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35 - 지금 만나러 갑니다(2)
루미너스에게는 곧장 출발한다고 말했지만, 무작정 짐 싸고 출발하지는 않았다.
내가 앞으로 향할 곳은 회색 사막, 그것도 서쪽 전반을 지배했다는 게리오스 왕국의 유적지다.
현재 유적지를 탐사하느라 수많은 인력이 모이는 중인데 무턱대고 갔다가 괜한 혼란만 가중시킬 수 있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방문하는 게 아니라 몰래 가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대신 케이트를 통해 세이비어 측에 말은 해놓았다.
또한 아르웬에게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시리스를 심어놓았기에 반드시 정보를 알려줘야한다.
[회색 사막으로 간다는 말이냐?]
"네. 루미너스 님께서 부탁하셨거든요."
마지막으로 저택에서 클라크 할아버지와 만남을 가졌다. 그는 혼자의 힘으로 회색 사막을 횡단했던 사람.
지금은 탐험대가 대부분 공략을 해놓았기에 위험한 건 없지만 경험자의 말을 듣는 것도 나쁘지 않다.
톡-
[아.]
"하하."
겸사겸사 바둑을 두는 건 잊지 않았다. 원래 바둑이 담소를 나누면서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놀이다.
클라크는 내가 허를 찌르자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머리카락도 없는 해골이신데 버릇인 모양이다.
[루미너스 님께서 그리 말씀하신 걸 보면 분명 누군가 만나라고 하셨겠구나. 아니니?]
"네. 맞아요. 싸가지 없는 사람이라고 하시던데요?"
[싸가지가 없다라······ 루미너스 님 입장에서는 그럴만도 하겠지.]
"만나신 적이 있으세요?"
클라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백돌을 조심스레 놓았다.
순간 저걸 왜 저기에 놓는 건가 의아했지만 그의 말이 먼저 귀에 들어왔다.
[만난 적은 있지. 좋은 경험도 나쁜 경험도 아니었단다. 말 그대로 경험이었지만 규모가 큰 경험이었지.]
"말씀드릴 수는 없으시죠?"
[이 할애비는 너와 달리 말재주가 없어서 말이다. 직접 만나는 편이 더 좋겠구나.]
자기 여행담을 술술 풀어놓았을 때는 언제고.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보는 게 훨씬 낫다고 판단하신 모양이다.
[손자야.]
"네?"
[너희 세상에서는 신의 존재가 불분명하다고 했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클라크 할아버지가 뜬금없이 전생에 대해 질문하셨다.
그 질문에 살짝 의문을 가졌으나 곧이어 백돌이 놓이는 걸 확인하고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네. 존재가 불분명한 신을 믿고 있죠. 다만 존재를 확인하지 못했을 뿐이지, 신이 존재한다는 건 확실해요."
이곳에서 환생하지 않았다면 나 또한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았겠지. 하지만 이제는 믿고 있다.
그렇다고 신실한 신자가 됐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냥 존재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면 마나와 마법은 어째서 사용하지 못한다는 게냐?]
"네?"
[신의 존재가 불분명하더라도 마나와 마법은 그대로 있어야 하지 않느냐?]
나는 클라크의 다음 질문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헷갈렸으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상하다.
신의 존재가 불분명하기에 신성력이 없는 건 괜찮다.
그러나 마나와 마법이 없는 건 생각할 여지가 많은 부분이다.
'마법은 원래 신들의 힘이라고 책에서도 나와 있었고······ 마나는 원래부터 있던 거였으니까.'
신화에 기록된 바로는 그렇다. 마법은 원래 신들이 사용하던 능력 중 하나다.
그 능력이 천사로 이어지고, 천사가 스스로 날개를 떼어내 엘프가 되면서 전수된 것이다.
여기서 마족은 상황이 약간 다른데, 외부적인 요인으로 강제적인 진화를 이룩한 거라 누구에게 전수받았는지 알 수 없다.
마족들 스스로도 태어나자마자 도구처럼 사용할 수 있다고 했으니 해답을 찾는 건 쉽지 않다.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마나나 마법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단 하나도 없는 게냐?]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신화에서는 신들뿐만 아니라 인간도 마법을 펼쳤다는 기록이 있으니까요."
신화에서 등장하는 인간 마법사 특징. 미치거나 대부분 정신이 온전치 않다.
다시 말하지만 영화를 비롯한 매체가 아닌 신화에서 등장하는 마법사다.
대게 지식을 탐하려다가 좋지 못한 꼴을 맞이하는 편이다.
"하지만 제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 마법은 눈속임에 불과해요. 어떤 신묘한 능력이 아니라 교묘한 속임수를 이용하는 거죠. 당연히 마나도 없고요."
