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6화 〉 소프트파워(2)
* * *
전시회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공연은 정확히 저녁 8시부터 시작된다. 지난 전시회는 급조된 무대장밖에 없어 야외에서 진행되었지만 지금은 건물이 깔끔하게 세워져 있다.
그리고 예상했다시피 미네르바 제국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준 덕분에 규모가 상당히 크다. 아버지에게 듣자하니 최대 수용 가능한 인원이 만 명 정도 된다고.
공연을 제대로 볼 수 있긴 한 걸까 싶었으나 전생의 몇몇 공연을 보자면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다. 심지어 시력이 나쁘거나 뒷좌석에 앉은 사람들을 위해 원한다면 쌍안경을 지급한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손에 들고 다니기에 용이한 쌍안경을 말이다. 가끔 가다가 한 손에 쌍안경을 들고 공연을 관람하는 사람을 볼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이다.
전생에서도 비싼 건 꽤 비싼데 과학 기술이 덜 발달된 이곳은 오죽할까. 다행히 안경을 비롯한 렌즈가 개발되어 존재할 수 있는 거지, 그게 아니었라면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다.
하지만 더럽게 비싼 건 어쩔 수 없다. 그 렌즈조차 기계의 도움 없이 사람의 손으로 제작해야 되니 휴대용 쌍안경이라 해도 벌벌 떨 수밖에 없는 가격이 나온다.
미네르바 제국은 그런 쌍안경을 무료로 지급해준단다. 역시나 돈이 썩어넘치는 국가답다고 해야할지, 안 되는 건 전부 돈으로 다 메꾸는 중이다.
물론 가격이 비싸니 함부로 훔쳐가지 못 하도록 자리마다 하나씩 배치하고, 마법을 이용해 잠금 장치를 활성화시켰다고. 참고로 마법은 마족의 도움을 받았다.
만약 누군가 몰래 렌즈를 추출하거나 쌍안경을 들고 나간다면 경고음이 울린다고 했으니 도난 당할 걱정도 없다.
남은 건 많은 사람들이 준비한 공연을 관람하는 것 뿐. 평민은 1층에, 귀족은 2층에서 공연을 감상하면 된다고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가족, 지인들은 공연을 보기 적합한 2층 1열에 앉게 된다. 나머지 VIP들은 알아서 앉는거고.
'얼마나 대단할까.'
세실리가 그토록 자신만만해 하던데 과연 얼마나 굉장한 공연을 보여줄까. 지난 전시회와 마찬가지로 매트릭스 극단과 리루스 악단의 합작이라 했으니 기대가 된다.
하물며 그녀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전생의 문물이 계속 떠오른다. 세계에 공통되는 대표적인 인류의 인기 문화 중 하나였으니.
폭발을 비롯한 여러 특수 효과를 마법으로 처리하고, 더 나아가 녹화 또한 마법으로 대체한다면 제작이 불가능한 건 아니다.
심지어 매트릭스 극단 같은 경우는 무대라는 제한적인 환경 속에서도 영화 못지 않은 공연을 한 선례가 수두룩하다. 그래서 더 기대가 될 수밖에.
만약 내가 예상하는 게 맞다면 상황이 역전될지도 모른다. 그들이 제논 일대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내가 그들을 원하게 될 수도 있으니.
그래도 전생과 비교해서는 절대 안 된다. 전생은 수 십년 간 쌓이고 쌓인 노하우들이 축적되어 여러가지 명작을 제작할 수 있었지, 헬리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고 한들 첫 시도다.
문화력이 정점을 찍었던 지구와,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이 세상의 문화를 서로 비교하는 건 실로 잔인한 처사다.
그러니 감상한다는 마인드로 공연을 시청하자. 당장은 세실리와 아르웬을 안내하는 것이 우선이었으니.
"그럼 저녁에 있을 공연을 기대하고 있겠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공연이 될 거예요."
해가 슬금슬금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기미가 보이는 오후 6시. 아르웬은 저녁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헤어졌다.
