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9화 〉 사칭(3)
* * *
"하아···"
아이작 일행이 엘프식 공산주의 맛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시간.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당사자이자 알븐하임의 여왕, 아르웬은 좀처럼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신하들과 의견을 조율하는 회의가 끝나고 집무실에 홀로 있었기에 힘없는 그녀의 반응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옥좌에 앉아있을 때는 엄격하고 현숙한 이미지를 보여야 하기에 약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이(?二)한 시간이다.
하나는 지금처럼 혼자 있을 때, 또 하나는 아이작의 앞에 있을 때.
정확히는 본성이라고 말해야겠지. 다크 엘프측에서 보내준 호위 기사, 시리스의 앞에서도 본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
그만큼 아르웬에게 있어서 아이작은 대하기 편한 상대였으며 여왕이 아닌 자기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
'이게 어쩌다 이리 된 거지···'
현재 그녀는 최근 알븐하임에 터진 사건, 카이르 사칭 사건 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는 중이었다.
세실리의 모티브가 릴리스라면 엘리샤의 모티브는 자신이다. 무섭게 성장 중인 헬리움을 견제하기 위함과 동시에 사심 또한 들어있는 발언.
여왕의 입장으로, 헬리움의 성장은 어떻게든 지체시켜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알븐하임의 가장 위험한 라이벌로 남게 될테니.
본래 그녀는 헬리움을 쉽게 보았으나, 전시회에서 보여준 그들의 문화력을 뼈저리게 겪고 생각이 달라졌다.
지금 이대로 흘러간다면 헬리움은 무시무시한 성장세를 겪고 알븐하임 못지 않은 최강대국으로 성장할 거라고.
특히 국민들이 지도자의 뜻에 따라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친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종족 전쟁 당시 인간들이 그러했으며 알븐하임은 분열되기 바빴으니. 부작용도 있지만 국민들이 지도자를 믿는다는 것 자체부터가 어려운 일이다.
'이건 공적인 일이니까 어쩔 수 없는거야.'
스스로 위안을 하는 게 아니고 공과 사는 명백히 구분해야 된다. 태생부터 저주받은 마족에게 연민은 품고 있지만 아르웬은 현명한 지도자다.
아무리 마족이라는 종족이 불쌍하더라도 경계해야 될 건 경계해야 된다.
종족 전쟁 이후로 삐걱거렸음에도 불구하고 알븐하임은 강력한 패권국으로 자리잡고 있으니.
게다가 원로원이라는, 썩다 못해 석유가 되기 직전이었던 고인물마저 모두 축출하여 성장세를 달리는 중이다.
"그런데 이 새끼들은 카이르가 만만하게 보이나?"
집무실에 혼자 있어서 망설임없이 험한 말을 내뱉는 아르웬. 고운 미간이 찌푸려지며 불쾌감이 자리잡았다
불과 2년도 안 된 시간 사이에 발생했던 일들 다음으로 지금 터진 사건을 떠오르니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정치 및 사심이 깃든 발언이기는 해도 이런 결과를 초래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심지어 한 명이 아니라 수 십명, 그것도 인간 사회에서 꽤 이름을 날리는 모험가 혹은 용병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본인이 진짜 카이르라며 우기는 것도 그렇지만 틈만 나면 싸우는 일이 비일비재하여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다.
'이건 카이르를 향한 모독이지.'
엘리샤와 카이르의 애절한 로맨스는 아르웬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 중 하나다.
당장 본인부터 엘프 여왕에다가 혼혈이었으니 더욱 깊이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제논 일대기 속 카이르는 점잖고, 상냥한데다가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인간이다.
죽기 직전까지 한 여자만 바라보는 순정남이며 성격이 약간 괴팍하긴 해도 여러모로 인간됨이 훌륭한 남자.
현재 바깥에서 본인이 카이르라며 되도 않는 말을 지껄이는 쓰레기들과 비교하는 것조차 모독이다.
'그나마 제논이라 우기는 놈이 없어서 망정이지.'
그랬다면 자신이 아니라 세이비어가 직접 출동했겠지. 거짓이라면 그대로 신성모독으로 끌려갈테고.
카이르라 우기는 놈들에게도 천벌이 내려졌으면 좋겠지만 그러기는 약간 곤란한 점이 많다.
일단 카이르라 우기는 놈들의 마인드부터가 문제다. 그들은 본인을 진짜로 카이르라 믿고 있다.
물론 그 안에는 불순한 의도가 가득 들어있겠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신분을 숨기고 그들에게 다가간 적이 있다.
길거리에서 시위 아닌 시위를 할 때도, 자기들끼리 주먹다짐을 할 때도 버틸만 했다.
저 병신들은 도대체 할 일이 얼마나 없으면 저딴 짓을 할까, 라는 생각만 들었으니까. 하지만 저녁이 된 후에는 얘기가 달라졌다.
