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9화 〉 교육(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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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민 아닌 고민, 그러니까 24권 막바지에 등장할 씬을 고민한다는 건 23권이 발매되었다는 의미와 똑같다.
23권의 주 내용은 멸망 직전까지 다다른 왕국에서 질투와 제논이 결전을 펼치는 것. 그리고 그 사이에 수많은 논리들이 오고 간다.
본인의 복수는 정당화해도 악행이라는 건 순순히 인정하는 질투와, 그런 질투를 분노보다는 안쓰러움으로 바라보는 제논.
분명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건만 정반대의 운명을 타고난 두 사람.
한 명은 세계를 파멸로 몰고갈 운명을, 한 명은 세계를 구원할 운명을.
너무나도 대비되는 상황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제논은 그런 질투를 이해해줬다.
본인의 완벽한 아치에너미이면서 자신 또한 질투처럼 될 수도 있었으니. 하지만 아픔을 이해해도 공감은 하지 못 했다.
정확히는 안 했다는 부분에 더 가깝지. 질투의 사정이 눈물 날 정도로 불행해도 그가 악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니.
그리하여 서로 마주하게 된 질투와 제논. 그들이 서로 만나게 된 장소는 무려 알현실이다.
또한 알현실은 질투의 학살로 인해 피로 범벅이 되었으며 질투 또한 혈육을 제 손으로 참살한 뒤 스스로 왕좌에 앉았다.
아버지의 목은 오른쪽에, 사랑하는 연인을 빼앗았던 형제의 목은 왼쪽에.
마지막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던 연인은 왕비의 자리에 앉힌 채, 질투는 담담히 제논을 맞이했다.
그 장면 하나만 해도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모른다. 왕을 알현하러 가는 것 같으면서도, 마치 던전의 지배자를 토벌하러 가는 듯한 느낌을 표현하느라 애를 썼으니까.
실제로 질투는 스스로 '왕'이라 칭했다. 왕국은 악마들로 인해 잿더미가 되기 직전이라는 게 묘한 부분이었지만.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 간의 가벼운 논쟁. 논쟁 이후에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본격적인 전투에 나섰다.
특히 전투 직전 질투가 제논에게 했던 말은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꽂힐 것이다.
[원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아니다. 원해서 그런 부모를 만난 것도 아니다. 원해서 이런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난 이런 세상에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
비참하디 비참한 질투의 인생사를, 그리고 현재까지도 고통받는 사생아들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말.
사생아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길 정도로 인식이 바닥이다. 가정에 불화를 일으키다 못해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생아도 자신의 자식이라며 책임지는 개념인도 있지만 그건 극히 소수다. 대부분은 '오점'이라 여기며 가차없이 버린다.
심할 경우에는 암살자를 보내어 깔끔히 제거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사생아는 질투가 말했듯이 원치 않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가해자가 된 피해자의 케이스에 완벽히 부합하고 있다. 적어도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줬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터.
[프리드리히 국서도 세간에 로맨티스트라며 칭송받았지만, 결국 오점이 있었다. 다른 왕족 혹은 귀족이라고 다르지 않을 터.]
[아랫도리를 간수하지 못 했다면, 적어도 아이에 대한 책임은 져야하지 않겠는가?]
[실제로 질투와 같은 케이스는 역사적으로도 많다.]
[악마 침공이 실제로 이루어졌다면, 질투가 될 사람은 셀 수도 없이 많았을 것.]
이렇다 보니 사생아를 향한 관심이 부쩍 늘어났다.
질투의 비극적인 과거, 더 나아가 현실에서 프리드리히의 실체까지 겹치니 관심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다.
때문에 본래 바닥을 기다 못해 뚫기 직전이었던 인식이지만, 그들이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는 게 명확해진 셈이다.
[프리드리히 국서의 충격 고백 이후 귀족의 사생아라 밝히는 사람이 늘어나······]
[책임을 져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사람답게 살았으면 좋겠다.]
다른 책도 아니고 자그마치 제논 일대기에서 다룬 내용이다보니 현실에서도 그 파급력이 나타났다.
여태까지 꽁꽁 숨긴 출생의 비밀을 고백한 사람들이 대거 등장한 것이다. 마치 알븐하임의 혼혈 사태를 연상시키는 상황.
귀족의 숫자는 전체 인구의 약 0.01%~0.3%. 언뜻 보면 적어보이나 인간만 해도 그 인구가 몇 억이 넘는다는 걸 상기하자.