저택에서 함께 식사를 해결하면 되지 않겠냐고 제의했으나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정중히 거절했다. 자기가 간다면 필시 어색한 상황이 연출될 거라고.
이미 얼굴을 익힌데다가 원로원까지 퇴치했는데 어색함이 있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아르웬의 태도가 워낙 완고하기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뒤이어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때 쯤, 예기치 못한 얼굴들과 만날 수 있었다.
"아이작!"
"어?"
네이비 기사단의 제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내 형제들, 데이브와 니콜이 도착해 있었다. 아무래도 휴가를 받고 온 모양이다.
나는 그들을 보자마자 환한 미소를 띄우며 다가갔다. 둘 다 외모가 받쳐줄 뿐더러 몸매까지 탄탄하니 제복빨을 제대로 받고 있다.
"언제 온 거야?"
"도착한 건 2시간 전 쯤에. 그동안 잘 지냈니? 우리 막내가 못 본 사이에 엄청 컸네."
데이브가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대견하다는 듯이 내 머리를 툭툭 쓰다듬어줬다. 니콜은 몰라도 최근에 그와 만난 건 지난 전시회다.
근 1년 사이에 폭풍성장한 나였으니 데이브의 입장에서는 깜짝 놀라겠지. 나는 친형의 애정어린 손길을 원없이 받으면서 해맑은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릴리가 있다지만 여태까지 막내 사랑을 지극정성으로 받았던 나다.
데이브도 니콜처럼 어리디 어린 나를 어여삐 여겼던 적이 많았기에 형제 간의 우애가 상당히 좋은 편이다.
데이브와 니콜 간의 사이는 음··· 넘어가도록 하자. 그냥 현실 남매다.
"나야 잘 지냈지. 그리고 막내는 내가 아니라 릴리야."
"아, 맞다. 그랬었지."
"둘 다 같이 온 거야?"
"응. 고작 1년밖에 안 됐는데 바뀐 게 너무 많더라. 순간 우리 영지가 맞나 싶었어."
나는 그동안 못 나누었던 형제 간의 이야기를 나눴다. 니콜도 부상을 입었던 한 쪽 팔이 완전히 나은 모습이라 건강해 보인다.
특히 니콜은 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중간중간 뒤를 힐끔거렸다. 아무래도 아델리아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 같다.
이에 나도 뒤를 쳐다보니 뒷짐을 진 채 밝게 웃고 있는 아델리아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도 절친과의 만남에 기쁨을 마음껏 표출하는 중이다.
따지고 보면 아델리아에게 있어서 니콜은 둘도 없는 보물이겠지. 외로웠던 인생에 빛을 내려주었으며 더 나아가 연모하는 남자와 이어지게 만들었으니.
"그런데 아이작. 마족한테 대체 무슨 선물을 받았길래··· 악!!"
중간에 데이브가 눈치없이 이상한 말을 꺼낼 뻔했으나 니콜이 가까스로 제지했다. 실수인 척 데이브의 발을 강하게 짓밟았거든.
당연하게도 데이브는 이게 무슨 짓이냐는 눈빛으로 니콜을 노려봤다. 아무것도 모르는 데이브 입장에서는 화가 나다 못해 어이가 없겠지.
그에 니콜은 아무 말없이 헛기침을 하면서 딴청을 피우더니 나를 바라보면서 넌지시 말을 걸었다.
"일단 회포는 나중에 풀도록 하자. 저녁 식사 준비가 이제 막 끝난 참이거든."
"어··· 알았어."
"야. 그전에 내 발을 밟은 이유나 말해줄래?"
"눈치없이 굴지 마. 대체 그 놈의 눈치는 언제쯤 키울래?"
"또 말 돌리는 거 봐라. 오크처럼 힘만 센 년이."
"뒤질래?"
음. 역시나 언제 봐도 화목한 남매로군. 나는 그들의 싸움을 뒤로 하고 일행과 함께 저녁 식사가 준비된 곳으로 향했다.
마리와 세실리는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할 수 있지만, 아델리아는 전속 메이드라 따로 해결해야 된다.