혹시 몰라 시리스를 시켜 뒤를 밟으니 온갖 음담패설이 튀어나오는 건 기본이고, 소위 한탕하기 위해 찾아온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 말을 듣자마자 울화가 치밀어 올라 싸그리 추방시키고 싶었지만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애매해졌다.
'다행히 백성들이 알아서 해줬지.'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도 잠시, 아르웬은 국민들이 스스로 나섰던 일화를 떠오르자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카이르 사칭들이 선을 넘는 짓을 여러번 하는 바람에 알븐하임의 국민들의 시선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엘프들은 마족에게 지지 않기 위해 아르웬을 선물 삼아 제논에게 보내려 마음 먹은 상태.
그러한 입장을 아르웬이 아닌, 알븐하임의 국민들 스스로가 밝힌 덕분에 사칭범들이 주춤한 상황이다.
'아이작이 좀··· 당황했겠지?'
여왕은 제논을 위한 선물이라며 빼앗을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라는 발표. 이 발표 하나로 전세계가 다시 시끌거렸으나 아르웬은 만족했다.
언젠가 발표할 생각이었는데 사칭들 덕분에 적절한 기회를 붙잡았으니.
심지어 이건 아르웬이 공표한 게 아니라 알븐하임의 국민들이 입을 모은 것이라 더욱 뜻깊었다.
'어차피 카이르는 저딴 놈들이 아니라 아이작일테니까.'
뭔가 지대한 착각을 하고 있는 아르웬. 그러나 그녀의 상황을 고려하면 충분히 일리 있는 착각이다.
아이작은 여태껏 큰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아르웬에게 호의를 보여주었으며 더 나아가 혼혈 사태까지 해결해줬다.
심지어 초고 도난 사태 당시에도 레인에게 실질적인 형벌이 아닌 집행 유예를 선고했다.
아이작이라는 사람 자체가 사려 깊고 호인일 수도 있지만, 지난번 세실리와 대결 아닌 대결이 끝났을 때 깨달았다.
아이작은 다른 세계에서 이곳으로 넘어왔으며, 그가 살던 세상은 제논 일대기 속과 유사한 세계라고.
정확히는 없어진 '미래' 즉, 이 세상의 또다른 형태라고 봐야할 터.
'미래에서 돌아왔다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부정하는 것도 이해가 가. 거짓말이 아니니까.'
처음에는 진짜로 '제약'이 있어서 말을 하지 못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돌이켜 본다면 아이작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신조차 다루기 어렵다는 진리, '시간'을 깊게 살펴보아야 된다.
일단 누군가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왔다고 치자. 그리고 이제는 '현재'가 되어버린 과거를 하나 둘 씩 바꾸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왔던 미래는 미래라고 할 수 있을까? 이미 바뀌어도 너무 바뀌어버린 미래를?
한때 유명했던 이론이었으나 너무 복잡하고 신의 자리를 넘볼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묻혔던 이론이다.
다크 엘프 추방 사건이나 금단의 마법, 합체처럼 인위적으로 말소시킨 게 아닌, 너무 어렵고 엘프조차 두려워하여 폐기되었던 이론.
하지만 그 이론을 아이작에게 적용시킨다면 놀라울만치 들어맞는다.
물론 당사자에게는 미래겠지만 그는 위의 이론을 이용해 진실을 교묘히 피했을 것이다. 이건 신들도 그의 편을 들어줄 것이리라.
다시 말해, 아이작은 제논 일대기 속에 겪었던 사건사고들을 모두 겪고 돌아온 회귀자다.
수많은 논리 끝에 아르웬이 내린 결론. 만일 아이작이 듣는다면 혼자 아침 드라마를 쓰고 있다고 말할 정도의 착각.
'미래가 좀 많이 달라졌지만···'
아르웬은 아이작의 곁을 지키고 있는 여인들을 상기했다. 자신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고 오히려 몇몇 부분은 앞서나가는 여자들.
마음 같아서는 알븐하임의 국정을 내팽개치고 아이작에게 달려가고 싶었으나 업무가 너무 고달프다.
책 속의 엘리샤도 비슷한 심정이었을 터. 하지만 그녀와 달리 자신은 절대 비극을 겪지 않을 것이다.
시시때때로 견제하던 원로원은 역사 속으로 퇴장했고, 국민들이 직접 나서서 결혼을 종용하는 중이다.
모든 게 완벽한 상황. 남은 건 욕심밖에 없는 사칭들을 모조리 쫒아내는 것 뿐이다.
그 후로는 아이작에게 찾아가서 사정에 대해 설명한 후, '어쩔 수 없다'라는 핑계로 그에게 안기는 것 뿐.
안긴다고 생각하니 얼굴이 붉어진 그녀였지만,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한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똑똑똑
[여왕님. 케이르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방금 생겼다.
