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267화 (268/763)

〈 267화 〉 소프트파워(3)

* * *

영화는 세계에 공통되는 대표적인 인기 문화 중 하나다. 글이나 만화처럼 끊기는 게 아닌, 말 그대로 녹화된 영상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것.

하지만 영화라 해서 꼭 상상 속에서 나올법한 이야기를 보여주진 않는다. 대부분이 허구의 이야기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도 상당히 많다.

이처럼 사람의 상상력과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영화는 문명인들에게 있어서 버릴 수 없는 문화로 탄생했다.

텔레비전을 비롯한 다양한 물건 및 매체들이 쏟아져 나왔을 때도 영화 시장은 주춤할 뿐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영화는 문화의 황금기를 상징함과 동시에 과학 발전의 척도를 알려줄 수 있는, 문화와 과학의 진정한 합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007, 마블을 비롯한 다양한 만화 등등. 유명 작품들이 영화로 변하여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게 꼭 성공할 거라는 보장이 없다는 게 흠이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것이, 사람마다 상상하는 것이 다를 뿐더러 영화 감독은 원작자와 엄연히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원작에 없었던 설정이 나타나 팬들에게 의아함을 선사하거나 오히려 망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당연히 원작자도 슬퍼할 수밖에.

반대로 평범한 소설이나 만화가 영화화되어 뒤늦게 빛을 보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다. 그야말로 감독의 능력 차이라 할 수 있다.

말이 길어졌지만, 전생에서 내가 보던 영화는 과학이 극대화되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들이 가능했다.

거대한 괴물이 도시 한복판을 돌아다닌다던지, 웬 천재 억만장자가 강철 슈트를 입고 히어로가 된다던지, 우주로 날아가 다양한 사건사고를 겪는다던지.

이건 엄연히 CG라는 '과학'이기에 가능한 것이며 마법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다.

지구에서 판타지 중세 시대를 표현하는 건 가능해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지구를 묘사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반대로 판타지 세상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심지어 마법으로 CG를 대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면?

사실 CG라 할 것도 없다. 그냥 감독이 준 대본대로 싸우면 되거든. 여기에 중간중간 마법 효과를 첨가하여 연출력을 증폭시킨다.

[어째서 포기하지 않는 거죠? 저는 엘프고, 당신은 이제 늙은 인간이에요. 이제라도 포기하는 건···]

[엘리샤. 그대는 30년이 흘러도 여전히 아름답구려. 내가 아직 그대를 포기하지 못 하는 이유가 바로 이때문이오. 그러니 다시 한 번만 웃어주시오. 내가 편히 떠날 수 있도록.]

무대 정면을 꽉 채운 영상에서 아름다운 엘프와 노년에 접어든 남자가 애틋하게 대화를 나눈다.

엘프 여인이 말을 할 때는 그녀를 비추고, 남자가 말할 때는 그를 비추며 서로의 표정에 집중된다. 뒤이어 두 사람의 얼굴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각도가 조정되기까지.

처음 찍는 거 맞냐. 무슨 각도 하나 하나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어. 심지어 몰입까지 되니 감탄보다는 헛웃음이 나온다.

'장인과 변태는 종이 한 장 차이라더니···'

이와 더불어 두 사람 간의 애틋한 관계를 표현시키는 것 같은 ost까지. 예상했겠지만 리루스 악단이 직접 작곡한 음악이다.

영상미는 물론이고 음향까지 완벽한 수준이다. 그러나 세실리의 말에 따르자면 이번 공연, 아니 영화의 끝은 카이르의 죽음이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뜻이다. 전생에 비교해서 전혀 꿇리지 않는 퀄리티를 보여주니 지루함은커녕 집중만 잘 된다.

무엇보다 흑백이 아니라 컬러다. 가끔 가다 보면 마법의 존재 때문에 묘한 언밸런스를 보여주던데 영화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마법 때문에 문화가 덜 발달된 건가? 아니면 뭐야.'

나는 속으로 의문을 품으면서도 영화 시청에 집중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에티켓이 자동적으로 생성된 건지 공연장은 고요함에 빠져들었다.

여기서 누군가 기침이라도 한다면 곧바로 시선이 우수수 쏟아질 정도.

간혹 철없는 어린애의 칭얼거림이 들리긴 했지만 곧바로 부모의 선에서 저지당했다. 그게 아니라면 아예 공연장 밖으로 나가거나.