이걸 직업 특성상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여서 그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아델리아도 별 다른 불만을 가지지 않고 저녁을 해결하러 잠시 자리를 비웠다.
본래라면 식사를 하는 도중에도 내 뒤에 서 있어야 하지만, 아버지의 지시였는지 우리 가족끼리만 식사를 진행했다. 여기에 마리와 세실리를 포함시킨 채.
"그래서 요즘 국경 지대에 문제는 없느냐?"
"이렇다 할 문제는 없어요. 엘프 정찰대는 최근 들어 활동이 뜸해졌고, 야만수인이 좀 걸리긴 해도 중대 사항까지는 아니에요."
"엘프 정찰대는 최근 알븐하임과의 교류가 활발해져서 그렇다 쳐도, 야만수인은 경계하는 게 좋을거다. 그 외에는?"
"그 외에는 딱히 없습니다."
데이브와 니콜의 근황은 특별한 것 없이 매우 평화로웠다. 군인 특유의 투덜거림은 있어도 아버지가 듣기에는 쉬이 넘어갈 수 있는 것들 뿐이다.
다만 부모의 입장에서 본다면 걸리는 게 몇 가지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들이 바로 이성 관계.
부모님은 자식이 무엇을 하던 간에 짝을 찾기를 원하는 법이다. 이건 직업을 가리지 않고 통용되는 이야기다.
데이브와 니콜이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 군에 몸을 투신했다지만 결혼은 사실상 필수라고 볼 수 있다. 이건 시대가 시대이다보니 어쩔 수 없다.
하물며 여자라고 경력이 끊길 걱정도 없다. 네이비 기사단 같이 인력 하나 하나가 중요한 부대에서는 하루 빨리 복귀할 수 있도록 지원을 퍼부어준다.
이 제도가 실현 가능한 이유도 미네르바 제국의 막강한 경제력 덕분이다.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짝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 혹시 마음에 드는 사람은 있니?"
"어···"
"음···"
어머니의 온화한 질문에 데이브와 니콜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없이 눈동자를 데록데록 굴렸다.
아버지를 똑닮은 금색 눈동자가 빙글빙글 굴러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보아하니 두 사람 다 딱히 마음이 없는 모양이다.
이윽고 남매는 어머니를 쳐다보며 동시에 대답했다.
""없는데요.""
"··· ···"
이어서 길고 긴 설교 시간이 이어졌다. 아무리 관심이 없어도 후대는 낳아야 하지 않겠냐. 우리 나이에는 손자를 봐야한다 등등.
"아이작을 보렴. 벌써 아내를 두 명이나 가지고 있잖니? 그런데 너희들은 한 명도 없다니, 엄마가 정말 걱정이 되는구나."
"그건 우리 막내가 이상한 게 아닐까요? 애당초 제논을 어떻게 이깁니까?"
"엄마. 그건 아이작이 망나니라 그런 거야. 저 얼굴로 여자를 못 후리면 그게 더 이상한 거고."
"··· ···"
내 이야기가 나올 줄은 알았다만 이렇게 될 줄이야.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묵묵히 식사에 집중했다.
'빨리 공연이나 봤으면 좋겠네.'
그러는 와중에도 대화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양옆에 나란히 앉아있던 마리와 세실리까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이작이 특수한 케이스이긴 하죠. 그런데 재미있는 건 뭔지 알아요? 저는 물론이고 아델리아 언니도 아이작이 제논이라는 걸 알기 전에 반했어요. 심지어 아델리아 언니는 아직까지 아이작이 제논이라는 걸 모르고요."
"그리고 레오나는 수인의 문화 때문이라지만 수컷으로서 마음에 든다고 했지?"
"와··· 우리 막내, 아니 셋째 능력 하나는 좋네. 어떻게 꼬셨는지 이 형한테 알려줄래?"
"능력은 무슨. 그냥 망나니지. 저 얼굴로 못 꼬실 여자가 있기는 할까?"
"··· ···"
살려줘.
*****
단란하고 화목한(?) 저녁 식사가 종료된 후에는 곧바로 화려한 무대가 펼쳐질 공연장으로 향했다.
