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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223화 (224/763)

〈 223화 〉 반가운 얼굴(1)

* * *

다 된 공모전에 재를 뿌린 사람들은 예상했을지도 모르지만 신성교국 세이비어, 즉 루미너스 교단이다.

내가 평범한 대문호였다면 교단도 납득하면 넘어갔겠지만, 자그마치 루미너스조차 인정한 '성자'였기에 결코 명예를 더럽힐 수 없다나 뭐라나.

내가 보기에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상황이지만 지금 시대 특징이 명예를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명예에 죽고 사는 이들이 이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결국 출판사도 눈물을 흘리며 공모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나 또한 황당하기 그지 없는 상황이지만 다음으로 미루게 되었다.

그냥 편지 한 통을 보내서 잘 설명하면 되지 않냐고? 그게 가능했으면 내가 회귀자니 뭐니라는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겠지. 소 귀에 경 읽는 수준이 아니다.

루미너스에게 직접 부탁해도 큰 의미는 없다. 루미너스는 신탁을 내리는 '신'이지 누군가의 부탁을 대신 전달하는 전령이 아니었으니까.

신들은 필멸자에게 미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신탁을 내리거나 길을 제시할 뿐, 직접적인 간섭을 하지 않는다. 직접적인 간섭이 가능했다면 세상에 악인이 왜 있고 죄를 짓는 사람이 왜 있겠는가.

너무 짜증이 난 나머지 휴재라도 때릴까, 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어이 없게도 전부 수긍하는 분위기여서 잠깐 뒤로 미뤘다. 공모전은 천천히 하고 일단 집필에만 집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게다가 휴재 때문에 교단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 루미너스를 봐서라도 참아야지. 가끔 가다가 본인의 실수로 엿 먹이는 경우가 있을 뿐, 선한 분이셨기에 미안해진다.

'빨리 빨리 써야 미래가 편해진다.'

모든 일과가 끝나고 난 후의 숙소, 나는 17권을 집필하면서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2학년이 되면서 문학생 숫자가 급증하여 여러모로 바쁜데다가 만나야 되는 사람도 늘어났다.

이로 인해 집필을 할 시간이 현격히 부족해졌으나 어떻게든 시간을 짜내고 또 짜내고 있다. 그렇지 않는다면 내 미래가 어떤지는 불 보듯 뻔하니까.

레오나가 내 부인으로 확정된 마당에 신성력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받기 위해서는 제논 일대기 집필에 박차를 가해야 된다. 안 그러면 먼 미래에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마리와 세실리까지는 괜찮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자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발화되어 체력과 근력이 나날이 상승 중이었으니.

하지만 3명부터는 점점 힘들어질 것이다. 심지어 레오나뿐만 아니라 아델리아도 고려해야 되니 부담감이 한층 짙어질 터.

게다가 세실리의 악주기, 레오나의 발정기가 겹친다면 빈말이 아니라 격한 전투를 치뤄야 될테니 미리미리 대비해야 뒷일이 편해진다. 유비무환이라는 사자성어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여자가 점점 늘어나네. 나 진짜 바람둥이인가?'

원래 한 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어렵지 않다고. 세실리를 받아들일 때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으나 그 다음부터는 이상하리만큼 쉬웠다.

이 세상의 사고방식에 점점 적응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실 나에게 바람둥이 기질이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마리도 나에게 여자가 늘어나도 불평불만만 할 뿐, 이유가 충분하다면 전부 받아들였다. 물론 본인이 언제나 첫번째라는 건 누누이 강조했다.

나 또한 언제나 그녀가 첫번째여서 아낌없이 애정을 쏟아붓고 있다. 물론 세실리도 섭섭해 할 수 있으니 적절하게 나누고 있다.

'인간에다가 마족, 그리고 수인까지... 무슨 종족마다 있네. 이러다 나중에 엘프까지 끼어드는 건 아니겠지?'

정말로 쓸데없는 생각이다. 세실리는 그렇다 쳐도 레오나는 순전히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만난 것 뿐, 그게 아니었다면 서로 모르고 지냈겠지.

엘프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알고 있는 엘프는 아르웬, 엘레나, 신디, 시리스 이 네 명밖에 없다.

...하나 같이 전부 여성이라는 점이 걸리고 있지만 이성적인 관계는 절대 아니다.

'그러고보니 아르웬이랑 연락을 안 하고 있었네.'

나는 집필을 잠깐 멈추고 아르웬을 떠올렸다. 그녀는 겨울 방학 이후로 얼굴은커녕 서로 연락조차 주고 받지 않고 있다.

