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구슬의 정체도 알았겠다, 나는 히르트에게 아리엘의 육아법에 대한 조언을 부탁했다.
히르트는 일반 아이와 다를 것 없이 사랑을 듬뿍 주면 된다고 했지만 그래도 영 불안하다.
머리 위의 새싹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인지, 반투명한 날개는 언제쯤 완전해지는지, 어른으로 성장하는지 등등.
속마음을 읽었을 때부터 알고 있던 거지만 아까 전 날개짓을 하며 날아갔을 때 다시 한 번 인지할 수 있었다.
아리엘은 여타 아이들과 다른 방식으로 키워야 된다는 것을. 속마음을 읽는다는 것만으로도 성장에 큰 영향을 줄 수도 있다.
"혹여 이 아이가 상처를 입을까봐 걱정하는 거니?"
"네. 지금은 웃어넘길 수 있지만 너무 일찍 성숙해질까봐 걱정이에요."
아이는 아이다워야 된다는 말이 있다. 철이 늦게 들면 그것대로 문제지만 너무 일찍 들면 그것대로 문제다.
특히 아리엘은 속마음을 읽을 수 있어서 그런 경향이 더 강하게 나타날 것이다.
눈치가 생길 수밖에 없다. 독심술은 무궁무진한 능력이나 본인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높다.
안 그래도 당장 지금도 말이 많은 상황인데 시간이 흐를수록 아리엘의 독심술은 주변에게 많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이 아이는 반밖에 되지 않지만 천사의 피가 흐르는 아이. 훗날 본인이 누구인지 명확히 자각한다면 금방 성장할 거란다."
"······무슨 말인지 갈피를 잡기 어렵네요."
"때가 되면 알 거란다. 전에도 느꼈을 테지만 초월자의 사고방식과 필멸자의 사고방식은 전혀 다르단다. 이해해주렴."
아무래도 아리엘 관련 분야는 필멸자인 내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필멸자인 내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걸 보면 확실하다. 결국 아리엘의 육아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전처럼 꾸준히 '사랑'을 강조하셨다. 아이가 멀쩡히 자라기 위해서 부모의 사랑이 필요한 건 당연한 수순.
반대로 말하자면 내가 그동안 아리엘에게 사랑을 주지 못 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돌려까는 거지.
실제로 바쁘다는 이유로 어머니에게 교육을 맡겨놓았으니 히르트가 지적할 건덕지는 충분했다.
"흐아아암······"
이제 슬슬 갈 시간이 다가오자 히르트의 머리 위에서 꿀잠을 청하던 아리엘이 깨어났다.
히르트는 그녀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후 나에게로 스윽- 내밀었다.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비몽사몽한 얼굴로 눈을 비비는 아리엘의 귀여운 모습.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안아들었다.
"우웅······ 아빠아······"
아리엘도 내가 안아주자 꼬물꼬물거리며 품에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다시 새근새근거리며 잠들었다.
나는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다가 히르트를 쳐다봤다. 그녀는 흐뭇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더 이상 그녀에게 물어볼 것도 없으니 떠나야겠지.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언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감사하기는 뭘. 우리가 너의 넓은 아량에 고마워해야지. 우리는 절대 너와 척을 질 생각이 없다는 점. 이걸 알아줬으면 좋겠구나."
"유념하도록 하겠습니다."
무려 주신급에 달하는 신에게 받은 확답이다. 남은 건 쌍둥이 남매신 간의 화해다.
그들도 나에게 죄책감을 갖고 있을 테니 사이가 원만해지는 건 어렵지 않을 터. 모라는 좀 어색하겠지만.
[그대의 미래에 축복이 있기를.]
모든 대화가 끝남과 동시에 히르트가 빛의 입자가 되어 사라졌다.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흩날리는 빛의 입자들.
나는 그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빛이 완전히 사라지자 고개를 돌렸다.
아르웬은 히르트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과 어벙한 얼굴이 정말 귀엽게 느껴졌다.
"······그대여?"
그러다 내 시선을 알아차린 것일까. 그녀가 눈을 깜빡이더니 나를 쳐다봤다.
나는 다양한 감정이 섞여있는 은회색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이제 갈까?"
