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276화 (277/763)

〈 276화 〉 아이작의 상상은(3)

* * *

헬리움 왕궁에서의 생활은 지난 겨울 방학과 거의 동일했다. 일행에 마리와 아델리아가 추가된 것 빼고는 차이가 거의 없다.

가끔 가다 마리가 헬리움의 생활에 대해 궁금하다고, 함께 바깥에 나가는 경우가 있었으나 대부분 왕궁 내에서 생활하는 중이다.

마리도 내가 일을 하고 있다면 배려 차원에서 말하지 않고 세실리와 함께 헬리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닌다. 덕분에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는 일이 많아졌다.

뭐, 그렇다 해서 무조건 혼자 있는 건 아니다. 나의 듬직한 전속 메이드, 아델리아가 항상 곁을 지키고 있었으니.

아델리아는 밤시중 당시 입었던 메이드복이 아니라 평범한 메이드복을 입었다. 대신 치마는 여전히 짧은데다 가터 벨트를 착용하여 섹시함을 더했다.

언제 봐도 느끼는 거지만 아델리아의 메이드복은 정말 잘 어울린다.

키와 더불어 몸매가 좋은 것도 있으나 평소 그녀의 듬직한 이미지를 고려하자면 무슨 느낌인지 알 것이다.

바깥에서는 든든한 호위 기사, 안에서는 헌신적인 메이드. 이러한 반전 매력을 고스란히 담아놓은 여자가 바로 아델리아다.

그렇다 해서 내 집중력을 깨뜨릴 수 없는 법이지. 휴식 시간을 제외한다면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집필을 이어나갔다.

아델리아도 일은 일대로 충실히 하자는 마인드였기에 별 다른 행동없이 잠자코 서 있기만 했다.

"도련님. 자세가 틀어졌습니다."

"아. 고마워."

물론 가끔 가다가 내 자세를 교정시켜주거나 안마를 해주는 등. 적절한 지원은 잊지 않았다.

여태까지 혼자 집필을 하고 있던 탓에 나도 모르고 있던 습관들이 몇몇 존재했다. 아델리아는 이걸 세세히 고쳐줬다.

안마도 마찬가지. 제아무리 좋은 의자라도 오랫동안 앉아있거나 자세가 이상하면 근육에 무리가 오는 법이다.

나의 집중력과 체력이 유별나게 뛰어나서 그렇지, 아델리아의 눈에 안 좋은 습관들이 보였던 모양이다.

"누누이 말씀드렸잖아요. 허리는 곧게 펴고 두 팔은 책상 위에. 그리고···"

그러나 습관이 어째서 습관이라 부르겠나. 한 번으로는 고쳐지지 않기에 습관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에 아델리아는 내가 습관적으로 할 때마다 잔소리 융단 폭격을 떨어뜨렸다.

그녀와 체력 단련을 할 때마다 비슷한 소리를 들어서 기분 나쁘거나 하지는 않다. 오히려 나에게 관심이 많다는 증거이니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누나."

"집중도 좋지만··· 네?"

"둘만 있을 때는 말 놓으면 안 될까?"

다만 규칙만큼은 철저하게 지키려는 본인의 성격 탓인지, 아니면 메이드 교육을 받을 때 그렇게 배운 것인지 둘만 있을 때도 존댓말을 사용한다.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나의 권위도 세워줄 겸 듣는 사람도 있기에 어쩔 수 없다지만 지금처럼 둘만 있을 때는 필요없다.

어차피 지인들이 아닌 이상 누가 올 일도 없거니와 아델리아도 내 여자라는 걸 이미 알린 참이었으니.

그런 의미에서 넌지시 부탁했으나 아델리아는 완고했다.

"안 돼요. 근무 시간이잖아요."

"혹시 융통성이 없다는 말을 알고 있어?"

"알아요. 하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

아델리아는 말을 하다가 말고 내 얼굴을 쳐다봤다. 나는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자 아델리아의 얼굴이 미미하게 붉어지는 것 같더니 헛기침을 하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알았어. 네가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음?"

