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36 - 지금 만나러 갑니다(3)
인류는 적응의 동물이다. 지능도 지능이지만 압도적인 적응력 하나로 먹이사슬 최강자에 올랐다 해도 무방하다.
어떤 자연환경이든, 어떤 맹수가 존재하든지 개의치 않았으며 설령 생활에 적합하지 않더라도 적합하게 만든다.
이 세상도 다를 바가 없다. 강력한 몬스터 및 끔찍한 자연 환경에도 인류는 천천히 적응했다.
전생에 비해 기술력이 발달되지 않아 개간되지 않은 땅이 더 많지만 과거에 비하면 대단한 수준.
하지만 지구보다 더 강력한 힘을 지닌 인류여도 사막, 특히 회색 사막만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막이 어떤 곳인가. 보통 사막하면 뜨거운 태양빛과 더불어 사방이 온통 모래밖에 없는 지역이다.
사람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횡단하는 것마저 목숨을 걸어야하는 곳.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 덕분에 거대한 문명을 세울 수 있었지만 회색 사막은 강은커녕 오아시스도 없다.
심지어 지역상으로도 서쪽 끝에 위치한 탓에 지나갈 이유도, 생각도 없었다. 여기에 다양한 몬스터가 잠들어 있기까지.
위험천만하기 그지 없는 곳이지만 최근 원정을 통해 다양한 유물들이 발굴되면서 고고학자들의 천국으로 바뀐 상황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그곳에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기에 꼼꼼히 채비를 갖춘 후 발걸음을 옮겼다.
"진짜 더운 게 아니라 뜨겁구나."
세이비어 측의 도움을 받아 텔레포트로 도착한 회색 사막. 나는 사막의 강렬한 햇빛을 온 몸으로 느끼는 중이었다.
클라크 할아버지와의 대화 이후로 준비가 되자마자 회색 사막, 그것도 게리오스 왕국 옛 수도로 넘어온 상황이다.
사막을 횡단하기 위해 온 몸을 감싸는 복식은 물론이요 자외선 차단제도 잊지 않았다.
지금 시대에서 웬 자외선 차단제라고 할 수 있는데 미네르바 제국은 사계절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름에는 태양이 사막 못지 않게 뜨겁다. 그래서 마리가 챙겨준 거고.
'미네르바 제국의 여름은 찜통 그 자체지만.'
사막의 기후는 건조하여 뜨겁지만 미네르바 제국의 여름은 습도가 높아 후덥지근하다.
비유하자면 돋보기로 빛을 모아 지지는 것과 찜통의 차이다. 그래서 여름에 에어컨이 필수다.
사막은 그나마 햇빛을 피할 수 있는 옷, 특히 양산 하나만 있어도 무더위를 피할 수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다.
"곧바로 궁전으로 가시겠습니까?"
생전 처음 발을 디딘 사막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을 때 옆에서 케이트가 제안했다.
그녀도 나처럼 사막의 기후로부터 보호받기 위한 복장을 착용하고 있다.
대신 아예 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꽁꽁 감싼 나와 달리 상대적으로 편해보였다.
나는 적발금안이라는 화려한 외모 덕분에 가리는 것조차 고역이었으니. 말을 했지만 비공식적인 방문이라 어쩔 수 없다.
만약 선글라스가 발명됐다면 선글라스마저 착용했을 것이다.
"아뇨. 우선 만날 사람이 있거든요. 엘레나, 그리고 신디 교수예요. 그 분들부터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 거예요."
"알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케이트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 자리를 떴다. 그동안 나는 게리오스 왕국 수도를 둘러봤다.
원정대가 수도에 도달한 지 몇 개월이 흘렀으나 정작 작업하는 사람은 몇 명 없었다.
듣자하니 외부부터 천천히 정리하기 위해서였나. 서쪽 전체를 지배했던 왕국이어서 발굴할 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나저나 바다는 오랜만에 보네.'
게리오스 왕국 수도의 특징은 중앙에 떡하니 배치된 궁전도 궁전이지만 바다가 가장 눈에 띄었다.
