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394화 (395/763)

〈 394화 〉 클라크(2)

* * *

케이트가 지하 사원으로 떠나고, 나는 다음 권과 외전으로 쓸 내용을 천천히 정리했다.

다음 권은 전쟁이 끝난 후의 사후 처리, 점점 악화되는 릴리의 상태, 어떻게든 치료하기 위해 애를 쓰는 진과 동료들의 이야기다.

대악마 디아볼스는 최후의 발악으로 릴리에게 쐐기를 박고 그릇이 파괴되었으며, 그 쐐기는 하필이면 또 심장에 박힌 탓에 신들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여기서 해결하기 어려울 뿐이지 해결 자체는 가능하다. 문제는 그 중간 과정에서 릴리의 죽음이 필연적으로 포함돼 있다는 것.

그릇은 이미 오염되어 답이 없는 상황이니 영혼만 빼내어 보관한 후, 새로 태어날 아이에게 영혼을 전달하는 것이다.

허나 기억은 모두 사라지게 된다는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한다. 때문에 어떻게든 살리자는 쪽으로 노선을 잡았지만 이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우선 릴리를 이대로 방치하면 몸 전체가 오염되어 악마가 된다. 마족의 탄생이 이런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데다가 세계수조차 버티지 못한 타락이다.

무엇보다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있다고 한들,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다스리는 것이 옳은가?

영혼이 똑같다고 해서 기억이 모조리 사라지면, 그걸 과연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현실적으로도, 그리고 철학적으로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사항이라 진을 포함한 동료들도 깊은 번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릴리를 살리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그녀를 죽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릴리가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 싸웠건만 최후에는 동료를 죽여야 되는 상황인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런 비극적인 현실에 주인공 일행은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제논은 반쯤 포기한 반면, 진은 어떻게든 살려야 된다고 목소리를 높혔다.

마땅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 상황 속에서 하염없이 시간만 흐르고, 진은 잠도 자지 않고 쓰러져 있는 릴리의 곁을 지킨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릴리의 몸은 심장부터 시작해 서서히 검은색으로 물들고, 보다 못한 진은 큰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것이 또다른 비극의 서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타락만 없었다면 기억을 보존할 수 있었겠지만.'

여기서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당장 나만 해도 전생의 기억을 유지할 수 있는데 어째서 릴리는 안 되는 거냐고.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정화를 할 필요가 없었고 릴리는 타락이 진행 중이라 정화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정화는 그 영혼을 아무런 티끌도 남지 않도록 깨끗하게 만드는 행위. 다시 말해 백지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물론 내가 이곳으로 넘어오게 된 것도 엄연히 사고여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전에 루미너스가 알려주길, 지구의 신들이 거세게 항의를 했다고. 지구의 순리가 완전히 망가져서 고생하는 중이라고.

솔직히 이 세상 신들 입장에서는 많이 억울할 것이다. 자기들이 아니라 악마 숭배자가 대형 사고를 터뜨린 건데 욕만 주구장창 얻어먹었으니.

그렇다 해서 클라크가 소환 의식을 비틀지 않았더라면 악마 전쟁이 발발했을 테니 여러모로 억울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완결까지 스토리는 전부 정립했고, 남은 건······'

보험용 외전과, 최근에 떠올린 외전. 이 두 가지다. 보험용 외전은 말 그대로 정사가 아닌 IF에 가까우니 천천히 생각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최근에 떠올린 외전 즉, 클라크를 모티브로 삼은 건 구상할 게 꽤 많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주인공과 시간 설정.

주인공의 최후는 미리 구상했다. 어떻게든 희망을 남기기 위해 애를 쓰는 주인공과, 반대로 모든 희망을 잃고 세상이 망하길 원하는 칠죄종과의 대립.

여기서 곤란한 건 칠죄종 중 누구와 만나냐는 것이다. 일단 후보진은 분노와 질투다.

이 둘은 소중한 것들을 한순간에 잃고 세상이 파멸되기를 원하는 자들. 반대로 주인공은 한 줌의 희망을 어떻게든 남기기 위해 발악하는 자다.

'차라리 둘 다 등장시킬까?'

그것도 나쁘진 않다. 승리를 점하지 못하겠다만 외전 주인공의 강함을 어필하기에도 충분하고.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클라크는 악마 숭배자의 최고 간부들을 홀로 처치했다는 점. 여러모로 소설보다 더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지하 사원이 악마 숭배자들에게도 중요한만큼 전력을 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의 무력을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일단 전체적인 구도도 잡아겠다, 나는 모티브가 될 클라크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져서 아버지를 찾아갔다.

스쳐간 영웅, 그것도 영웅의 의무를 포기한 분인 건 알겠다만 그걸 제외하고 사람 자체에 대해 궁금해졌다.

"지독한 골초셨지."

그리고 아버지는 담담하게 대답하셨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아한 목소리로 다시 질문했다.

"골초셨다고요?"

"그래. 세상이 멸망해도 담배는 한 대 피우고 가실 분이다."

내가 질문을 하자마자 저 대답을 하는 걸 보면 정말 어지간히도 골초셨던 모양이다.

