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401화 (402/763)

〈 401화 〉 이야기(3)

* * *

아리엘을 잠시 재우고 온 후에도 클라크가 해주는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마치 회포를 풀겠다는 듯이 과거에 대해서 술술 밝혔다.

자기 말로는 낭인으로 살아온 지 30년이 넘었다고. 제대로 된 정착조차 10년을 겨우 넘길 정도이니 꽤 오랜 세월동안 방랑한 셈이다.

그리고 그중의 대부분이 가문의 의지를 이어받아 악마 숭배자의 뒤를 추적한 것이다.

"할아버지께서는 비밀 조직 같은 곳에 소속돼 있었어요? 아까 단체라고 했잖아요."

[반은 맞고, 반은 아니라고 해야겠지. 단체라기보다는 점조직처럼 흩어져 있다가 특정 때에 뭉치는 식이었어. 물론 그 망할 추기경 때문에 전부 틀어졌지.]

"그럼 그 조직은 언제부터 만들어진 건가요? 이름은 또 뭔지 궁금하네요."

[이름은 없고, 제대로 만들어지지도 않았단다. 어딘가에 아지트를 만들면 며칠 내에 쳐들어와서 방랑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거든.]

나는 클라크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게 가장 안전하고 어쩔 수 없는 것이, 악마 숭배자는 역사마저 뒤틀어버릴 만큼 세력이 막강하다.

음지를 손에 꽉 쥐고 있을 뿐더러 귀족과도 연결 고리가 있으니 조직을 만드는 건 위험하겠지.

여기에 클라크가 덧붙이기를, 뜻이 맞는 사람조차 거의 없어서 사실상 혼자 추적했다고 한다.

이건 클라크부터 그런 게 아니라 대대로 이어져 온 방랑 생활이라고. 이 말에 아버지가 의문을 가지셨다.

"그런데 난 아버지는 봤어도 할아버지는 보지 못 했소만. 내가 태어나기 전에 죽기라도 했소?"

[응? 아니. 나도 그 양반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고 있다만?]

"··· ···"

[장난이고 내가 친히 장례까지 치러줬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다만 놈들이 주술로 부활시킬 수 있어서 화장을 했지. 너도 나중에 나를 화장시켜주면 돼.]

가끔 가다 장난인지 아니면 진실인지 모를 말을 하신다. 클라크가 장난칠 때마다 아버지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바뀌는 모습은 꽤 볼만했다.

약간 철이 없다고 느껴질지도 모르겠다만 본인의 성격 자체가 유쾌한 것도 있고 결정적으로 나이가 50대다.

정확히는 향년이라 칭해야 맞겠지. 혼령 상태로 아버지의 곁을 보호했으나 그 기억마저 온전치 않다고 본인이 언급했다.

"······그럼 언제쯤 가실 거요? 가능하면 좀 오랫동안 있었으면 좋겠소만."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었다가 복잡한 심리가 담겨있는 목소리로 클라크에게 물었다.

말은 저렇게 했다만 클라크가 현세에 좀 더 오래 남기를 바라는 게 확실하다.

평소 풀지 못했던 부자 간의 오해 및 회포도 풀어야 되고, 결정적으로 클라크는 의무만 짊어지는 삶을 살아왔다.

조금이라도 자유의 맛을 느끼게 해줘야 되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리 생각하고 있다.

[뭐.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며느리도 한 번 만나고, 아직 만나지 못한 손주들도 만나야지. 데이브와 니콜은 너를 따라 기사가 됐잖느냐?]

"그렇소만."

[만나서 대련이나 한 판 하자고 해야지. 적어도 재롱 한 번 부리는 건 보고 가야지 않겠느냐?]

그 재롱이 정말 재롱이 될까 모르겠다. 데이브와 니콜은 아카데미 무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을 정도로 강한 사람들이니.

물론 악마 숭배자 군주들을 혼자서 격파한 클라크에 비해서는 부족한 점이 많을 것이다.

[이참에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오랜만에 한 번 붙어보는 게 어떠냐?]

"됐소. 내 나이가 몇인데 노인네 배려는 해야지. 게다가 뼈밖에 없는데 힘은 제대로 낼 수나 있겠소?"

[허허허. 이 아들 놈이 아비한테 하는 말꼬라지 하고는. 옛날이랑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누구 덕분에 험하게 살아서 말이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사이는 그렇게 나빠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흘렀음에도 형제처럼 지내는 부자 관계에 가깝다.

지난번에 아버지가 클라크는 좋은 아버지가 못 됐다고 언급했지만, 역할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을 뿐이지 인간적으로는 좋게 봤을 것이다.

지금처럼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 걸 보면 그들의 친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바다.

적어도 정착하고 있는 당시에는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겠지. 악마 숭배자가 쳐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나저나 신기하구나. 네 밑에서 얘처럼 문학적인 애가 태어났다니.]

클라크가 나에게 턱짓하며 신기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와 동시에 아버지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시선이 나에게 옮겨졌다.