지구와 달리 악마가 탄생시켰다던 바다. 하늘에서 내린 비가 바다로 변했다는 신화는 유명하다.
전생에서도 바다를 직접 본 적이 손에 꼽은데 이번 생은 완전히 처음이다.
'바다를 이용해서 부국강병을 이룬 문명도 많은 걸로 아는데.'
대표적으로 로마 제국이 있다. 지중해를 이용하여 천년제국이라는, 유럽 문명의 기초를 갈고 닦은 나라.
이곳으로 오기 전 케이트가 윗선의 도움을 빌려 게리오스 왕국의 영토를 보여준 적이 있다.
영토 자체는 놀랍게도 로마 제국과 흡사했으며 바다를 끼고 있다는 것까지 똑같았다.
그런 왕국이 악마 전쟁 한 방으로 우르르 무너졌다. 아무리 강해도 고대 인간이 악마를 상대할 수 있을리가 만무했겠지.
'바다는 악마들의 천국이라고 하지 않았나? 옛날에는 생각이 달랐나 보네.'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다를 기피하다 못해 저주받은 영역이라 치부하고 있다.
대신 바다의 메리트가 없어진 건 아니다. 바다를 무시했다면 세계의 문명이 이정도로 발달되지 않았겠지.
출항을 하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걸어야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지역. 말 그대로 강한 사람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다.
'두려움 때문에 세계 일주 같은 건 꿈도 못 꾸고 있지만.'
전에 말했다시피 이 세상의 항해술은 중세 이전에 머물러 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전에 가깝다.
용감한 자들이 매번 바다를 점령하기 위해 나서고 있으나 몬스터를 비롯한 극악의 환경이 시시각각 방해하고 있었으니.
게다가 '크라켄' 같은 초대형 몬스터의 존재가 밝혀진 이상 무서워서라도 못할 것이다.
'여러모로 복잡한 세상이란 말이야.'
신의 존재가 명확하여 '인권' 같은 분야는 잘 발달돼 있었으나 몇몇 부분은 신화에서 나올 것 같이 취급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겠지만 나에게는 판타지답게 여길 점들이 매우 많았다.
환생한 지 20년이 다 되어간다지만 뿌리 깊게 박힌 전생의 상식 때문에 가끔 가다 혼란스럽다.
'저기에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 거겠지?'
나는 바다를 바라보다가 수도 중심에 우뚝 서 있는 궁전에 시선을 옮겼다.
악마 전쟁으로 대부분의 건축물이 파괴된 반면 궁전만큼은 상대적으로 잘 보존돼 있었다.
추측성에 불과하지만, 게리오스 왕국민들을 악마로 변화시키기 위해 남겨놓은 건물이 아닐까.
상징적으로나 실용성으로나 궁전만큼 '중심'이 될 만한 건 없었을 테니까.
"아이작 님. 말씀하신 두 분을 찾았습니다."
궁전을 빤히 관찰하는 도중에 케이트가 돌아왔다. 사람이 몇 없다 보니 찾는 속도도 빠르다.
"아, 네. 지금 어디에 있으신가요?"
"지금 이곳으로 오는 중입니다."
"아이작?"
케이트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말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나는 케이트의 어깨 너머에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곳을 바라보는 엘프들과 마주했다.
사막 지역에 알맞은 복장을 입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인상적인 외모를 감출 수 없었다.
나를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만들어놓고 회색 사막 원정을 떠난 교수, 엘레나와 신디.
마지막으로 그 옆에는 아르웬이 친히 붙여놓은 엘프 전사, 아이케르가 우뚝 서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교수님. 신디랑 아이케르 씨도 잘 지내셨어요?"
"세상에. 정말 아이작이 맞구나! 이거 얼마만이니?"
"안녕······ 오랜만이네······"
화색을 띠며 반갑게 인사한 엘레나, 피로에 찬 목소리로 인사하는 신디. 마지막으로 아이케르는 가볍게 목례를 취했다.
나는 엘레나와 악수를 하면서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쳤다.
"이렇게 꽁꽁 감싸고 있는데 용케 알아보셨네요?"