아르웬은 아르웬대로 바쁠 수밖에 없는 것이, 수 백년간 알븐하임을 지탱했던 원로원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

더군다나 아르웬의 통치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닐 뿐더러 그녀는 대외적으로 제논과의 유일한 연결고리로 알려진 상황.

주변 국가들의 압박 내정 둘 모두 신경 써야 하니 머리가 터질 듯이 아플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어서 여태까지 가만히 있었다.

'조만간 편지 한 통 써야겠다.'

아무리 바빠도 연락을 해야 섭섭하지 않겠지. 특히 지금처럼 힘든 시기에는 따스한 위로 한 마디가 큰 힘이 된다.

아르웬은 여태껏 몇몇을 제외하면 믿을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편지 하나로도 큰 위안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너무 안 보긴 했다.

그래도 집필은 꾸준히 해야지. 나는 혹여 잊어버릴까봐 전개를 정리했던 노트에 '아르웬에게 편지'를 기록하고 다시 집중에 빠져들었다.

'17권부터는 진과 릴리로 넘어가야지.'

17권의 내용은 제논이 아닌, 진과 릴리의 이야기에 치중돼 있다. 둘 사이의 알콩달콩한 로맨스와 동시에 아련함을 보여줄 계획이다.

주인공의 활약상은 언제나 눈에 띄는 법이지만, 주인공 못지 않게 인기를 끄는 조연들의 활약도 필수 요소다. 더군다나 진과 릴리의 애달픈 스토리는 많은 독자들에게 응원을 받는 중이다.

차별받는 종족인 마족과 신의 보호를 받는 성녀의 이야기. 이 소재만 해도 로맨스물 몇 권 뚝딱이다. 나는 그걸 제논 일대기에 넣는 중이고.

'수인도 거의 3권 분량이었으니까... 교국 스토리도 그에 비슷하게 써야겠지. 그리 길지는 않겠다.'

참고로 17권의 결말은 독자들을 미치게 만들 것이다. 연인 사이에서 정말로 가끔 나올만한 상황이었으니.

그 왜, 간혹 보면 있지 않나. 축제 때라 여관의 투숙객이 너무 많이 몰려와서 남는 방이 '하나'밖에 없다는 전개. 그 방에서 진과 릴리가 함께 자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으나 정작 고백을 하지 못 하는 두 남녀가 쩔쩔매다가 부끄러워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두 사람 다 이성과 한 방에서 자는 건 처음이라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렇게 진이 참지 못 해서 문 밖에서 자겠다고 일어나려는 순간, 릴리가 그의 팔을 살포시 붙잡는 것이다.

당황한 진이 릴리를 쳐다볼 때, 릴리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면서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한다.

'호위 기사의 본분을 잊지 말라고.'

어머니를 비롯한 진­릴리파 독자들이 좋아 죽을 전개다. 그러나 전에 말했듯이 나는 이들을 최후의 최후에서야 이어줄 계획이다.

어쩌다 보니 첫날밤을 보내게 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지만, 이렇게 흘러가면 작품이 로맨스가 되어버린다. 다시 말하지만 제논 일대기는 모험물. 즉, 언제 어디서든 위기가 닥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분위기가 묘해지며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지는 순간, 난데없는 습격이 이루어진다. 과정은 좋았으나 결말은 와장창.

17권은 습격자의 정체에 대한 단서를 알아내는 것으로 끝이다. 교국의 성녀를 대놓고 습격할 정도로 뿌리가 썩었다는 걸 의미하고 있다.

'교국은 여전히 마족을 차별하니까.'

이건 현실이 아니라 책 속을 의미하는 거다. 제아무리 사크란이 영웅적인 희생을 보여줬다지만 그건 독자들의 시선이지 작품 내에서는 아니다.

그나마 다행히 진은 어릴 때부터 릴리와 함께 지냈던지라 시선이 덜하지만 그럼에도 썩 좋다고 말할 수 없다. 특히 추기경 중 한 명이 대놓고 진을 욕할 정도이니 말 다했다.

'하지만 그 추기경은 진정한 성직자고, 사실 진을 옹호한 추기경이 악마와 내통한 사람이지.'

마족을 향한 차별적인 시선을 보낼지언정 신을 향한 신앙심은 진심인 성직자와, 가면을 쓰면서 성직자 행위를 하는 기만자. 이 둘을 헷갈리게 함으로써 독자들에게 반전을 선사할 계획이다.

모든 사건이 종료되면 진을 싫어했던 추기경조차 본인의 실책을 인정하며 전적으로 신뢰하게 된다. 겸사겸사 연합국에도 가담하고.