갑자기 왜 말을 바꾸는 거지. 순간 의아해졌으나 나에게는 좋은 반응이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솔직히 그전까지 누나 동생하던 사이였고, 현재는 몸까지 섞었는데 근무 중이라고 존댓말을 하는 건 어색하다.

기껏 가까워졌는데 다시 멀어진 느낌이랄까. 항상 느끼는 거지만 말에는 다양한 힘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

"아이작. 제논 일대기를 집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건 네 건강이야. 계속 그렇게 좋지 않은 습관을 가지면 나중에 필히 문제가 생길거야."

물론 말을 놓는다 해서 잔소리가 멈춘다는 건 절대 아니다. 근무 시간에 세워져 있던 경계마저 허물어진 탓에 속사포로 내뱉었다.

나는 그녀의 잔소리에 따라 1시간 마다 한 번씩 스트레칭을 하는 것으로 몸을 풀었다.

모두 알고 있겠지만 한 번 집중에 빠져들면 헤어나오기가 매우 어렵다.

기본적으로 인내력이 강한 것도 있지만 신성력 때문인지 몸이 피곤하다는 것 자체를 못 느끼고 있었다.

"중간중간 수분 섭취도 필수. 어쩐지 피부가 건조하더라니 물도 안 마시고 있었어?"

"딱히 갈증은 안 느껴지는데?"

"갈증이 느껴진다는 건 이미 몸에 수분이 매우 부족하다는 신호야. 물만 꾸준히 마셔도 네 건강의 반은 해결되겠지."

역시 무학과 조교 출신 답다고 해야 할지. '신체'에 한해서 내 건강을 빈틈없이 책임져주는 아델리아다.

이밖에도 본인이 직접 과일을 깎아서 내 입에 넣어주거나 여러가지 건강 식품을 챙겨오는 등. 나를 지극정성으로 보필해줬다.

심지어 저택이 아니라 헬리움의 왕궁이라 부탁하기 어려울텐데 어찌어찌 챙겨놓는 모습이다.

덕분에 입이 심심할 여지가 없었으며, 1시간마다 쉬는 시간을 가졌기에 집필이 끊기는 일도 없었다.

'어디 보자··· 일단 식탐은 진한테 완전히 털리고···'

나는 아델리아가 입에 넣어준 사과 비슷한 과일을 우물거리며 홀로그램을 바라봤다. 홀로그램은 당연히 타자기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21권의 전반적인 내용은 진의 각성과 더불어 내면의 악을 완전히 제어하는 것. 그리고 각성한 진이 식탐을 완전히 털어버리는 내용으로 전개가 된다.

다행히 릴리를 향한 사랑으로 인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나, 진은 악마와 인간 사이에 태어난 1세대 마족.

사랑의 힘이 컸기에 이성이 돌아왔으나 육체는 인간보다 악마에 가까워진다. 심지어 내면의 악이 가끔씩 꿈틀거린다는 내용도 추가할 것이다.

이 설정 하나만으로 진이 디아볼스의 영혼을 흡수하고, 더 나아가 최종보스로 태어나는지에 대한 개연성이 부여된다.

마족이 아닌 악마가 지닌 검은 마나는 슬라임마냥 끈적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 잘 달라붙는다. 이러한 특징을 이용하여 진이 디아볼스의 영혼을 흡수하는 것이다.

'이로서 분노, 색욕, 식탐 순으로 리타이어하고 남은 건···'

남아있는 칠죄종은 교만, 질투, 나태, 탐욕 이 네 가지다.

여기서 나태는 디아볼스의 영혼을 담기 위한 '그릇'이며 그 그릇은 '탐욕'을 담당하는 드워프가 제작한다는 설정이다.

흔히 매드 사이언티스트라 불리는 클리셰에 부합하는 인물이 바로 드워프다. 그는 신을 뛰어넘는 창조물을 손수 제작하겠다는 탐욕으로 나태를 제작하게 된다.

하지만 이건 최후반부에 나올 내용이고, 식탐 다음으로 등장할 예정인 인물은 '질투'다.

질투는 카이르의 수제자이자 제논의 사형이기도 한 인물이나 어떠한 계기를 통해 악마로 타락했다.