"알아볼 수밖에 없지. 눈도 눈인 데다가 머리도 다 가린 게 아니잖니? 멀리서 봤을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 오니까 티가 확 난다, 얘."
엘레나의 말마따나 내 머리카락이 너무 긴 바람에 완전히 숨기는 건 불가능했다. 지금도 가끔씩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그럼에도 용케 들키지 않은 이유는 사람이 적은 것도 있고 멀리 떨어져서 구경만 했기 때문이다.
설령 들킨다 하더라도 탐사에 참여한 학자들은 죄다 변태(...)밖에 없어서 나에게 관심조차 안 줄 가능성이 높다.
나와 인터뷰하는 것보다 한 점의 유물을 찾는 게 더 소중하니까. 학자라는 직종이 원래 그렇다.
"그나저나 여기는 왜 온 거니? 찾는 거라도 있어?"
입을 가리는 복면을 내리고 있을 때 엘레나가 의문을 담아 물었다.
케이트가 상부에는 보고했다지만 아무것도 모르겠지. 이들은 관계자가 아니라 탐사자다.
아이케르는 아르웬을 통해 내가 이곳에 온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을 터. 대신 목적은 모를 가능성이 높다.
"루미너스 님께서 저를 이곳으로 보내셨어요.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다고."
"만나야 하는 사람이라면······"
엘레나가 작게 중얼거리더니 궁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랜 기간동안 이곳에 머물렀던 만큼 무언가 알고 있는 모양이다.
"뭔가 알고 있는 눈치네요. 궁전 안에 누가 있는 건가요?"
"직접 가진 않았어. 세이비어 쪽에서 철저히 막았거든. 그대신······"
엘레나는 말을 하다 말고 케이트를 힐끔거렸다. 아무래도 케이트가 세이비어 교국 관계자라 그런 모양이다.
"케이트 씨는 괜찮아요. 입이 무거운데다가 이런 분야에는 관심이 없거든요."
"전 루미너스 님의 말과 아이작 님의 부탁에 따라 움직입니다."
"어······ 네."
앞은 몰라도 뒷말이 조금 당황스러웠는지 엘레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도 마음 편히 말할 수 있겠지.
그녀는 헛기침을 하며 목을 푼 후에 말을 이어갔다.
"그대신 아주 중요한 정보를 전달받았지. 너도 누구인지는 대충 알고 있지?"
"아르웬에게 들었어요."
분명 시리스일 것이다. 다크 엘프의 잠입 능력은 어지간한 실력자여도 감지조차 힘드니 정보를 빼는 건 쉬웠을 터.
엘레나는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케이트를 쳐다봤다.
"실례지만 잠깐 자리를 비켜주실 수 있으신가요? 아이작과 따로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저는 아이작 님의 호위 기사로 이곳에 온 거라······"
"한 번만 부탁드릴게요. 케이트 씨께서 알아서는 안 되는 이야기라서."
"··· ···"
간절한 엘레나의 요청에 케이트는 말없이 나를 쳐다봤다. 내가 허락한다면 순순히 떠나겠다는 표시였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허가했다. 아이케르가 곁에 있으니 누가 기습할 여지도 없다.
무엇보다 엘레나가 구태여 케이트를 콕- 집은 걸 보면 '신'과 긴밀한 연관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알겠습니다. 저는 쉼터에 있을 테니 일이 끝나면 찾아와주세요."
"감사합니다."
"그대들에게 루미너스의 빛이 있기를."
케이트는 공손하게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엘레나는 케이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나에게 말했다.
"그럼 우린 저기로 가자. 가능하면 사람이 없는 곳에서 말하는 게 좋으니까."
"네."
"그나저나 너 이번에 낸 신작 엄청 흥미롭더라. 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길래 그런 생각들을 하는 거니?"
자리를 이동하면서 피와 강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잊지 않았다.
엘레나와 신디는 학자이다보니 다른 사람에 비해서 이것저것 많은 질문을 날렸다.
나는 그럴 때마다 전생에 대한 이야기는 최대한 배제하면서 답을 꺼냈다.