신들과의 매듭은 거의 다 마무리지었지만, 아르웬과의 시간은 이제 막 시작이다.
그녀도 내 의중을 알아차렸는지 어안이 벙벙한 얼굴에서 미소를 띠었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미소.
"그래."
짧지만 많은 의미가 함축된 대답을 끝으로, 우리는 세계수를 등지며 걸음을 옮겼다.
"흠냐······"
내 품에 안긴 아리엘은 여전히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
히르트와의 만남 이후 알븐하임의 정치 기관이자 아르웬의 거처가 마련된 엘로디아로 돌아왔다.
참고로 당장 기숙사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사흘 정도는 여기서 머물 예정이다. 아르웬도 그동안 마음 고생한 게 있으니 모조리 풀어주기 위함이다.
게다가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아르웬의 수행원, 케이르도 여기에 포함돼 있다.
더불어 현재 진행 중인 회색 사막 원정에서 다양한 보고가 오가는 중이라 내부적으로 바쁘다. 나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아직 조사 중이라고 했었지?'
회색 사막, 정확히는 게리오스 왕국 조사는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게리오스 왕국은 동쪽 끝에서부터 시작해서 동쪽 전체를 집어삼켰던 강대국. 악마들에게 죄다 쓸려나갔으나 흔적 하나하나가 거대한 유산이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자면 작은 금화만 발견해도 평생의 부를 쌓을 수 있을 정도라고. 중간중간 도굴꾼도 숨어들었다는 소리도 있다.
"아이케르 씨뿐만 아니라 시리스 씨까지 회색 사막 원정에 포함시켰다고?"
"그래. 하지만 아이케르는 공식적인 반면 시리스는 비공식적인 인원이니라. 세이비어 교국은 믿을 수 없어서 말이지."
이외에 여러 놀랄만한 소식들을 아르웬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칩거한 줄 알았던 아이케르가 그녀의 명령을 듣고 원정대에 참석한 것.
시리스가 비밀리에 잠입하여 세이비어가 숨기려던 사실을 하나둘씩 얻고 있다는 사실까지.
강경파 마족을 죄다 숙청했던 세실리처럼, 아르웬은 한 나라의 수장이라는 걸 절감할 수 있었다.
이쯤 되니 내가 글을 쓰는 건지 똥을 싸는 건지 회의감이 든다. 남들이 열심히 사는데 정작 나는 징징거리기 바빴다.
피와 강철을 단순한 '취미'로 취급할 게 아닌, 마르크스가 집필하는 서적과 유사하다고 봐야된다.
"······많이 고생하는구나."
"여왕으로서 당연히 짊어져야 하는 의무이니라."
"의무라······"
나는 의무라는 단어를 듣고 작게 중얼거렸다. 여태까지 권리를 마땅히 취한 적도 없지만 의무도 짊어진 적이 없다.
그러나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어느 명언처럼, 더 이상 방관하지 않고 의무감을 가질 것이다.
대공황처럼 언젠가 터졌을 사건은 그렇다 쳐도 '조언'은 가급적 지양할 계획이다.
예를 들자면 스타비르크. 민족자결주의가 등장하는 순간 스타비르크의 독립 물결은 더욱 거세질 게 자명하다.
이후로 어떻게든 나와 접촉하기 위해 애를 쓰겠지. 드워프 삼인방, 가이스트가 목숨을 걸고 나를 찾아왔던 것처럼.
하지만 그때처럼 생각없이 조언을 주지는 않을 거다. 또한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는 순간 그 열기는 차갑게 식어버릴 것이다.
설령 스타비르크 관계자와 어찌 저찌 이야기하더라도 나 몰라라 뒷짐을 질 일은 없다.
물론 리나와 척을 진다는, 최악의 가정까지 염두해야 하기에 대화 자체를 거부할 거다.
"······아르웬."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느냐?"
"지금 다크 엘프와의 사이는 어때?"
그리고 또 하나. 스타비르크뿐만 아니라 엘프와 다크 엘프 간의 관계도 고려해야 된다.
이미 한 번 뿌려진 사상은 열기가 식을지언정 사라지지 않을 터. 스타비르크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는 순간 가라앉겠지만 다크 엘프는 이야기가 다르다.