대충 어떤 설정으로 타락하는지 정립했으나 이걸 어떻게 풀어가야할지가 관건이다. 그만큼 질투의 심리는 복잡했으니.

'왕국의 사생아라는 설정이긴 한데···'

나는 사생아라는 설정이 떠오르자마자 아델리아를 힐긋거렸다. 그녀는 내가 바라보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슨 할 말이 있냐는 표정을 지었다.

하늘색으로 빛나는 눈동자에는 나를 향한 애정과 관심이 듬뿍 담겨있다.

'그냥 원래의 스토리로 노선을 틀어버릴까?'

사실 질투와 관련된 설정은 이것 말고 다른 게 존재한다. 일단 아까 말했던 왕국의 버려진 사생아라는 설정과, 그냥 흔하디 흔한 찌질이 악역.

본래 짜놓았던 설정에 따르자면 질투는 제논의 완벽한 안티테제라 볼 수 있다. 카이르에게 가르침을 받은 건 똑같으나 제논과 달리 질투는 세상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았으니.

더군다나 선천적으로 선한 제논과 달리 질투는 허영심이 강하다. 그때문에 카이르에게 받았던 가르침을 나쁜 쪽으로만 사용하고, 결국에는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질러 악마로 전향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기 반성은 하나도 하지 않고 세상이 날 억까한다며 질투만 하는, 그런 찌질한 악역.

하지만 최근 겹쳤던 사건들과 전시회에서 영화를 본 이후로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는 중이다.

태생적으로 찌질했던 악역보다는 진짜로 세상이 가만 두질 않아 타락한 인물로. 여기에 사생아라는 설정까지 추가하면 완벽하다.

'그러면 좀 불쌍하긴 한데···'

나는 다시 아델리아를 힐끔거렸다. 겉보기에는 예쁘기 그지 없는 누나지만 속에는 무수한 흉터가 새겨진 사람.

1년 전에는 내가 보는 앞에서 가족에게 버림받았고, 심지어 히리야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나를 빼앗길 뻔했다.

다행히 리나가 방패 역할을 적절히 해줬기에 망정이지, 내가 제논이 아니라 평범한 귀족이었다면 속수무책으로 빼앗겼겠지.

그리고 새롭게 정립된 제논 일대기 속 질투는 이러한 비극을 모조리 당하게 된다.

왕족의 사생아로 태어나 불우한 가정 환경 속에서 자라고, 그 상처를 보듬어줄 여자를 만났으나 그마저도 배다른 형제에게 빼앗기게 된다.

종족을 초월하여 메리와 이어진 제논과 달리 모든 걸 빼앗긴, 그야말로 완벽한 안티테제라 할 수 있다.

'어우···'

상상만 해도 끔찍한 걸. 이건 나 같아도 세상을 원망하겠다. 아니면 진작에 목숨을 끊거나.

이러한 과거사 덕분에 '질투'라는 감정에 매우 부합하는 설정이며 현실성도 높다.

당장 아델리아가 그런 짓을 당할 뻔했는데 현실성이 없다고는 말 못 하겠지.

만약 이러한 설정을 그대로 들고 간다면 테르스 왕국에게 빅엿을 먹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히리야 쪽에서 의심을 살 수도 있다.

특히 이 부분은 아델리아의 트라우마를 제대로 건드리게 되는 셈이니 여간 찝찝한 게 아니다.

"···누나."

"응?"

"그··· 하나만 물어볼게 있는데 괜찮아?"

"뭔데?"

그래서 당사자, 아니 모티브가 될 아델리아에게 직접적으로 양해를 구했다.

아델리아는 내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자 의문 어린 표정을 지우고 살짝 움찔거렸다.

뒤이어 한참동안 고운 미간을 좁힌 채 생각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녀의 입이 열릴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이윽고 약 30초 정도 기다렸을까. 아델리아는 좁힌 미간을 유지한 채 나를 스윽 바라보더니 무겁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상관없는데?"

"역시 안 되··· 뭐?"

"난 상관없다고."

본인과 깊은 연관이 있는데도 손쉽게 승낙한 아델리아. 나는 그런 그녀를 멍한 얼굴로 바라봤다.