[끝까지 자기 자식이 아니라는 귀족과, 신전에서 확인하자는 사람들. 과연 진실은?]
[귀족만이 아니라 평민에게도 마찬가지. 욕망은 남녀노소 평등하다.]
[인간 국가와 달리 알븐하임과 헬리움은 잠잠해······ 애니머즈와 마키나도 마찬가지.]
엘프는 선천적으로 담백한 성정을 지녀 성욕이 인간보다 덜한 편이고, 마족은 알다시피 인내심이 매우 강하다.
드워프도 마찬가지. 성관계를 맺을 바에야 차라리 강철을 만지는 게 더 낫다는 기이한 종족이다.
수인은······ 넘어가자. 짐승의 본능을 탑재한 종족에다가 문화적으로도 사생아와 거리가 멀다.
이에 사생아 관련 문제는 인간 국가에서 주로 다루기 시작했다. 전생에서 발생한 유명 사건 명칭을 빌려 '사생아 미투'라고 칭하자.
실제로 사생아 문제는 알게 모르게 퍼져있는 상황이었는데 제논 일대기가 기름을 부어버리니 거대한 불길로 치솟······ 진 않았다.
전생의 미투가 그러했듯 시간이 흐르면서 무고한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발생했으니까.
제논 일대기를 든든한 뒷배 삼아 뜯어먹으려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억울하게 휘말린 사람들도 증가하면서 의미가 점차 퇴색되었다.
그나마 다행히 신전에 방문하여 진위를 가릴 수 있었으나 그동안 받았던 정신적 피해는 되돌릴 수 없는 법.
사생아는 분명 사회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지만, 그걸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다를 바가 없다.
[인간의 비열함과 간사함이 온전히 드러난 사건.]
[만약 우리에게 신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진의를 가렸을까?]
[신의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다면 출생을 밝혀라.]
신전 방문자가 늘어난 건 덤이다. 필멸자가 아무리 호소를 하더라도 신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번에 벌어진 미투는 정직한 자들만이 인정받는, 그런 사회적 운동으로 기억남게 될 예정이다.
겸사 겸사 인간의 추악함과 심리를 연구하기 알맞는 사건으로. 이미 많은 학자들이 논문으로 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세상에 한바탕 폭풍이 스쳐지나가 점점 고요함이 다가올 때 쯤, 저택에서 씬을 고민하고 있던 나는······
"진에게 있어서 릴리는 구원자 그 이상입니다. 그러니 구원자에게 봉사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대하는 게 어떨까요?"
"그것도 좋네요. 게다가 진은 악마화를 습득했으니 힘이 더 강해졌을 거예요. 그러니 유리 공예품을 다루듯이 대해야겠죠."
"긴장보다 기대가 더 클까요? 저는 긴장했습니다."
"저는 기대됐어요. 이것도 한 번 고려해봐야겠네요."
세실리와 아델리아의 의견을 듣고 묵묵히 노트에다가 필기하고 있었다. 둘의 의견이 아주 잘 맞아서 내 손만 바빠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성애씬에 대한 의견을 묻기 위해 가르츠를 시켜 세실리를 데려온 것이다. 그녀뿐만 아니라 아카데미에 있던 마리도 이곳에 있다.
원래 내키는대로 쓸 계획이었다만 다시 생각해보니 심리 묘사도 중요했기에 그들을 부른 것이다.
남자의 마음은 내가 잘 알고 있어도 여자의 마음은 잘 모르니까. 짐승의 본능만이 남게 되는 성애라지만 그래도 심리 묘사는 필요하다.
'이렇게 의견이 잘 맞을지도 몰랐는데.'
아델리아는 진의 불우한 어린 시절에 집중했고, 세실리는 진이 핍박받은 마족이라는 점에 집중하여 의견을 하나 둘씩 수립하고 있다.
덕분에 난항을 겪었던 진과 릴리의 씬은 무리없이 적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제일 큰 문제가 발생했으니, 바로 '분량'이다.
"주인공들보다 분량이 훨씬 많아졌는데?"
가만히 지켜보던 마리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모두 알고 있겠지만 제논과 메리의 씬은 마리의 의견을 참고했다.
다만 우리의 첫날밤은 다소 과격한 면이 없지 않아 있어 약간 순화시켰다. 대놓고 적기에는 숭한 부분들이 너무 많아서 차마 안 되겠더라.
