지 학살했다는 건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믿기 어렵네요."
[믿든 말든 네 자유이니라. 난 그저 진실만을 얘기할 뿐.]
"좀 더 자세한 이유를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폐하의 말씀대로 루미너스 님은 전쟁의 신이고, 전쟁은 광기를 낳죠. 하지만 고작 그 정도 이유로 대학살을 일으켰다는 건 당위성이 매우 부족합니다."
그 히틀러조차 나치 독일 전체를 선동하여 홀로코스트를 유발했다.
히틀러 혼자 미쳐있었다면 결코 발발하지 않았을 대학살.
그러나 나치 독일은 명령이라는 이유로 기꺼이 지시를 따랐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이론이 등장할 정도로 기이한 광기.
루미너스도 이런 경우였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궁금하다.
무턱대고 대학살극을 일으켰다면... 실망할 것 같았으니.
[의외로 루미너스에 대한 믿음이 깊나 보구나. 혹시 그 놈이 패륜까지 저지른 건 알고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 바다와 관련된 신의 존재도 얼추 알고 있구요."
[흠. 신기하구나. 보통 같으면 신앙심이 흔들리기 마련인데. 역시 다른 세계에서 온 영혼이란 건가?]
"네?"
모건 왕이 턱을 쓰다듬으며 흥미로워한다. 이에 나는 살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그는 내가 다른 차원에서 온 영혼이라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아까 전의 상황 재현도 그렇고 루미너스를 대놓고 까는 것도 그렇고 필멸자에서 벗어난 몸인 건 확실하다.
[뭘 그리 놀라느냐? 별로 놀랄 것도 아닌데 말이지.]
"어느 부분에서 유추하신 거죠?"
[많은 부분에서.]
그리 말한 모건 왕은 손을 위로 올리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러자 아까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책들이 두둥실 떠오르는 게 아닌가.
신성력 덕분에 전보다 훨씬 좋아진 시력으로 그 책의 정체를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제논 일대기와 피와 강철. 전부 내가 쓴 저서들이다.
[이것들을 통해 약간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지. 정말 미래에서 돌아온 영혼이었다면 짐도 눈치챘을 터. 하지만 여태까지 그런 징조는 전혀 느끼지 못했노라. 피와 강철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무슨 뜻인지 알겠나?]
"네."
이로서 한 가지는 확실하다. 모건 왕은 필멸자의 그릇에서 한참 벗어난 존재라는 것.
원령들이 보여준 상황 재현 이후로 그에게 어떤 고난이 주어졌는지 모른다.
하지만 영혼이 이곳에 속박된 걸 보면 신들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측됐다.
[혹시 어디서 왔는지 물어봐도 되겠느냐?]
"지구라고, 제 추측이지만 바다의 신을 현혹시킨 세계에서 넘어왔습니다."
[뭐라? 하하하하하!]
쿠르릉!
뭐가 웃긴지 몰라도 모건 왕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귀가 멀 것 같은 폭소도 폭소지만 알현실 전체가 지진이 난 것마냥 흔들린다.
재현된 원령을 봤을 때도 예측하고 있었지만, 모건 왕은 영혼임에도 물리적인 간섭이 가능했다.
그 힘이 얼마나 강하면 폭소만으로도 궁전이 흔들릴 정도일까. 사뭇 생전의 힘이 궁금해진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정말로 바다의 신을 매혹시킨 신들의 고향이란 말이냐?]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입니다. 다만 그 가능성이 높을 뿐이죠."
[정말 재미있어. 지구라······ 대체 어떤 곳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세계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는군. 헌데 네가 이곳으로 넘어온 경위는 그것과 다른 것 같다만?]
"예. 어떻게 된 거냐면······"
모건 왕이 성심성의껏 대답했던 것처럼, 나 또한 그의 질문에 충실히 답해줬다.
가장 먼저 악마 숭배자의 소환 의식과 그걸 완전히 망가뜨린 클라크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그 의식이 실패하여 내가 넘어오게 됐으며 전생의 지식을 빌려 책을 쓴 이야기.
그 책들이 이곳 기준으로는 문화 충격을 넘어서 완전히 무너뜨릴 정도였던 것까지.
모건 왕은 내가 이야기를 하나둘씩 풀 때마다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흥미롭다는 표정이 내 눈에 잡혔다.
[정말 재미있구나. 세상을 한 번 멸망시키는 데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던 세계가 또다시 영향을 끼치다니. 그나저나 악마 숭배자 놈들이 소환하려던 게 정녕 바다의 신이 맞느냐?]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흠. 그것 참 이상하군. 바다의 신은 추방이 아니라 이 세상 어딘가에 봉인돼 있을 터. 어째서 네가 넘어왔는지 알 수 없구나.]
"··· ···"
나는 미간을 좁혔다. 흘러가듯이 말했으나 모건 왕의 말은 상당히 날카로웠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악마 숭배자가 소환하려던 건 봉인된 바다의 신일 터.