[흠. 이해가 안 가는구나. 물론 마법이 없기에 과학이 그 정도로 발달할 수 있는 거겠지. 그래도 아예 존재조차 불확실한 건 의문이 들어.]
"저희가 신의 의도를 어찌 알겠습니까. 전 여기 놓겠습니다."
[이런 씹.]
내가 백돌의 공격을 완벽하게 차단해버리자 클라크가 머리를 감싸며 탄식했다.
아무리 진중한 대화를 한다지만 질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는 한동안 어디에 백돌을 놓을지 끙끙거리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돌을 던졌다.
패배를 인정한다는 표현. 나는 미소를 지으며 흑돌을 천천히 수거했다.
"한 판 더 두실래요? 출발 시간까지 아직 많이 남았거든요."
[됐다. 평생동안 몸만 쓰느라 손자한테는 안 되는구만.]
클라크는 투덜투덜거리며 테이블 위에 올려뒀던 시가를 입에 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한 박하향이 방 내부를 가득 채웠다.
아리엘이 있을 때는 어느 정도 눈치를 봐야했지만 이제는 그런 거 없다. 마음대로 피울 수 있다.
나는 달콤하기 그지 없는 세계수잎 시가의 향기를 맡다가 바둑판을 정리했다.
[후우······ 손자야.]
"네. 말씀하세요."
[가기 전에 너희 세상의 신은 어떤 분인지 한 번 말해줄 수 있느냐? 듣다보니 조금 궁금해서 말이지.]
"음······"
하루라도 손자와 같이 있고 싶은 걸까. 나는 클라크의 질문에 골똘히 생각했다.
지구의 신은 이 세상과 달리 골라서 설명할 수 있을만큼 많다. 애당초 지역마다 다채로운 신화가 존재한다.
대표적으로는 그리스·로마 신화, 북유럽 신화, 이집트 신화가 있다. 이 세 가지만 풀어서 설명해도 며칠은 걸릴 터.
마지막으로 현재는 기독교와 불교가 세상을 양분하는 중이다. 이러니 하나를 골라서 설명하기 난감하다.
"어떤 걸 원하세요? 이 세상의 신들처럼 인간적인 신들? 아니면 불분명한 신? 한 번 골라보세요."
[음? 그게 무슨 말이냐? 마치 신이 10명 이상 되는 것마냥 말하는구나.]
"세 자리수가 넘는데요?"
[··· ···]
내 말에 클라크가 눈을 깜빡거린다. 해골의 눈구멍 속의 황금색 빛이 반짝거린다는 뜻이다.
당장 인도의 신들만 해도 뭐 이리 많냐? 싶을 정도로 무식하게 많다.
이어서 그는 헛웃음을 흘리더니 치아 사이로 연기를 내뿜으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대체 뭐하는 세상인지······ 그래도 종교전쟁 같은 건 없겠구나.]
"발이 채일 정도로 많았어요. 성지 하나를 두고 100년 동안 전쟁을 한 곳도 있고."
십자군 전쟁이라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두고 지배권을 얻기 위해 박터지게 싸운 전쟁이다.
대신 거칠기 짝이 없는 전쟁이라기보다는 크고 작은 전투가 빈번하게 일어난 상황에 가깝다.
이 전쟁을 통해 기독교와 이슬람권이 믿는 신이 동일하다는 가설이 제기되기도 했고.
[어째서냐? 신이 그렇게나 많은데?]
"엄청 복잡하고 긴데 설명해드릴까요?"
[됐다. 머리 아픈 일은 바둑만으로 충분해. 후우.]
클라크는 다시 한 번 뿌연 연무를 내뿜으며 시원함을 표출했다.
하기야 신화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조차 고역인데 길고 긴 역사를 알려줄 시간도 없다.
"뭐, 아무튼 전 이만 가볼게요. 혹시 주의해야 될 건 없나요?"
[사막에 대한 조사는 다 했을 테니 이건 넘어가고, 충격에 대비하라는 말밖에 못하겠구나. 워낙 충격적인 진실들이 파묻혀 있으니까.]
시가를 뻐끔뻐끔거리는 걸 제외하면 진지한 조언이었다. 그것 참 해골이신데 맛있게 흡입하신다.
도대체 어떤 진실이 묻혀있길래 주의까지 하는 건지. 더욱 궁금해졌다.
"네. 귀담아들을게요."
[전에 말했듯이 신을 너무 맹신하지 마렴. 지금도 어떤 의도를 지닌 채 너를 그곳에 보내는지 전혀 알 수 없으니까.]
"신들이 세상을 멸망시켰다 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어요."
[콜록! 콜록!]
예상을 한참 벗어난 질문이었는지 클라크가 화들짝 놀라며 기침을 토했다.