나는 그 시선들을 받으며 괜스레 머쓱해져 머리를 긁적였다. 하긴 클라크의 눈에도 나라는 존재는 퍽 신기할 것이다.

무를 중시하는 가문에서 태어난 소설 작가. 그것도 세계를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는데다가 예언자로 추앙받고 있다.

어머니가 소싯적에 글을 우아하게 잘 쓰셨다지만 그걸로는 영 부족할 것이다.

"나도 좀 신기하오. 어릴 때부터 무기보다는 책을 더 가까이 두었으니. 지금처럼 몸이 튼튼하지도 않았고."

[어쩌면 나를 닮았을지도 모르겠구나. 너는 모르겠지만 나도 옛날에 글을 좀 쓴 적이 있다.]

"양심 없는 건 여전하시군. 일기장만 썼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소?"

[어쭈? 그럼 너는 글을 쓴 적이 있냐? 보고서를 개판으로 써서 상관한테 개털렸던 것도 알려줘?]

"그게 갑자기 왜 튀어나오는 거요?"

또, 또 싸우신다. 나이는 나이대로 먹으신 분들끼리 싸우니 쓴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는 내가 나서야겠지. 나는 그들이 투닥거리는 도중에 조용히 끼어들었다.

"이제 그만하세요. 다른 사람도 있는데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이 양반이 먼저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했잖느냐."

[난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다. 안 믿는 건 아들 놈이지.]

"됐고, 저는 그냥 책을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작문도 제가 알아서 터득한 거고요."

[그럼 줄거리는? 그건 어떻게 생각난 게냐?]

"그건 넘어가죠."

마음 같아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클라크 할아버지께서 군주들을 전부 도륙내시고, 소환 의식이 실패로 끝났으나 그 반동으로 내가 소환됐다고.

아직 그 사실까지 모르는 것 같았지만 머지않아 알려줄 생각이다.

과연 그는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 허탈하다는 듯이 허허 웃을까, 아니면 색다른 반응을 드러낼까.

뭐든 간에 기대가 된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위기를 슬기롭게 넘기고는 다른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할아버지. 할아버지께서도 무술을 아버지, 그러니까 저에게 있어서 증조부에게 배운 건가요?"

[일단은 그렇지. 다만 이것이 언제부터 이어져 온 건지 확실치 않단다. 우리의 선조는 다양한 무기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었거든. 도끼뿐만 아니라 검, 방패, 활, 창, 둔기 등등. 수많은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었지.]

"하나만 파도 모자를 텐데······"

[당시는 전쟁이 판을 친 데다가 모건 왕이 정복 군주였으니까. 무기가 손상을 입으면 즉시 다른 무기를 사용해야 되니 당연한 거겠지.]

하긴 그때 인간은 마법은커녕 마나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 했을 것이다. 전생의 중세 시대와 비슷한 양상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물며 대부분 백병전으로 싸웠을 테니 뭘 쓰던 간에 재앙이었을 것이다. 수인 못지 않은 근육질 거한이 달려오기만 해도 공포스럽겠지.

그렇다면 어떤 과정을 통해 도끼를 주무기로 사용하게 된 것일까. 이 과정 속에 비밀이라도 있는 걸까.

"언제부터 도끼를 사용한 건지 모르는 거죠?"

[그렇긴 하다만 300년 전부터 이어져 온 건 확실하단다. 수인왕 히크에게 무술을 가르쳐줬다고 했으니까.]

"아. 그렇군······ 예?"

내가 잘못 들었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가려다 말고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비슷한 반응이다. 마리와 아델리아는 눈을 휘둥그레 떴고, 아버지는 한 쪽 눈을 치켜떴다.

마리와 아델리아와 다르게 아버지는 썩 믿지 못한다는 반응이셨으나 제대로 들은 건 확실하다.

그런 모습들에 클라크는 응? 하더니 도리어 본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꺼냈다.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냐?]

"아니······ 방금 히크라고 하셨나요? 애니머즈를 건국한 최초의 수인왕이요?"

[그래. 맞다.]

"우리 가문의 사람이 그 사람에게 무술을 가르쳐줬다고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야기다. 물론 히크가 다른 수인과 달리 무술을 사용했다는 것과, 무기가 도끼라는 건 짤막하게 언급된다.

짤막하게 언급되는 것치고는 꽤 중요한 기록인데, 왜냐하면 당시 수인에게 있어서 '기술'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종족 전쟁 당시 기술력으로 떡칠한 인간에게 학살 수준으로 당하거나 노예로 전락당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 난세 속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수인이 바로 히크다. 문명을 세우기 위해서는 기초적인 기술이 필요하며, 그것이 개개인의 능력에서부터 나온다고 믿었던 영웅.

수인의 전통 중 하나인 홀름강으로 세력을 조금씩 결합시키고, 종래에는 애니머즈라는 문명을 새로이 신설했다.