이건 마리도 극히 동의한 바다. 막상 담아내려고 하자 부끄러워졌는지 나에게 먼저 부탁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진과 릴리에서 터졌다.
분량이 너무 많다. 하나 하나 세삼하게 적다보니 당초보다 훨씬 많아졌다.
1권이라 하기에는 약간 부족하고, 그렇다 해서 붙이기에는 너무 많은 양. 세세한 심리까지 부가 요소로 넣다보니 발생한 문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논이랑 메리도 더 추가해서 함께 붙이는 게 어떨까?"
원인을 제공한 세실리가 어색하게 웃으며 넌지시 제안했다. 옆의 아델리아도 따라 쓰게 웃었으나 내심 동조하는 모습.
마리는 그런 그들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가 최종 결정권자인 나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아이작은 어떻게 할 거야?"
"그러게."
나는 어느새 수북히 쌓여있는 원고지를 보면서 고민했다. 저걸 쓰면서 솟아오르는 욕망을 참느라 고역이었지.
무슨 씬을 하나 쓰는데 이만한 노력을 기울이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이 세상에 야설은 없다. 이건 전에도 말했던 부분이다.
성인용으로 판매할테지만 어린이와 한창 성에 관심이 많을 청소년이 볼 수도 있다. 그걸 대비하기 위해 깊이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냥 '깊은 사랑을 나누었다'라고 묘사한 뒤 넘기면 끝 아니냐고? 독자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장면인데 과연 쉽게 넘어갈까?
절대 아니지. 하물며 이건 인물 간의 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라 쉬이 넘길 수 없다.
"분량은 어찌할 수 있지만······ 그러려면 제논과 메리에게도 심리 묘사를 넣어야 해. 하지만 메리는 엘프잖아? 비록 전쟁이라 의식이고 뭐고 없을테지만 엘프의 성생활에 대해서 아는 게 없으니······"
"음······ 그건 그렇지."
또 하나의 문제점이 있었으니, 바로 메리(엘프)의 심리다. 진은 세실리의 조언이 있으니 괜찮다만 엘프의 마음은 모른다.
심지어 엘프는 담백한 성정을 갖고 있을 뿐더러 성관계를 일종의 '의식'으로 치부한다. 엘프의 출산률이 매우 낮은 이유도 여기에 기인하고 있다.
그렇다고 주변 지인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엘레나와 신디는 동료라지만 그런 것까지 물어볼 사이는 아니다.
'아르웬은······'
그나마 아르웬이 있지만 물어보기가 부끄럽다. 물론 그녀가 나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다짜고짜 첫날밤은 어떨 것 같나? 라고 질문할 수 없지 않은가.
제논 일대기에 참조한다지만 괜히 사이가 어색해질 수도 있다.
"그냥 여쭤봐."
"응? 뭐를?"
"아르웬 여왕님에게 여쭈어 보라고. 어차피 조만간 너랑 이어질텐데 뭐."
"··· ···"
우리의 마리 님께서는 상관없던 모양이다. 반쯤 포기한 건지, 아니면 순응한건지 이제는 내가 누구와 이어져도 개의치 않아한다.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너스레를 떨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 이제 와서 질투해봤자 아~무 의미가 없지. 그러니까 내 눈치 보지 말고 시원하게 물어봐. 나도 궁금해서 그래."
"······진심이야?"
"난 진심이야. 너에게 도움이 된다면 뭐든지 할 수 있어."
표정을 보아하니 진심인 것 같다. 나는 마리의 푸른 눈동자를 직시하다가 다른데로 시선을 옮겼다.
다른 사람도 마리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인지 고개를 끄덕이거나 침묵으로 화답했다.
순간 아르웬의 의견도 물어봐야 되지 않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그녀도 분명 승낙해주겠지.
"······그럼 진짜 부른다?"
나는 책상 서랍에 담긴 소환지를 꺼내며 눈치를 보았다. 소환지는 당연하게도 시리스다.
이윽고 다시 한 번 긍정의 대답이 돌아오자 몇 번 망설였다가 소환지를 찢었다. 오래만에 부르는 시리스인데 과연 소환에 응할까.
그로부터 잠시 후······
"뭐, 뭐, 뭐라고 했느냐? 처, 첫날밤? 갑자기?"
아르웬이 은회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얼굴은 붉어질대로 붉어지고, 엘프 특유의 기다란 귀는 정처없이 위아래로 까닥거린다.
'...귀엽네.'
그 모습이 정말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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