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3화 〉 주사위는 던져졌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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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트로부터 고해성사를 받고 나서 달라진 점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평소처럼 내 기숙사에 방문하여 대화나 기도를 하는 것밖에 없다.
그나마 달라진 건 바로 클라크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랄까. 사과는 했지만 광신에 휘말려 다짜고짜 공격했던 점이 걸렸던 모양이다.
물론 클라크는 그닥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다며, 케이트와 비슷한 사람을 만난 적이 많다며 너그럽게 용서했다.
다만 딱 한 가지. 케이트와 전투를 하면서 거슬렸던 부분이 있던 모양이다.
[걔는 장기전으로 돌입하는 순간 알아서 자멸할 게다.]
"예?"
[강하긴 강하다만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부분이 많더구나.]
침대에 누워 여유롭게 책을 읽고 있던 클라크가 말했다. 하루종일 낡고 헤진 갑옷만 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아버지의 옷을 잠시 빌렸다.
스켈레톤이다보니 모양새가 영 괴상했지만, 기골이 워낙 커서 그런지 다부지다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여기 책에도 잘 나와있잖느냐. 무기가 일종의 그릇이고 마나가 그릇 밖으로 빠져나오면 불꽃처럼 일렁인다고.]
클라크가 손가락으로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현재 그가 읽고 있는 건 제논 일대기 1권 후반부.
제논이 카이르로부터 죽도록 구르면서 다양한 이론을 주입받고 있을 때다. 참고로 카이르가 해주는 이론은 철저하게 고증을 따르고 있다.
그 고증을 누구한테 들었냐하면 당연하게도 아버지다. 내가 하나 하나 질문을 할 때마다 본인의 경험을 담아 천천히 알려주셨다.
당시에는 아버지가 얼마나 강했는지도 몰랐고, 붉은 사자라는 칭호를 갖고 있는 줄도 몰랐지만.
"네.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에요. 그것도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알려준 거죠?"
[그렇지. 다양한 실전을 치르고, 실력이 높아지면 자연스레 알게 되는 노하우 중 하나란다. 어렵긴 해도 어릴 때부터 천천히 다스리면 큰 잠재력을 지니게 되지.]
마나는 공기 중으로 빠르게 흩어지는 성질을 갖고 있어서 반드시 그릇 속에 담아야 된다. 그래야만 효율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기에 얼마나 많은 양의 마나를 담느냐에 따라 실력의 척도가 나뉘어진다.
다만 완전히 담기는 건 아니고 무기의 겉표면에 미세한 띠가 생기는 식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띠의 크기가 커지거나 농도가 짙어지면 강한 거라고 착각하는데, 아버지는 전혀 아니라고 당부하셨다.
'그거 때문에 욕을 좀 먹었는데.'
저 이론은 아까 말했다시피 제논 일대기 1권에서부터 언급된다. 제논 일대기는 5권의 사크란 희생부터 포텐이 터졌는지라 당시에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주목을 받게 된 이후부터는 말이 좀 많아졌다. 수많은 실전을 거친 사람만이 자연스레 깨닫는 부분이라 대부분 믿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잘못된 이론을 전파하는 거라며, 기사의 전력을 대폭 낮추기 위해서라는 음모론도 존재했다.
여론이 너무 안 좋아져서 아버지에게 여러번 물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전부 다 개소리라며 나를 안심시켜줬다.
사실 그때가 제일 처음으로 맞이한 위기였지 싶다. 다행히 마족에게 신경이 팔린 터라 얼마 지나지 않아 관심이 사그라들었다.
'발도술에 대해서 물었을 때도 재미있었고.'
만화에서 일종의 필살기로 취급되는 발도술. 그것에 대해서 아버지에게 물으니 정말 간단명료하게 답하셨다.
암살 및 기습의 용도로 쓰이거나, 이상한 거에 물든 병신이거나.
전자의 경우는 수많은 실력자들이 당했던 기술이라 위협적이라 설명하셨고, 후자는 할 말은 많지만 굳이 안 하겠다며 넘어갔다.
나중에 데이브와 니콜에게 질문하니 전투 중에 검을 넣는 건 미친짓이라고.
심지어 뻔히 보이는 수에 대놓고 당하는 사람이 더 병신이다라는 직설까지 날렸다.
아버지께서는 무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는 내가 그런 질문을 하니 기가 차셨겠지. 솔직히 조금 쪽팔리긴 했다.
하지만 위력 자체만 따지자면 절륜을 넘어서 필살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고 설명했다.
[그 애는 신성력이 얼마나 많으면 화염처럼 일렁이더구나. 아직 세공되지 않은 보석을 보는 것 같았지.]
"가르쳐주시려고요?"
[귀찮다. 대신 아들내미한테 말은 해야지.]
아주 자연스럽게 짬을 때려버리시네. 나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그래도 되냐는 식으로 물었다.