엘프에서 다크 엘프가 떨어져 나온 이유는 모두 알다시피 종교 간의 내전, 그리고 사상적 충돌 때문이다.
만약 서로 어우러져 생활했다면 모르겠지만 엘프 특유의 꼰대스러움이 다크 엘프를 몰아냈다.
다크 엘프는 그런 엘프들을 혐오하며 상징이었던 귀를 잘라버렸다. 이후로 본인들만의 문화를 가꾸며 삶을 이어나갔고.
오랜 시간이 흐르고 종족 전쟁까지 발발하여 많은 게 변했으나 서로 간의 사이는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다.
"다크 엘프? 그대가 그건 왜 묻는 것이냐?"
"천천히 설명해줄게. 아무튼 사이는 지금 어때? 진전은 돼?"
"진전이라······"
아르웬은 내 질문을 듣고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그닥 좋지 않다는 뜻이다.
뒤이어 그녀는 다소 곤란하다는 투로 나에게 현황에 대해 알려줬다.
"제논 일대기 덕택에 엘프와 다크 엘프 간의 사이는 좁혀졌느니라. 그 이후로 조금씩 교류를 하는 중이고."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어?"
"우리 엘프도 종족 전쟁을 기준으로 신세대와 구세대가 갈린 듯이, 다크 엘프 쪽도 분파가 구분돼 있느니라. "
어디에서나 발생하는 세대 차이. 그 세대 차이는 엘프뿐만 아니라 다크 엘프 내에서도 많은 문제를 낳고 있는 모양이다.
아르웬은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잠깐 고민하더니 이윽고 착잡하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대도 알다시피 다크 엘프는 지금으로부터 3200년 전, 동족 간의 내전으로 추방당했지. 고향을 잊고 본인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기에 충분하니라."
"3200년······"
엘프는 1000년에 달하는 수명을 갖고 있다. 그러나 3200년은 엘프 기준으로도 3세대나 달하는 기한이다.
비록 길고 긴 수명 덕분에 사고방식이 고착화되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잊지 않았을 터.
그 사상이 꾸준히 이어진다면 모를까, 길어도 너무 긴 시간이다.
"신이 정해준 마음의 고향에 돌아가야 한다는 쪽. 그리고 본인들만의 문명을 이룩해야 된다는 쪽으로 나뉘어져 있지. 자칫하다가 내전까지 터질 수도 있는 사안이라 함부로 건드릴 수 없고. 여러모로 골치 아픈 상황이니라."
"··· ···"
"그대가 살던 세계에는 비슷한 일이 없었느냐?"
"비슷한 상황이 있긴 있지."
예를 들어 대만이라던가, 홍콩이라던가, 아니면 미국이라던가.
이런 건 민족자결주의가 아니라 외세의 강력한 압박으로 인해 또다른 민족성으로 진화한 경우다.
애당초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에서 흔히 퍼지던 사상이었지, 히틀러처럼 정복을 위해 사용하던 수단이 아니다.
더군다나 어마어마한 세월이 흘렀음에도 알븐하임을 마음의 고향이라 여기는 분파가 있을 정도면······ 내 기준으로 확답을 내리기 어렵다.
"미안하지만 이건 내가 어쩌지 못할 것 같아. 엘프와 인간 간의 사고방식은 다르니까. 대신 조언 정도는 해줄 수 있어."
"어떤 것이냐?"
"절대 압박하지 말 것. 이것 하나만 지키면 돼."
외세의 압박에는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싸우기 마련이다. 우크라이나가 그런 예로 작용하는 중이다.
비록 홍콩은 중국에게 무릎을 꿇었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내가 이곳으로 넘어오기 전에는 그렇게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미국. 미국은 정치적인 요소가 다수 포함돼 있지만 영국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국가를 설립했다.
"어떻게든 유화책으로 상대해야 돼. 이럴 때는 먼저 무력을 쓰는 쪽이 엄청 불리해지거든."
"음······ 무슨 말인지 알겠다. 시간은 충분하니 천천히 다듬기만 하면 되겠구나."
"그렇지."