[만약 내가 돌아온다면···]

[··· ···]

[아니. 나중에 말하겠소.]

이제 슬슬 하이라이트가 다가온다. 이와 더불어 팝콘과 콜라를 먹고 싶은 충동이 솟아난다.

영화가 전부 끝난다면 세실리에게 몰래 귀띔이라도 해둘까. 어차피 나를 환생자라 내심 확정짓고 있는데 못 할 것도 없지.

그나저나 카이르는 그렇다 쳐도 엘프 배우는 어떻게 섭외한 걸까. 헬리움에서 비밀리에 진행한 프로젝트라 했으니 엘프를 어떻게든 꼬드긴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마법이나 분장을 이용했다던가. 체리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오랜만입니다, 스승님.]

[너는···!]

이윽고 카이르의 옛 제자, 질투가 등장했다. 질투와 정면으로 맞닥뜨리기 전에 카이르가 악마측 기지에 잠입하여 일신의 무력을 보여준 건 덤.

그리고 질투의 외모는... 소설에서 묘사했던 걸 그대로 차용했는지 내가 상상하던 그대로다.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라는 평범한 색채를 지닌 제논과 달리 금발벽안을 지닌 남자. 외모 또한 활발해 보이는 제논과 달리 무기질적인 얼굴이다.

[설마 악마에게 넘어간 것이냐? 어째서 네가?]

[전 옛 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닙니다. 스승님.]

카이르의 혼란스러운 질문에 대답조차 하지 않고 돌진하는 질투를 시작으로, 화려한 전투씬이 펼쳐졌다.

악마의 힘을 받아내어 카이르의 예상대로 훨씬 강한 질투. 심지어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었기에 카이르가 고전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질투의 전투 방식은 전부 카이르의 가르침을 토대로 나온 것. 카이르는 수 십년 간 갈고 닦은 연륜을 통해 하나 하나 공략한다.

콰광!

"오···"

실시간으로 펼치는 무대에서도 어마어마한 연출력이 돋보이던 매트릭스 극단답게, 영화에서도 그 장점을 원없이 드러냈다.

카이르와 질투가 서로 검을 부딪힐 때마다 미약한 충격파가 일어 주변 환경이 부서지거나, 빗나간 일격이 바위를 깔끔하게 베어내는 등.

전투의 긴박함을 더해주는 듯한 리루스 악단의 강렬한 연주가 합쳐지니 눈을 뗄 수가 없다.

아까도 말했듯이 장인과 변태는 종이 한 장 차이.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시간과 예산을 퍼부우면 어떤 결과물이 나타나는지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잠깐만. 근데 저거 설마 진짜로 싸우는 건가?'

마법으로 CG를 대신한다고 한들 저런 연출은 힘들지 않을까. 그래도 지난 전시회 당시 사크란에게 몸이 꿰뚫린 엑스트라가 있었으니 따로 연구한 모양이다.

내가 이 말을 왜 하는 거냐면, 카이르가 경험과 노련함으로 질투의 한 쪽 팔을 잘라냈거든. 이건 원작에서도 있던 내용이다.

하지만 그런 일격이 무색하게도 질투의 팔은 곧바로 재생되었다. 붉은 피가 아닌, 악마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검은 피를 내뿜으면서.

질투가 인간이 아닌, 악마에 가깝다는 증거이자 스승으로서는 통탄을 금치 못할 장면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게냐? 넌 원래 이런 애가 아니었잖느냐.]

[세상을 싫어하는데 이유가 필요합니까?]

[고작 그런 이유로 악마가 되어 세상을 파멸시키려는 것이냐? 가련하구나! 질투여!]

참고로 질투의 본명은 베히모스. 본래 질투를 상징하는 악마는 레비아탄이지만 그런 이름을 지닌 몬스터가 있어서 수정했다.

카이르는 이후에도 질투와 대적했으나 여기서 최악의 상성이 나타난다. 그건 다름아닌 '젊음' 그 자체.

질투는 원래부터 젊은데다가 악마의 힘을 받아 팔팔하지만, 카이르는 인간 수명의 한계라 볼 수 있는 100세에 가까운 나이다.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강함으로 인해 그나마 젊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지, 한계 자체를 부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질투는 악마의 힘을 부여받아 재생 능력까지 보유한 바, 지구전에서 승리를 점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이야기다.

결국에는···

[잘 가세요. 카이르 선생님.]

푸욱!