아르웬은 최근에 호위 기사로 발탁된 케이르가 문을 두드리자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이런 꼴사나운 모습은 아이작을 제외하면 보여주면 안 된다. 이에 그녀는 고개를 홱 홱 저었다.
"크음. 들어오거라."
간단한 헛기침을 통해 목을 푼 아르웬이 출입을 허가했다.
그녀가 출입을 허가하자마자 케이르도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냐?"
"다름이 아니라, 긴히 알려드릴 소식이 있습니다."
"또 그 자들이 소란을 일으킨 것이냐?"
아르웬은 예쁜 인상을 와락 구기며 불쾌감을 표시했다. 사칭들이 알븐하임에 들이닥친 이후로 하루가 멀다하고 조용한 날이 없다.
그들이 하는 착각도 착각이지만 아르웬이 지닌 직위와 외모를 탐내는 사칭들.
한 번 모습을 드러냈다가 그 정도가 더욱 강해졌기에 알븐하임의 국민과도 다투는 일이 빈번해졌다.
"그 자들도 알고 있을텐데. 나뿐만 아니라 그대와 같은 백성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말했다. 나, 아르웬 엘리디아는 제논을 위한 선물이라고."
"네. 알고 있습니다. 저 또한 동의하는 바입니다. 헌데 문제는···"
케이르는 이걸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뒤이어 골치 아프다는 듯이 쓴웃음을 짓더니 아르웬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놈들이 아니라 다른 놈이 기어코 선을 넘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다시 말하지만 세상은 넓고.
"이제는 카이르가 아니라, 스스로를 제논이라 칭하는 사람이 나타났더군요."
"···뭐?"
미친 놈들은 생각보다 많다.
아르웬은 케이르의 보고를 듣고 은회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떴다가 끔뻑끔뻑 깜박였다.
대체 목숨이 몇 개인지 몰라도 카이르가 아닌 제논을 사칭하는 건 정말로 선을 넘은 행위다.
이에 그녀는 분노보다 당황스러움이 앞섰기에 말을 더듬거리며 케이르에게 물었다.
"저, 정녕 그게 사실이더냐? 카이르가 아닌 제논이라고?"
"네. 뭐, 루미너스님에게 여쭈어 보지 않아도 100% 확률로 거짓말일테지만··· 아시잖아요?"
케이르는 은근한 목소리로 아르웬에게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일이 좀 더 꼬일 거라는, 일종의 조언이다.
아르웬은 그 질문을 받자마자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거늘 기어코 넘어버린 사칭들.
이대로 추방시킨다? 추방시켜도 그들의 목소리는 전세계에 울려퍼질테고, 더 나아가 곳곳에 사칭들이 우후죽순 생길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신전에 데려가서 확인을 시키는 것뿐인데, 과연 그들이 순순히 끌려가줄까?
무엇보다 그들은 '작가' 제논이 아닌, 제논 일대기 속 '영웅' 제논을 사칭하고 있는 것일 터.
아르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기가 막힌다.
신종 자살법도 아니고 간이 얼마나 커야 제논을 사칭할 수 있는 걸까. 그정도로 자신의 자리가 탐났던 걸까.
"···무슨 말을 했는지 알려줄 수 있겠느냐?"
"카이르보다 행복하게 만들어 줄테니 자기랑 결혼하자고 떠들고 다닙니다. 자신은 앞으로 영웅이 될 사람이니 알아서 대하라는 말도 했고요."
"무슨 병···"
신 같은 놈이지. 라는 말을 꾹 눌러담은 아르웬. 그녀는 침착하게 가슴을 두드렸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름과 특징에 대해서만 알려다오."
"입국 신청서에도 제논이라 명시돼 있는데 그렇게 부를까요?"
"그냥 가짜라고 불러라."
제논은 무슨. 짝퉁이지.
케이르는 그녀의 말에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알겠습니다. 인간 기준으로 이제 막 성인이 된 17살로, 용병 길드 내에서도 본인이 제논이라며 떠벌리고 다녔답니다. 이를 보아 실제 이름도 제논일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꽤 강한 실력을 갖고 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재능도 뛰어난 편이고요. 아마 이것 때문에···"
아르웬은 어떻게 된 연유인지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철이 덜 든 인간이구나···'
*****
한편 비슷한 시간, 루미너스 신전.
"알븐하임에 스스로를 제논이라 칭한 자가 나타났다고요?"
"일단 들리는 소식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찾아가겠습니까?"
"물론이죠."
누구보다 빠르게 소식을 접한 케이트는 전령의 물음에 빙긋 웃으며 답했다.
"어떤 미친 놈이 그딴 신성모독을 저지르는지 한 번 보고 싶네요."
정말 살벌한 미소를 지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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