"덕분에 머리가 말끔해지는 기분이구나. 정말 고마워."
아르웬은 나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줬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내 손을 붙잡기까지.
나 또한 그녀의 손을 잡아주면서 미소를 지어줬다. 여러모로 도움이 됐다니 나도 기쁘다.
"아참. 이럴 때가 아니지. 그대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 있다."
"선물?"
"그래. 아마 그대도 기뻐할 것이니라."
달짝지근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을 때쯤, 아르웬이 먼저 분위기를 깨드리며 입을 열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 확실히 저녁까지 시간은 많이 남아있다.
아리엘이 곤히 자고 있으나 중간에 깨기라도 한다면 낭패겠지. 지금은 인내할 시간이다.
솔직히 그 선물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저번처럼 자기자신을 선물이라 칭하지 않는 걸 보면 물질적인 게 확실하다.
"무슨 선물인지 궁금하네. 어디에 있어?"
"후후. 저게 보이느냐?"
내가 기대감을 담으며 묻자 아르웬이 흐뭇하게 웃으며 한 곳을 가르켰다. 나는 그 손짓에 따라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 따사로운 햇빛이 비추어지는 유리창만이 눈에 들어올 뿐.
그걸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그녀가 행동에 나섰다.
딱!
간단한 핑거 스냅.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청명하게 울펴퍼졌다.
그와 동시에 유리창 앞에서 무언가 신기루처럼 일렁이더니 곧이어 형상을 띄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마법으로 숨기고 있던 것 같다. 나는 기대감을 가지며 선물의 정체를 확인······
"······어?"
"책에서 나온 제복을 본따 제작했다. 엘로디아의 수선사들도 정말 멋진 옷이라 칭찬했지."
옆에서 아르웬이 뿌듯하게 설명하든 말든 나는 멍청해질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이 텅 비어지는 느낌이다.
전반적으로 어두운 계열이었으며 굵직굵직한 직선 디자인이 인상적이다. 칼 같이 잡혀있어서 딱딱한 이미지를 물씬 풍긴다.
그러나 그걸 배제하더라도 충분한 멋을 선사했다. 솔직히 말해 디자인 자체는 네이비 기사단의 제복보다 훨씬 멋지다.
당장 저 옷을 입고 나가면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겠지. 그만큼 멋이란 멋은 다 쏟아부은 듯한 외양.
물론 지구에서 저걸 입고 다녔다면, 특히 유럽에서 저걸 입고 돌아다녔다가는 집단 린치를 받겠지만 말이다.
집단 린치를 받고 난 후에는 개처럼 질질 끌려갔겠지. 손절 대상 0순위다.
"그대를 위한 맞춤 제작한 복장이니라. 세계수의 잎을 먹고 자란 누에의 실을 사용한 건 물론, 마법까지 부여해서 항상 적정 온도로 유지되고 있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할 것이니라."
그것 참 고마워. 원래 실용성 따위는 하나도 없던 탓에 소련에서 전부 얼어죽었는데.
설마 내가 저걸 입고 다녀야 된다는, 그런 끔찍한 소리는 아니겠지. 제발 아니기를 빌고 싶다.
"이외에 화살을 막을 수 있는 방어력까지. 그대가 좀 더 활동하기 편하도록 알븐하임 최고의 수선사들이 제작했느니라. 아! 그대가 원한다면 팔의 마크도 붙여줄 수 있다. 마크는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따로 제작하지 않았거든."
"······그래?"
"어떠냐? 정말 멋지지 않느냐?"
내가 이곳저곳 뿌렸던 씨앗은.
"하하······"
기어코 업보가 되어 나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진짜 나치 놈들이 제복을 멋있게 만들긴 했어.
문제는 내가 그걸 입고 돌아다녀야 된다는 거지. 이럴 줄 알았으면 삽화를 넣지 않는 건데.
괜히 보여주겠다고 나댔다가 엿을 먹어버렸다.
'그나마 하켄크로이츠 문양은 없어서 다행인데······'
철십자 훈장은 왜 달아놓은 거지. 나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상황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느님이 이걸 보셨다면 난 지옥으로 떨어졌을 거야.'
100% 장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