[뭐야. 너 책 많이 읽었다 하지 않았니? 우리가 가르쳐줬다는 건 그렇다 쳐도 인간에게 기술을 배웠다는 건 알지 않느냐.]

"애초에 히크가 인간에게 기술을 배웠다는 문장 자체가 없는 걸요. 그걸 감안하더라도 충격적인 건 똑같고요."

[그러냐? 난 몇 줄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구나.]

"대체 누구한테 들은 거예요?"

[아버지에게 들······ 었지. 아마도?]

기억이 가물가물한지 두개골을 긁적거리며 갸웃하는 클라크다. 거대한 폭탄을 떨어뜨려 놓고서는 저 반응이니 오히려 기운이 빠진다.

[어쨌거나 히크가 노예로 붙잡혀 있을 때 우리 가문이 도와줬다고 했단다. 그 후로 무술만 가르쳐주고는 쌩­ 하고 제 갈 길을 갔지.]

"······히크가 노예였다고요?"

[허, 참. 이것도 몰랐어? 너무 치욕적인 과거라 공식적으로 기록하지 않은건가?]

"아니면 조상께서 자기랑 만났던 걸 말하지 말라고 했을 수도 있고요. 빨간머리는 모조리 죽였다면서요."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연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악마 숭배자한테는 거슬렸겠지. 어쩌면 개인 일지에 기록돼 있을 수도 있겠구나.]

과연 개인 일지가 온전히 보관돼 있을지는 모르겠다. 당시 제지술은 지금보다 한참 뒤떨어져 보관조차 어려우니까.

무엇보다 히크가 노예였다는 점이 조금 충격적이다. 이 사실을 레오나가 듣는다면 큰 충격으로 다가오겠지.

피가 반밖에 섞여있지 않은 그녀지만 종족을 향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니.

"그런데 히크가 노예였다는 건 확실해요?"

[아니면 만날 이유가 없지 않느냐. 우리 집안이 하는 일 중 대부분이 노예들을 풀어주는 건데. 노예들 중에는 제물로 바쳐질 사람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긴 하다만······ 조금 놀랍네요. 쉽사리 믿기가 어려워요."

[믿든 말든 너한테는 좋은 소재가 늘어났으니 괜찮지 않느냐?]

어떻게 아셨지. 나는 클라크의 말을 듣고 살짝 움찔거렸다.

노예였다는 사실을 숨긴 채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는 클리셰는 전생에서도 흔하다. 중간에 자아성찰을 한다면 캐릭터에 대한 몰입도가 상승하는 건 덤.

그리고 최후의 순간에 자신이 노예였다고 밝히거나, 아니면 증표로 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이건 건국왕과 관련이 있으니 조심히 다뤄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러렴. 그러고보니 레오나라고 했던가? 그 아이에게 한 번 부탁해보는 게 어떠느냐? 너라면 기꺼이 받아주겠지.]

"한 번 생각해볼게요. 당장 필요한 건 아니니."

이후로도 클라크는 그간 하지 못했던 말들을 모두 풀겠다는 듯, 수많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개중에는 내가 관심 있어 하는 분야가 있었으며, 약간 고리타분한 것도 있었다.

그래도 클라크의 입담이 꽤 수준급이어서 지루하지는 않았다. 인생 자체가 의무로만 채워져 있었다만 전혀 암울하지 않았다.

본인부터 지긋지긋한 의무를 떼어내기 위해 발악한데다가 실제로 이행했으니까. 그럼에도 유쾌함을 잃지 않다니 정신적으로 매우 강한 분이시다.

"할아버님께서는 당시 마족을 어떻게 생각하셨어요?"

[솔직히 별 생각 없었지. 악마 숭배자에만 집중하고 있었는데 종족을 가릴 게 있느냐? 무엇보다 그때 마족들은 바깥으로 나오는 경우가 잘 없었단다. 가끔 몇 번 만나긴 했지만 전부 좋은 사람들이었지.]

"그만한 힘을 가지셨는데 어째서 세상에 진실을 알리려 하지 않았죠?"

[개인의 힘이 아무리 강해도 집단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법이란다, 아가. 손자의 책처럼 집단 자체를 물들게 하는 방법 외에는 알릴 방법이 없었지.]

경험도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많아 현자에 버금가는 조언도 해주셨다.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다만 시간이 흐르고 식사 시간이 되자 잠깐 흩어졌다. 클라크는 식사를 할 필요가 없었고, 아버지는 그와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다며 잠깐 연무장으로 이동했다.

잠시 후 그 연무장에서 진동이 울리고 굉음이 울려퍼졌지만. 잠깐 들어가는 순간 후폭풍을 맞이할 게 뻔해서 그대로 놔뒀다.

그렇게 아델리아와 마리가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나는 방안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굳이 마리가 식사를 준비할 필요는 없었으나 그냥 갔다.

마지막으로 나는······

"저······ 아이작 님."

"네. 말씀하세요."

"······죄송합니다."

"예?"

아리엘이 곤히 잠든 방안에서,케이트로부터 사과를 받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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