"아버지가 투덜거리지 않을까요?"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한테 일까지 시킬 셈이냐? 게다가 이제는 재가 되고 승천할 몸인데 이정도 여유는 있어야지.]
저렇게 말씀하시니 할 말이 없어진다. 다른 게 아니라 클라크는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자격이 된다.
그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이 세상은 진작에 악마 숭배자의 손아귀에 떨어졌을 테니까.
어쩌면 제논 일대기에 나온 내용이 그대로 펼쳐졌지 않았을까. 칠죄종과 비슷한 최고 간부까지 있었으니 불가능한 건 아니다.
'일종의 분기점이 되는 분이지.'
나는 침대에 누워서 제논 일대기를 읽는 클라크를 바라보다가 다시 앞쪽을 바라봤다.
이제야 1권을 읽는 클라크와 달리, 현재 나는 제논 일대기 29권을 집필하는 중이다.
릴리를 살리기 위해 디아볼스의 영혼을 찾으러 떠난 진과, 그 진의 뒤를 뒤늦게나마 추적하는 제논.
메리는 릴리를 간호하고 있는 탓에 따라나서지 않았다.
'뒤를 하나 하나 추적하면서 달라진 상황도 보여줘야겠지.'
작품 내적으로 진이 여정을 떠난 시간이 어언 반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소식 하나 없어서 제논이 뒤를 따라간 것이다.
가장 먼저 제논이 찾아간 곳은 멸망당했던 엘프의 나라, 엘븐하임. 모든 종족을 통틀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나 종족이 종족인지라 복구는 빨랐다.
더군다나 다크 엘프까지 합세한 덕분에 예전의 위상을 되찾는 건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엘프 여왕, 엘리샤가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
지도자를 새로 꾸리자니 누가 선출될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방치하자니 엘프와 다크 엘프 간의 갈등을 중재할만한 사람이 필요하다.
그 모든 걸 부합하는 사람이 엘리샤이나 현재 그녀는 실의에 빠져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
'에필로그에서 카이르가 다시 환생하지만 아직 먼 이야기고······'
제논도 아버지나 다름없던 카이르를 그리워하면서도 진의 뒤를 꾸준히 밟았다. 그리하여 엘븐하임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마족의 나라, 판데움.
2차 악마 전쟁 이후로 마족에 대한 인식이 180도 달라지고, 판데움의 분위기도 전보다 훨씬 밝아진 상황이다.
이건 현실의 헬리움을 참고하면 될 테니 묘사하는데 큰 걸림돌이는 없다. 단지 진이 어디로 갔는지가 중요하지.
여기서 진의 행방에 대한 단서가 나타나는데, 지상에 흩어진 디아볼스의 영혼을 추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진은 단지 릴리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무작정 여정에 나선 걸로 알려져 있다. 제논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속도를 더 올리게 됐다.
그리하여 전세계를 방방곡곡 돌아다니면서 천천히 단서를 모은 결과, 진이 어디로 향했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그곳은······
"할아버지."
[응? 왜 부르느냐?]
"게리오스 왕국이 있던 자리는 현재 사막이 됐죠?"
[그래. 생명이 전혀 싹트지 않는 죽음의 대지가 되었지.]
악마 전쟁이 최초로 발발되었던 곳, 게리오스 왕국이자 현재는 사막이 된 장소다.
여느 사막 지대와 달리 하늘이 온통 회색 구름으로 가려져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곳,
악마 전쟁으로 인해 게리오스 왕국이 가장 먼저 멸망했다는 건 역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악마가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존재가 아닌, 인간이었다는 건 전혀 모르고 있다.
원래라면 단순히 악마 전쟁 최초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진이 찾아간 거지만 여기에 개연성을 추가할 생각이다.
'여기서부터는 진의 뒤를 밟는 거야. 숨겨진 지하 유적부터 시작하여 악마에 대한 진실까지 찾고.'
아마 이 사실이 밝혀지면 세상이 또다시 뒤집어질 거다. 하지만 이건 내 상상력에서 나온 게 아니라 클라크로부터 전달받은 '고증'이다.
문득 정체를 밝혔을 때 내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이 모든 건 내 머릿속에서 나온 상상이라고.
이제는 그것마저 거짓부렁으로 되지 않을까. 앞으로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에 이를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상관없다. 이미 타락한 추기경 사태라는 예방 접종까지 맞았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도 게리오스 왕국이 있던 장소에 간 적이 있나요?"
[있지. 너도 가려고?]
생전의 버릇인지 클라크가 손에 침을 바르는 시늉을 하면서 자연스레 페이지를 넘겼다.
본인이 스켈레톤이라는 사실을 전혀 자각하지 못한 행동이라 뭔가 미묘하다.