그러나 꿈에서는 평온하게 눈을 감고 신의 품으로 가셨다. 어느 영화의 클리셰처럼 담배 한 대를 맛있게 빨지는 않았다.

'그때 담배가 없으셨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으나 금방 접었다. 아무튼 이 세상의 담배는 기호품으로 사용되기도 하나 치료제로도 쓰인다.

단, 치료용 담배는 대마초처럼 신전의 관리를 받아야 하며 그 이상은 마약이나 다름없어서 처벌을 받는다.

실제로 어느 한 신전이 마약성 담배를 유통하다가 적발된 적이 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발생한 사건이며 꽤 난리가 났던 걸로 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냐면 신전은 살인, 강간 등과 같이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범죄만 불허하기 때문이다.

위의 범죄들은 신이 직접 단죄를 하는 편이나 그외의 범죄는 인류가 만든 것. 그래서 신들도 눈 감아 주는 편이다.

"기사로 활동하고 계실 때도 흡연을 하지 않았다고 하셨죠?"

"그래. 보급품은 전부 부하들에게 줬지."

담배는 동서고금 막론하고 군대에게 아주 중요한 기호품이다. 실제로 보급품 중에 담배가 있을 정도니 말다했지.

또한 이 세상에서 담배가 널리 퍼지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종족 전쟁과 그 이후에 발생한 냉전 때문이다.

극한의 상황에서 담배와 술만큼 심신을 안정시키는 기호품은 또 없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어쨌거나 현재로 다시 돌아와, 담배는 남녀와 계급, 마지막으로 종족을 막론하고 사랑받는 기호품이다.

심지어 그 엘프마저 애연가가 존재하며 세계수의 잎을 말려 제작한 담배마저 존재한다.

이건 치료용으로 쓰이기에 알븐하임의 주 수출품 중 하나라고 들은 적이 있다. 대신 중독성이 어마어마하다고.

다만 시대가 시대다 보니 간편하게 필 수 있는 궐련은 없다. 오직 시가와 파이프 담배만 존재할 뿐이다.

'쿠바처럼 시가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곳이 있다던데. 어디 지역이었더라.'

어디인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분명히 있던 걸로 안다. 제논 일대기 전에 전세계로 뻗어나간 기호품이었으니 유통망도 다양하다.

그리고 외전을 낸다면 담배의 판매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겠지. 마지막 희망을 지킨 후, 눈을 감기 직전에 피는 담배 한 대.

'아니면 할아버지처럼 원수를 다 처단하고 마지막으로 피우는 식으로 할까?'

무엇 하나 고르기 어려운 최후다. 이렇게 되면 질투 혹은 분노는 한 발자국 멀리서 지켜봐야 하며, 그들이 아닌 부하가 원수로 설정하는 편이 좋다.

내가 결말에 대해 곰곰히 고민하고 있을 때쯤, 나를 유심히 바라보시던 아버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이작."

"네?"

"혹시 너도 담배를 피울 생각이냐?"

아무래도 생각이 조금 깊었던 모양이다. 나는 아버지의 질문에 눈을 깜빡였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담배는 전생에도 피우지 않았고, 지금도 피울 생각은 없다.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단지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해서 물은 거예요."

"흠. 알겠다."

"그럼 할아버지가 골초셨던 걸 빼면 다른 건 없나요? 성격이라던가 아니면 취미라던가."

"성격은 뭐······ 아들인 내가 이런 말을 하기 좀 그렇지만 괴팍하신 분이었다. 취미도 의외로 일기를 쓰시는 거였고."

"일기요?"

"그래. 하지만 떠나기 전에 모두 불태워서 남는 건 없단다. 아마 자기 흔적을 최대한 지우기 위해서였겠지."

나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보통 일기를 쓰는 사람들은 철학적인 면모를 갖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기자신이 걸어온 일생을 여러번 들여다 보며 어떤 일을 겪었는지, 또 어떤 잘못을 겪었는지, 그걸 통해 성장을 했는지 알 수 있으니.

더군다나 일기라는 것 자체가 당시에 있었던 일을 기록한 거라 역사적으로도 가치가 충분하다.

그런 일기를 불에 태웠다는 건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었지만, 덕분에 클라크가 어떤 인물인지 대강 알 수 있었다.

"생각이 깊으신 분이었던 모양이네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

"일기를 썼다는 것 자체가 자기자신을 기록하는 거잖아요. 일기를 매일매일 쓰는 게 얼마나 귀찮은데요."

"흠······"

아버지는 내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하는 듯하다가 나를 쳐다봤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에 내 얼굴이 거울처럼 투영됐다.

이윽고 그는 피식 웃더니 두터운 손으로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셨다.

이미 다 커버린 나지만, 아버지의 눈에는 어리디 어린 막내 아들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떠나기 전에도 좋은 아버지가 아니라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갔으니."

"··· ···"

"다시 돌아오면 한 번 시원하게 속을 털어놓고 싶구나. 할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아."