그냥 상상으로 쓴 거라고, 제논 일대기 때도 상상으로 썼다가 이렇지 않았냐고 하니까 다들 납득하고 넘어가더라.
"정말 다른 세상에서 온 게 아니고?"
물론 의심이 갈만한 정황이 너무 많아서 중간중간 저런 질문이 비집고 들어왔다.
이에 나는 능청스러운 투로 역으로 되물었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요?"
"날로 먹는 놈이라 하려고 했지. 나 같아도 무조건 적을 거야."
"··· ···"
역시 내가 알던 교수님답게 입담 하나는 굉장하시다.
나는 진담인지 농담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엘레나의 대답에 쓴웃음을 흘렸다. 그녀도 싱긋 웃어줬다.
"여기는······ 항구인가요?"
"조사한 바로는 그래. 그것도 평범한 항구가 아니라 조선소도 겸했을 걸로 추측하고 있어."
그리하여 우리가 도착한 장소는 항구로 추정되는 모래 사장. 정확히는 배를 건조하는 조선소로 추정되는 곳이었다.
악마들과 해수면의 상승으로 바다가 전부 쓸어버린 줄 알았는데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이런 걸 보면 신기하다. 세월의 흐름에도 꿋꿋이 버티고 있는 역사의 흔적이라는 게.
'아까 보니까 등대 비슷한 것도 있었고.'
도대체 게리오스 왕국은 어떤 곳이었을까.
로마 제국와 비슷한 역사를 가졌다는 건 유추할 수 있어도 그 외에는 모른다.
나는 항구의 흔적이 남아있는 바닷가를 둘러보다가 엘레나의 뒤를 말없이 따라갔다.
그녀가 향한 곳은 조선공들이 숙식하던 곳으로 생각되는 집이었는데, 놀랍게도 지하실이 있었다.
지하실이 있다는 건 최소한 환기의 개념은 알고 있다는 뜻. 고대에 건국된 문명임에도 여러모로 놀라운 사실들이 연달아 튀어나왔다.
"여기면 되겠지. 혹시 오는 길에 전달 받은 건 있어?"
지하실에 도착한 엘레나가 팔짱을 끼며 나에게 질문했다.
루미너스로부터 게리오스 왕국에서 누군가와 만나라는 부탁만 받았을 뿐, 그 외에는 없었다.
그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엘레나는 안경을 치켜올리더니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될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음······ 일단 이것부터 읽을래? 너도 고대어는 해독할 수 있지?"
"어느 정도는요."
나는 엘레나로부터 낡아빠지다 못해 산산이 흩어지기 직전인 책을 넘겨받았다.
고대의 언어라고 해봤자 별로 어렵지는 않다. 그냥 한글에서 영어로 해석하는 느낌이며 사전 비슷한 책마저 존재한다.
더군다나 제논 일대기를 집필하기 전 심심풀이로 읽던 게 머릿속에 박혀있어서 해독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841년 2월 21일······ 음?"
나는 첫 글귀부터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은 전생과 비슷하게 '태양력'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루미너스와 모라가 각각 태양과 달을 상징하다보니 양력과 음력마저 나뉘어진 상태다.
그래서 태양력 자체는 별 문제가 없으나 요점은 년도다.
841년 즉, 게리오스 왕국이 건국된 지 841년이 흘렀다는 뜻.
천년제국 로마와 비등한 시기도 시기지만 게리오스 왕국은 악마 전쟁 당시 멸망한 나라다.
그리고 '최초의 문명'으로 칭해지는 알븐하임이 약 3500년 전에 건국됐고.
"······게리오스 왕국이 알븐하임보다 더 일찍 건국된 건가요?"
"우리가 조사한 바로는 그래. 혹시 몰라 성지까지 방문했지만 그것과 관련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지."
"으음······"
성지는 세상 모든 역사를 기록하는 최대 규모의 도서관이자 기록보관소.
그곳마저도 게리오스 왕국의 건국년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데 이 작은 책 하나만 믿기에는 좀 그렇다.