그런 내 표정이 웃겼던 건지 아델리아가 피식 웃으며 나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스윽­

"책에 넣으면 뭐 어때? 이제는 그런 일도 없을텐데. 설마 진짜로 히리야한테 가는 건 아니지? 책에 복선이나 떡밥을 넣는 것처럼?"

"그런 거라면 차라리 혀를 깨물고 말지."

"그래. 그래. 나도 네가 히리야한테 가면 혀 깨물고 죽을거야."

그녀는 나를 감싸안으며 애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섬뜩하기 그지 없다.

하지만 내용과 별개로 아델리아의 트라우마를 제대로 자극시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더군다나 책의 내용을 성서로 받아들이고 있는 마당에 세상 사람들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사생아를 향한 시선이 더 나빠질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어쩌면 모티브가 된 테르스 왕국을 향한 비난이 발생할 수도 있지.

캐릭터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으나,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의미다.

'마음 같아서는 모라님에게 부탁해서 미래를 보고 싶지만···'

여태까지 내가 얻는 신성력으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소모되는 신성력은 무시무시하다.

당장 은총을 받았다던 케이트조차 나를 찾기 위해 애매한 신탁을 받았다. 내가 특이 케이스인 것이지, 추기경조차 힘든 것이 미래 예측이다.

하물며 그 신성력마저 밤일을 위해 아껴놓아야 하는 상황. 큰 파도를 막기 위해 큰 방파제가 필요하듯이, 질투의 설정은 큰 파란을 몰고 올 것이며 예측조차 어렵다.

만약 이대로 밀고 나간다면 테르스 왕국, 정확히는 히리야 쪽에서 정체를 알게 될 확률이 높겠지.

'솔직히 꿇린 건 하나도 없지?'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그쪽은 아예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 있는 쪽은 아델리아였으니.

나는 아델리아의 승낙에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는 그녀를 끌어당겼다.

아델리아는 내가 끌어당기자 어어, 하면서도 나에게 와락 안겼다. 우리 둘 사이에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사생아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아?

아델리아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나는 그녀에게 재차 확인을 구했다. 이건 두 번 세 번 묻고 확답을 받아야 된다.

어안이 벙벙했던 그녀도 내 질문에 나를 바라보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못 말린다는 미소다.

이어서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앞으로 내밀더니 내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하고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로 답했다.

"너는 나랑 지내면서 사생아라는 걸 생각한 적이 있어?"

"거의 없지?"

"나도 너랑 이어지면서 내가 사생아라는 걸 자각한 적이 없어. 난 그냥 너의 전속 메이드이자, 아이작의 첩일 뿐이야."

어쩜 이리 예쁜 말만 골라서 하는 걸까. 누누이 언급하지만 아델리아는 내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사랑받을 가치가 넘치는 여자다.

그런데 사생아라는 틀에 묶여있어서 그런 매력을 뿜내지 못 했을 뿐이지. 그러나 억압받던 사슬이 풀리면서 본연의 매력을 고스란히 내보내고 있다.

이에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뺨을 살살 쓰다듬어줬다.

"누나."

"응. 말해."

"오늘 밤도 시중을 받고 싶은데, 될까?"

그 질문에 아델리아는 하늘색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뺨을 붉히며 대답했다.

수줍어하면서도 사랑받고 싶어하는, 애교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네."

좀 더 짜임새 넘치는 스토리가 완성되기 시작했다.

*****

그 시각 아이작이 헬리움의 왕궁에서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 때.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가르츠 발락 경이 맞나요?"

"그··· 제 이름이 맞습니다만 어째서 은인의 어머니께서 저를···"

"다름이 아니라 제 아들을 찾고 싶어서요. 실례지만 아이작의 어머니로서 확인해야 될 부분이 있어서 소환했습니다. 혹시 아이작이 있는 헬리움에 저를 데려가 줄 수 있나요?"

"··· ···"

아이작의 방에서 가르츠의 소환지를 찾아낸 안나가 기어코 가르츠를 소환했다.

'왜 나만 이런 일이···'

가르츠는 사상 최대의 위기를 느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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