본래라면 가족끼리 다 함께 갈 예정이었지만 아버지는 남아있는 서류 때문에, 어머니는 릴리를 남겨두고 갈 수 없다며 자리를 지키셨다.
1년에 단 한 번밖에 없는 공연이어서 정말 아쉬워한 것도 잠시, 이어진 세실리의 말 덕분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걱정 마. 공연은 오늘 하루만 보여주는 게 아니고 며칠 동안 있을 예정이거든."
"며칠씩이나?"
"응. 제논 전시회의 모토는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문화잖아. 그런데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되지."
영상으로 녹화한 거라 언제든지 보여줄 수 있는 모양이다. 나는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공연장으로 이동했다.
공연장은 야외를 이용해 급조했던 1년 전과 달리 심혈을 기울려 건축한 구조물이 반듯하게 세워져 있다.
테르스 왕국에게 뒤쳐질 수 없다는 미네르바 제국의 의지가 한가득 담겨있는 외양의 구조물.
이 건물을 세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장인들이 땀을 쏟았을까. 웅장하기 짝이 없는 모습만 본다면 예상조차 어렵다.
미네르바 제국에서 제대로 작정했구나, 라는 생각이 확실히 와닿는다. 문화가 얼마나 고프면 이런 건물까지 세운 것일까.
웅성 웅성 웅성
건물 내부로 들어서니 벌써부터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귀에 들어온다. 귀족을 위한 길은 따로 있었으나 사람의 숫자가 너무 많다보니 여기까지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공연장의 수용 인원은 약 만 명. 그러나 전시회에 참석했던 사람의 인원은 그보다 훨씬 많았던 걸로 알고 있다.
기껏 지었던 여관조차 포화 상태가 된 탓에 골머리를 앓았다는 소식이 있을 정도. 제논 일대기를 읽는 사람의 수는 귀족보다 평민이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라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세실리의 말마따나 사흘 동안 공연을 펼친다고 했으니 문제는 없다. 공연이야 말로 제논 전시회의 하이라이트임과 동시에 알파이자 오메가.
사실상 전시회가 며칠동안 지속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확실히 하루에 몰아넣는 건 시간이 촉박한 편이다.
이 세상은 텔레포트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나라를 이동하기 위해서 며칠 혹은 한 달 이상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전시회가 며칠 동안 이어진다는 건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는 뜻이니 괜찮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많이 고생하시겠네.'
나는 덩치가 점점 늘어나는 전시회의 규모를 생각하면서 내가 앉을 자리를 탐색했다. 마법을 사용했는지 몰라도 밀폐된 건물 안은 매우 밝았다.
덕분에 자리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았으며, 자리에 도착하자마자 아는 얼굴들을 볼 수 있었다.
'역시 미리 도착해 있었구나.'
미네르바 제국의 황족들과 테르스 왕국의 왕족들. 그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2층 1열에 앉아있었으며 자기들끼리 잡담을 나누고 있다.
그중 레오르트와 눈을 마주쳤는데, 나는 그에게 가벼운 목례만 하고 끝냈다. 레오르트도 가볍게 인사하고 다시 대화에 들어갔다.
"이게 쌍안경인가?"
"응. 한 번 사용해 봐."
자리마다 배치된 쌍안경을 사용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스으윽
슬슬 공연이 시작되려는 것 같다. 건물 내부를 밝게 비추었던 빛이 점점 사그라들면서 어둠이 내려앉는다.
어둠이 가라앉자 웅성거림이 더욱 커지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촛불을 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건물 안을 밝게 비춘 거지?'
이것 또한 마법으로 대체한 것일까. 건물 하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예산이 투입되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이윽고 공연이 시작된다는 걸 눈치챈 군중들의 소란이 조금씩 잦아들고, 완전한 침묵이 가라앉았을 때 쯤.
[단 한 번만···]
느닷없이 중후한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건물을 가득 채움과 동시에.
[단 한 번만 그녀의 미소를 볼 수 있다면···]
파앗!
정면의 시야를 가득 메우는 영상, 아니.
[엘리샤···]
'영화'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