물론 게리오스 왕국이 알븐하임보다 이른 기간에 건국됐다 하더라도 이상하다. 그냥 역사만 살짝 바뀔 뿐이니까.
알븐하임 쪽에서는 난리가 나겠지만. 이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이건 좀 더 조사해야 알겠네요. 증거가 너무 부족해서 무작정 발표했다가는 역풍만 얻어맞을 거예요."
"네 말이 맞아. 그래서 궁전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세이비어 놈들이 계속 안 된다고 해서 말이야."
"대신 들어간 분이 있죠?"
내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묻자 엘레나도 씨익 웃으며 안경을 치켜올렸다.
"물론이지. 시리스 씨?"
"네."
엘레나의 부름에 어둠 속에서 어느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건강미가 돋보이는 구릿빛 피부와 노출이 강한 복장. 다크 엘프 특유의 짧게 잘려나간 귀까지.
아르웬의 첩보원 역할을 도맡고 있는 다크 엘프, 시리스다. 나처럼 황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에 약간의 반가움이 담겨있었다.
"안녕하세요, 시리스 씨.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예."
짧고 간결하게 대답하는 시리스. 특유의 허스키하면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매우 인상적이다.
"너도 보다시피 여왕님께서 보내주신 인원이야. 덕분에 놈들이 숨기려던 진실을 아슬아슬하게 건질 수 있었지."
"여기 있습니다."
엘레나의 설명 이후 시리스가 나에게 두루마리 한 장을 건네줬다. 말을 들으면 궁전 안에서 몰래 빼내 온 물건인 듯했다.
이에 아무 생각없이 받으려던 찰나, 엘레나가 내 손을 덥썩 붙잡았다.
나는 갑작스러운 행동에 깜짝 놀라며 그녀를 쳐다봤다.
엘레나는 드물게 진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리미리 경고할게. 나도 이게 정말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보는 것만으로도 신에게 큰 위협이 될 수도 있어."
"··· ···"
"우리는 입을 싹 다물면 그만이지만 너는 아닐 거야. 너는 우리보다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니까."
뒤이어 그녀는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최후의 통첩을 날렸다.
"······신들께서 너에게 무슨 짓을 할 지 몰라. 어쩌면 보자마자 벼락을 맞을 수도 있어."
"··· ···"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지하라서 벼락을 맞을 일도 없는데.
무엇보다 이들은 신들이 나에게 아무런 해를 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해를 가하는 순간 지구에서 대대적인 침공이 이루어 질 텐데 절대 못 하지.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 신들과 대적할 수 있는데도?"
"네. 그게 아니라면 루미너스 님께서 저를 이곳으로 보내시지도 않았겠죠."
"··· ···"
자신만만한 내 대답에 엘레나를 한동안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붙잡은 손을 슬그머니 놓아줬다.
나는 그녀가 손을 놓아주자마자 돌돌 말려있던 두루마리를 펼쳤다.
두루마리를 펼치자마자 주변이 삽시간에 고요해졌으며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했다.
"······오."
때로는 감탄했으며.
"흐음······"
때로는 고개를 끄덕였으며.
"······응?"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는 당황했다.
그러나 엘레나가 건네준 두루마리의 내용은 놀람 그 자체였다.
신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명확히 보여줌과 동시에 어째서 과거를 숨기려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신들은 사람이 해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 패륜을 저질렀다. 그것도 전쟁을 통해서.
"어때? 무슨 생각이 들어?"
내 반응을 확인한 엘레나가 조심스러운 투로 물었다.
나는 두루마리 속 내용을 읽는 걸 멈추며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드니 하나같이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기야 내 입지가 입지다보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그들이 예상치 못한 것 한 가지.
"그냥 뭐······"
지구에서 넘어온 나에게 있어서 신들이 '패륜'을 저지르는 건.
"흥미롭네요."
흔해빠진 신화에 지나지 않았다.
아. 물론 지구 신들이 간섭한 걸 제외하면은.
'따지고 보면 지구의 신들이 똥 뿌린 거 아닌가?'
아메리카 땅을 침범한 유럽인들 같으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