비록 미수로 종료됐으나 생뚱맞게도 다른 차원에 속해있던 내가 이곳으로 넘어왔다.
클라크 할아버지의 방해로 '좌표'가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대상'이 잘못된 것인지.
지금까지 그런갑다 하고 넘어간 것이었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악마 숭배자들이 정말로 바다의 신의 봉인을 해제하려던 게 맞나?'
아니면 대체 무엇을 소환하려던 것일까.
클라크 할아버지가 소환 장소를 죄다 초토화시키는 바람에 자세한 정황은 파악하기 어려웠다.
여러모로 머리가 복잡해진다. 의문을 풀기 위해 찾아왔건만 의문이 점점 불어나는 기분이다.
"듣고보니 이상하네요. 어째서 지구에 살던 제가 넘어온 걸까요?"
[그건 루미너스에게 직접 물어보는 편이 낫겠구나. 답을 알려줄지는 미지수지만. 그럼 이제 네 차례군. 무엇을 물어보고 싶은가?]
"루미너스 님이 과거에 히틀러······ 아니, 아니."
하마터면 결례 아닌 결례를 끼칠 뻔했다.
하지만 인종을 넘어 인류를 청소했다는 생각에 자연히 그 분이 떠올랐다.
다행히 천벌이 떨어지지 않는 걸 보면 씁쓸할지언정 넘어가는 듯했다.
"폐하께서는 루미너스 님이 신의 소멸을 위해 신자들까지 학살했다고 하셨죠."
[그렇지.]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전쟁이 광기를 낳는다지만 루미너스 님은 신입니다. 무려 신이 광기에 휘말릴 정도의 무언가가 있는 건지······"
[정확하다.]
내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모건 왕이 무거운 음성으로 긍정했다. 그 말을 듣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토록 온화한 루미너스가 광기에 빠질 만큼의 사건이 있었다. 모건 왕은 그리 말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인지, 아니면 단순히 전쟁 때문인 건지 궁금하다.
이어서 묘한 긴장감이 내려앉았을 때쯤, 모건 왕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입을 열었다.
전과 달리 오만한 말투가 아닌, 하나의 이야기를 가르쳐주는 현자에 가까웠다.
[젊은 후손이여. 그대라면 그대의 아버지가 특정 사상에 흠뻑 빠져 그릇된 길을 간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것이 그릇된 길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잘못된 길이라면 필사적으로 막을 겁니다."
빈말이 아니라 어떻게든 막을 것이다.
안 그래도 마음의 상처가 많으신 분인데 사상에 흠뻑 빠진다면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
모건 왕도 내 말에 담긴 의지가 진심인 것을 느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루미너스도 그와 비슷했노라. 자기 아버지가 사상에 빠져 그릇된 길을 간다고 판단하여 반기를 들었지. 하지만 명분이 없는 반기는 마음을 얻지 못 해. 설령 그것의 전쟁의 신이라고 해도 말이지. 신들의 전쟁에는 수많은 신들이 얽히고 섥힌 전쟁이었다.]
"······바다의 신이 그릇된 길을 간다고 믿은 신들이 많았다는 겁니까?"
[그래. 내가 한 번 물어보도록 하지. 너의 세상은 마나 혹은 마법이 존재하는가? 이 책을 보자면 없는 것 같은데 말이지.]
모건 왕은 둥둥 떠다니던 책들 중 피와 강철을 가리키며 질문했다.
당연하게도 나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군.]
"제가 살던 세상에 마나와 마법이 없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까?"
[그럼 너는 어째서 이 세상에 마나와 마법, 그리고 신성력이 존재하는 건지 의문을 가진 적이 있느냐?]
"그야······"
판타지니까. 라고 대답을 하려다 말고 우뚝 멈췄다.
방금 전의 소환 부분도 그렇고 너무나도 당연하던 것들에 의문이 부여하다보니 무엇 하나 풀리는 게 없다.
자연스러운 거니까. 당연한 거니까. 없는 게 이상하니까.
그러나 학자의 마음가짐으로서 여기에 의문을 부여하는 순간 절로 눈쌀이 찌푸려졌다.
일단 이와 관련된 학자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가설은 이렇다.
"······신이 인류에게 준 능력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러면 너희 세상은 어째서 신이 존재함에도 마나와 마법, 그리고 신성력이 없는지 알고 있나?]
"··· ···"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
그리스·로마 신화를 비롯한 다양한 신화가 종교가 아닌 말 그대로 '신화'로만 존재하는 이유.
[바다의 신이 승리해도 상관없고, 패배해도 상관없었지.]
지구에 다양한 종족은커녕 인간밖에 존재하지 않는 이유.
[인류는 어차피 멸망의 수순을 밟게 돼 있었을 걸세. 루미너스는 그걸 필사적으로 막은 거지.]
이 세상은 바다의 신이 패배했고.
[그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광기가 피어오른 거라네.]
지구는 야훼가 승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