본인이 직접 성장시켰던 제자의 검에 가슴이 꿰뚫리게 된다. 검이 가슴을 관통하자 새빨간 피가 카이르의 입에서 한 사발 뿜어져나온다.

"안 돼···"

"아···"

카이르가 검에 관통당하자 공연장에서 안타까운 반응들이 드문드문 터져나온다. 전개 자체도 극적으로 이루어진터라 원작자인 나조차도 움찔할 정도.

[크르릅··· 쿨럭! 쿨럭!]

연달아 피를 입에서 뿜어내는 카이르. 제자는 무릎을 꿇고 저승으로 넘어가려는 스승을 무심하게 내려다봤다.

사실상 고아였던 자신을 키워준 사람이 바로 카이르인데 그는 어떤 마음을 갖고 있을까. 질투는 꽤 복잡한 속사정을 갖고 있으며 원작에서 아직 묘사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승에 대한 일말의 애정은 존재하여 시체를 욕보이진 않는다. 반대로 직접 알븐하임으로 찾아가 카이르의 시신을 전달한다.

[아아···]

카이르의 꺼져가는 의식을 표현하는 것인지 시야가 점점 흐릿해진다. 흐릿해진 시야는 어둡게 변하고, 머지않아 완전한 암흑으로 뒤덮힌다.

그런 어둠 속에서, 카이르의 애달픈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퍼진다.

[단 한 번만··· 단 한 번만 그녀의 미소를 볼 수 있다면···]

원작대로라면 카이르의 인생은 여기서 끝난다. 이후에는 질투가 직접 카이르의 시신을 알븐하임에 놓는 것으로 다음 권이 시작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암전된 시야가 다시 천천히 밝아진다. 마치 잠들었던 사람이 눈을 뜨는 것처럼, 눈꺼풀이 열렸다 닫았다를 반복한다.

[···이르! 카···르!]

시야가 밝아짐과 동시에 먹먹함이 감도는 목소리가 공연장 내에 울려퍼진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모르겠으나 여자인 건 확실하다.

이윽고 눈꺼풀이 완전히 열림과 동시에 보이는 건 화사한 꽃밭과 그 꽃밭에 누워있는 자기자신. 그리고···

[카이르! 이제 일어났어?]

명랑하기 그지 없는 어느 한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 길쭉한 귀와 더불어 밝은 초록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엘프, 엘리샤.

머리에는 꽃으로 만들어진 화관을 낀 채, 카이르가 원하는 '미소'를 띄고 있다.

[빨리 저기로 가자! 저기 가면 더 예쁜 꽃들이 있어!]

"아."

이 장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저 대사를 통해 깨달았다.

이건 본편이 아니라 '외전'에서 나온 카이르와 엘리샤의 아름다운 추억 중 하나다. 두 사람이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면서 사랑을 확인했던 순간.

마지막으로 이 모든 비극의 시발점.

시야의 주인인 카이르는 갑작스러운 옛 추억에 혼란스러웠던 건지, 아니면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는 걸 알려주는 건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오직 엘리샤의 인도에 따라 밝은 빛이 비추는 곳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길 뿐. 엘리샤와 맞잡은 손은 주름 진 노인이 아니라 혈기 왕성한 젊은 남자의 손이다.

[카이르는 내가 웃는 걸 좋아했지? 한 번 볼래?]

엘리샤의 말에 카이르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한다. 엘리샤는 죽기 직전까지 카이르가 그토록 원하던 미소를 짓고 있다.

그 미소를 향해 손을 뻗는 카이르를 끝으로.

화악!

시야가 암전되는 것이 아닌, 환한 빛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 ···"

영화는 끝났다. 허나 그 누구도 섣불리 박수를 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조차도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연출과 퀄리티인데 어안이 벙벙하다는 묘사조차 부족하다.

특히 마지막에 외전에 나온 내용을 잇는 연출은 전생에서도 흔히 보던 기법이다. 주마등이라고, 죽기 직전 가장 아름다운 추억을 보여준다는 이야기.

캐릭터 연구를 얼마나 했으면 저런 인상적인 연출까지 선보일 정도일까. 나는 영화가 끝나고 주변의 라이트가 켜지기 시작하자 홀린듯이 손을 들었다.

짝짝짝­

내 박수 소리가 고요한 공연장에 울려퍼지고.

짝짝짝짝짝!!

곧이어 우레 같은 박수가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문화의 황금기를 알리는 첫 작품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다음 편은 언제 나오려나?'

이제는 내가 기다리는 입장이 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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