"아뇨. 전 오래 살고 싶어서요. 거기에는 미라를 포함해 온갖 몬스터들이 득실거리잖아요."
[그렇지. 단순한 스켈레톤이 아니라 악마니까 더 강하고.]
게리오스 왕국이 자리잡았던 사막에는 다른 곳보다 몇 배는 강한 몬스터가 등장한다.
스켈레톤이 마법을 부린다면 믿겠는가? 그 사막에서 자연발생하는 스켈레톤은 가능하다.
이뿐만이 아니라 거대한 샌드웜을 포함하여 사막 전갈까지. 사람이 멀쩡히 살아나갈 수 있는 곳이 못 된다.
수많은 학자들은 그곳이 악마들이 제일 먼저 나타났던 곳이라서 몬스터도 강한 거라고 추측하고 있지만, 클라크의 설명을 들어보니 다른 이유가 더 있을 것 같다.
"거기에도 소환진이 있었어요?"
[글쎄다. 지금은 구조물 대부분이 풍화되서 알아보는 것조차 힘들더구나. 그래도 소환 의식을 통해 악마 전쟁이 발발했으니 있었을 가능성이 높겠지.]
"알겠습니다."
[혹시 내가 한 말을 전부 책에 넣는 게냐?]
연이은 질문에 클라크가 의아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이에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가 했던 말을 수첩에다가 기록했다.
"네. 대신 완전히 똑같진 않을 거예요. 어디까지나 가상의 이야기니까요."
[가상의 이야기치고는 예언에 버금가는 수준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전부 우연이라니까요. 몇몇 부분은 빼고. 아, 지금 넣는 것도 포함시켜야겠네요."
[뭐, 네가 우연이라 하니까 꼬치꼬치 캐묻진 않으마. 신도 간섭하지 않는 걸 보면 암묵적으로 허가하는 것 같으니.]
클라크의 말마따나 내가 여러 진실을 알았음에도 신들은 따로 간섭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에게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있었다면 케이트를 불러서 나를 데려와달라고 지시했겠지.
게다가 제논 일대기 이후에 집필할 2차 세계 대전은 극단적인 사상들이 포함돼 있다.
이런데도 간섭하지 않는 걸 보면 신들도 실보다는 득이 많을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러고보니 할아버지는 어디 가고 싶은 곳은 없으세요?"
[이 모습으로 어딜 간다는 게냐?]
"그렇긴 해도 평소 가고 싶었던 곳은 있었을 거 아니에요."
[딱히 없다. 살아있을 때 안 가본 곳이 없었거든. 아, 혹시 바다에 간 적은 있느냐?]
전생에서 간 적은 있죠. 나는 말을 하다가 말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환생하고나서 바다는커녕 아카데미 입학 전까지 수도에 간 적도 없었다. 그만큼 은둔형 외톨이로 살았으며 영주민들이 그나마 안면이 있었다.
게다가 마이샬 영지에서 바다까지의 거리가 매우 멀다. 애당초 우리 아버지도 간 적이 없다.
"당연히 없죠. 갈 일이 없는데."
[그러냐? 그럼 안 가는 게 좋을 게다. 설령 갈 일이 있어도 바다에 깊이 들어가지는 말고.]
"왜요?"
클라크는 내 물음에 페이지를 무심하게 넘기다가 책을 완전히 덮으며 옆에 내려놓았다. 보아하니 1권을 전부 다 읽은 모양이다.
뒤이어 제논 일대기 2권을 집고는 특유의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집안 체질이 그렇단다. 조금만 깊은 곳에 들어가면 몸에 힘이 쫙 빠지거든. 강이나 호수는 괜찮은데 유독 바다만 그래.]
"······무슨 저주라도 받은 거예요?"
[글쎄다. 나도 이건 잘 모르겠구나.]
악마의 열매라도 먹은 거야, 뭐야. 완전한 맥주병도 아니고 바다만 한정된 거라니.
마리와의 신혼 여행을 바다로 갈까 생각했지만 클라크의 말을 듣고 나니 잠깐 고민된다.
하물며 나는 히르트로부터 순수한 축복까지 받은 몸. 체질 같은 건 기꺼이 해결할 수 있겠지.
"알겠어요. 새겨들을게요."
[그래. 그나저나 담배는 언제쯤 구해줄 게냐? 책 같은 건 담배를 물면서 보는 게 최고인데.]
"아리엘 머리 위에 난 새싹을 말린 게 있는데 그거라도 사용할까요?"
[그건 좀······ 아무리 그래도 증손녀를 사용하는 건 좀 아니지 않느냐.]
나는 클라크와 대화하는 것도 잠시, 곧바로 29권의 끝을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집필 모드로 들어갔다.
이윽고 모든 독자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할 결말이 마무리되고······
"이제 리나를 불러야지."
잠깐 몸을 피신할 장소부터 만들기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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