이와 더불어 진의 진정한 정체, 식탐의 자식이라는 떡밥까지 날릴 것이다.

'그런데 진짜로 비슷한 놈이 있는 거 아니야?

17권부터 18권까지의 내용은 대략 이렇지만, 문제는 바로 현실이다. 이제는 나조차도 헷갈릴 정도인데 이건 진짜 '있을법한' 이야기라 멈칫할 수밖에 없다.

제논 일대기 속 교국은 악마와 내통하는 추기경이 있을 정도로 심각하다. 신이 비호 아래 건국된 나라에 어떻게 악마가 기어들어올 수 있냐고, 어떻게 추기경이 악마와 내통할 수 있냐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알아야 하는 것이, 신은 특수한 경우(신전)가 아닌 이상 직접적인 간섭을 하지 못 한다. 그냥 그 추기경이 신에게 기도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솔직히 추기경의 자리에 오를 정도로 건실했는데 그 누가 의심을 품겠나. 하물며 권력과 권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타락하기 쉬운 법.

너무 뜬금없는 반전일 수도 있으니 군데군데 복선도 꾸준히 넣을 계획이다. 가령 최근에 너무 바빠서 기도조차 올리기 힘들다거나, 중간중간 신을 의심하는 기색을 보인다거나 등등.

정말로 건실한 성직자라면 신을 향한 기도는 절대 빠져서는 안 되며 의심을 품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추기경이라는 직위가 그걸 모두 가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교국이고 추기경이고 뭐고 잘 모르는데.'

일단 국민들의 생활상 자체는 여느 나라와 비슷하다고 들었지만, 교황청 내부의 사정은 잘 모르고 있다.

신전에 가서 몇몇 사람들에게 자문을 받고 있지만 그건 신전의 이야기지, 교황청과 관련된 건 거의 없다.

그나마 자문을 구할만한 사람이 딱 한 명 있긴 있다. 지난번 나에게 씨앗을 달라고 간청했던 추기경이자 대심문관, 케이트.

그녀에게 부탁하면 되지만 또 씨앗을 달라고 할까봐 무서워서 보류하는 중이다.

'좀 더 나은 퀄리티를 위해서라면 부탁을 해야 하긴 해야겠지.'

이전에 언급했지만 전투는 몰라도 고증만큼은 철저히 지키고 싶다. 어차피 질문 몇 개만 하고 끝날텐데 씨앗 발언은 너그럽게 넘어가줄 용의가 있다.

나는 거의 반 이상을 집필한 것을 잠깐 멈추었다가 시계로 시선을 옮겼다. 현재 시간은 약 3시 30분.

오늘 엘레나가 바빠서 수업이 모두 끝나자마 숙소로 돌아왔던지라 여유 시간이 많았다. 이대로 케이트에게 찾아갈까 생각했으나 접어두었다.

케이트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를 뿐더러 그녀도 현재 구호 활동을 펼치느라 바쁠테니까.

씨앗을 달라고 재촉했던 때와 달리 그녀는 건실한 성직자다. 이상한 곳에 상식이 뒤틀려도 본분만큼은 잊지 않는 진짜 성직자.

가끔 가다가 그 성이 다른 의미의 성이 아니냐는 의심을 품었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게 보였다.

똑똑똑­

하염없이 시계만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 숙소 문을 두드렸다. 그에 시계에서 시선을 떼고 문쪽을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 케이트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설마 진짜로 그녀인 건가. 살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확인이 우선이다.

"네. 나가요."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지금 이 시간대에 숙소로 찾아올 사람은 몇 없을텐데 궁금해진다.

정말로 케이트인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씨앗 이야기는 곧바로 집어치우고 도와달라고 부탁해야지.

끼익­

"누구세... 어?"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시야에 잡힌 얼굴을 보며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검은색 바탕의 제복 모자를 착용했으나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가 훨씬 눈에 띄었다. 또한 허리까지 길게 길렀던 남색 머리카락은 목덜미까지 짧게 커트한 상황.

여느 때처럼 포니테일로 묶지 않아 잠깐 헷갈렸지만, 그럼에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이다.

"누나?"

"안녕. 아이작."

내 친누나이자 한 달 전 네이비 기사단 입단 테스트를 하러 떠난 여자.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어?"

니콜이 특유의 밝은 미소를 띄며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나야 잘 지냈지! 그런데..."

내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맞이한 것도 잠시, 나는 곧바로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게, 시선을 내리자 그녀의 팔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으니.

니콜도 내 시선이 향한 곳을 눈치챘는지 어색한 미소를 띄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걱정 마. 이정도 부상은 예상했으니까."

그녀는 오른팔에 부목을 대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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