이미 죽은 몸이니 사레가 들린 건 아닐 테니 정말 심하게 놀란 모양이다.
이어서 그는 한동안 속을 다스리는 듯하더니 약간 떨리는 듯한 목소리로 나에게 질문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니? 세상이 멸망했는데 무덤덤해?]
"네. 일단 신화이긴 해도 신들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건 너무 자주 일어난 일이라서요."
틈만 나면 대홍수를 일으켜서 세상을 멸망시키는 게 지구의 신들이다.
특히 북유럽 신화 같은 경우는 라그나로크를 막기 위해 개고생을 하다가 전부 헛짓거리가 됐고.
클라크는 내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가 작디 작은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성격파탄자만 있는 거니?]
너무나도 정확한 평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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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지않아 제논 님께서 이곳을 방문하실 겁니다."
회색 사막 원정대의 책임자, 데이모스가 정중한 말투로 소식을 전달했다.
그 소식을 전달 받은 게리오스의 마지막 왕, 모건 왕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게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알겠다. 좋은 소식 고맙구나. 난 또 뒤진 줄 알았지.]
왕좌 위에 위풍당당하게 앉아있는 건 그대로였지만, 현재 모건 왕의 두 손에는 '피와 강철'이 쥐어져 있다.
제논 일대기를 완독한 지는 오래였으며 최근에는 데이모스가 전달한 피와 강철을 열심히 읽는 중이다.
약간 빠지는 모양새였으나 데이모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능력은 자신조차 어쩌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그럼 조만간 제논 님을 데리고 이곳으로 오겠습니다."
[그대의 노력에 감사를 표하마. 이만 나가도록.]
빨리 가라는 듯이 손을 휘적거리는 모건 왕. 귀찮다는 기색을 대놓고 표현하고 있었다.
데이모스는 그런 모건 왕의 행동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후 알현실 밖으로 나섰다.
이윽고 데이모스가 알현실 밖으로 나서고, 알현실의 커다란 대문이 굳게 닫혔다.
그리하여 알현실에는 피와 강철을 조용히 정독 중인 모건 왕 혼자 남게 됐다.
[그래서······]
홀로 남게 된 모건 왕이 작게 중얼거리며 책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얼굴을 가렸던 책이 내려가려짐과 동시에 그의 표정이 드러났다.
[무슨 생각인 건지 물어봐도 되겠나?]
알현실에는 아무도 없다. 이건 확실하다.
그러나 모건 왕은 마치 누군가 있다는 듯이 대화를 하고 있었다.
팟!
그때 이변이 발생했다. 뻥 뚫린 천장에서부터 황금색 빛이 알현실 중앙에 꽂히는 것이 아닌가.
보기만 해도 눈이 멀 것 같은 밝기에도 모건 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계하는 눈초리에 가까웠다.
[난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줬을 뿐이다.]
놀랍게도 빛으로부터 어느 한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별로 호의적인 말투는 아니었다.
모건 왕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익히 알고 있다. 이에 콧방귀를 뀌며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답했다.
[전쟁의 신께서 짐의 부탁을 들어줬을 때가 언제였더라? 육신이 멀쩡했을 때면 몰라도 지금은 억제만 하고 있는데 말이지.]
[그 아이와 만나서 무엇을 얘기할지부터 고민하는 게 좋을 텐데.]
목소리 아니, 루미너스는 모건 왕이 비꼬든 말든 할 말만 전달했다. 둘 모두 서로를 향한 호의는 1도 없는 모습이다.
이에 모건 왕은 피식거렸다. 표정에는 자신감이 가득 담겨있었다.
[내 영혼에 제약이란 제약은 다 걸어놓고 말은 잘하는군. 입을 실로 꿰매놓고 비명을 지르라는 건가?]
[··· ···]
[뭐, 듣자하니 예언자라는데 난 잘 모르겠어. 대신 진실이 저 멀리까지 알려지니 막혔던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일세.]
모건 왕은 한 방 먹였다는 듯이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루미너스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나 충고하도록 하지.]
[충고?]
충고라는 단어에 모건 왕이 한 쪽 눈을 치켜떴다. 아무리 미운 놈이라지만 자그마치 신이다.
신은 결코 허투로 충고하지 않는다. 무려 미래를 읽으니 여기에 기반한 것일 터.
뒤이어 루미너스는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건 왕에게 '충고'를 건넸다.
[그 아이는 네 예상을 한참 웃돌 것이다. 네가 예상하는 모든 걸 부순다고 장담할 수 있지.]
과대평가 같으면서도 과대평가가 아닌 루미너스의 평가. 아이작이 들었다면 특유의 어벙한 표정을 지었을 법한 평가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건 왕은 허- 하며 감탄하더니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거 기대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