클라크를 향한 미련이 묻어나오는 속마음이다. 나는 아버지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위해서 모든 흔적까지 지웠으나 그 탓에 진심을 전달하지 못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가 무슨 이유가 있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으나 그 증거를 찾기 못해 마음 속에 묵혀두고 계셨고.

부디 이번 기회로 부자 간의 앙금이 해소되었으면 좋을 것 같다.

"분명 이유가 있을 거예요. 아니었으면 훈련조차 시키지 않으셨겠죠."

"그렇겠지. 그럼 말이 나온 김에 훈련하러 가자구나."

"아. 저는 글을 쓰러 가야 하는······"

"하하. 그 변명이 통할 것 같으냐? 잔말 말고 따라오려무나."

결국 그 날 하루는 글을 쓰지 못했다.

******

아이작이 호크로부터 특훈을 받기 시작했을 때쯤. 클라크가 기다리고 있는 지하 사원에는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원래라면 다짜고짜 클라크를 몬스터로 간주하여 공격을 가하던 조사단이었으나, 시간이 흘러 상황을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스켈레톤은 여느 개체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고. 선공을 가해도 기절로만 끝을 맺을 뿐이지, 목숨을 거두지는 않았다.

말투가 조금 험악하다는 게 흠이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행동 자체는 정중한 편이다. 누가 봐도 사악한 존재라 생각할 수 없었다.

덕분에 조사단도 서서히 흥분을 가라앉히고 '대화'를 진행할 수 있었다. 몸의 대화가 아닌, 클라크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진짜 대화였다.

[이게 제논 일대기라고?]

"예. 그, 그렇습니다."

클라크는 바닥에 놓여진 책, 제논 일대기를 바라봤다. 듣자하니 휴식 중에 심심할까봐 갖고 온 거라고 한다.

참고로 그의 밑에는 여전히 기사가 의자 대용으로 사용 중에 있다.

원래라면 기사도 놓아줘야 하지만, 반항하는 행동이 워낙 괘씸해서 그대로 방치시키고 있다.

다른 조사단도 그 기사를 구해주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클라크가 말도 안 되게 강한 나머지 조금의 트집조차 잡히면 안 됐으니.

[후우.]

클라크는 입에 시가를 문 채 고고학자가 갖고 온 제논 일대기 1권을 집어들었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공중에서 흩어졌다.

눈이 없는데 앞을 볼 수 있고, 귀가 없는데 들을 수 있었으며, 폐가 없는데 호흡을 할 수 있다.

이건 미각도 마찬가지. 한 번 시원하게 흡입하니 시가 특유의 고상한 맛이 폐부 깊숙히 들어왔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도 오감을 느낄 수 있는 상황. 클라크는 여유롭게 담배를 피우면서 제논 일대기 표지를 쳐다봤다.

[내가 살아있을 때 이런 게 나왔어야 했는데······]

클라크는 혀를 끌끌 차며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그는 제논 일대기를 읽진 않았으나 이 책을 통해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알고 있다.

수면 아래에서 활동하던 악마 숭배자의 머리채를 붙잡아 억지로 끌어올렸으며, 이외에 혁혁한 전공을 제웠다.

특히 타락한 추기경을 처치한 부분이 클라크로서는 후련하기 짝이 없었다. 그놈 하나 때문에 자신이 몸 담고 있던 세력이 완전히 소멸됐다.

설마하니 추기경마저 타락했을 줄은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못했다. 신의 사도가 어찌하여 악마와 손을 잡겠나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밖에 없었다.

허나 악마 숭배자는 클라크가 예상하던 것보다 훨씬 교활했으며, 또 용의주도했다. 때문에 차례차례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다시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이걸 다 읽고 가야겠군.]

클라크가 제논 일대기를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려던 찰나였다.

웅성­ 웅성­

지하 사원이 느닷없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클라크가 얌전하다는 걸 알고 나서 조사를 재개한 조사단이었으나, 또다시 시끄러워지는 건 분명 이유가 있을 터.

이에 클라크도 기척을 느껴 책에서부터 시선을 떼고 앞을 쳐다봤다.

뒤이어 지하 사원 출구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기운에 눈매를 좁혔다. 정확히는 눈구멍 안의 황금빛이 반으로 접힌 거지만.

"싸우시면 안 됩니다. 저 스켈레톤은 다른 개체와······"

"신이 정해주신 순리를 거스른 놈입니다. 게다가 아이작 님과 호크 경을 만나자고 했잖습니까? 분명 불순한 의도가 있을 겁니다."

적의로 가득찬 여인의 목소리와, 그 여인을 어떻게든 말리기 위해 쩔쩔 매는 남자의 목소리.

클라크는 한숨을 내쉬며 책을 조용히 덮었다. 아무래도 소란이 일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기운이 조금 강하다는 게 흠이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제압하면 그만이니.

그리하여······

"저 놈입니까?"

"예, 예. 그렇습니다만······"

신의 충직한 사도와.

[야.의자.]

"네, 넵!"

[잠깐 저리로 가 있어라.]

신의 가호로 부활한 스켈레톤이 서로 만나게 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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