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202화 (203/763)

〈 202화 〉 15권(3)

* * *

애니머즈로부터 급히 돌아온 사절단이 알려준 내용을 정리하자면 대략 이렇다.

반란, 혹은 쿠데타가 발생하여 대족장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대족장의 자리에 앉은 수인이 통치를 하다가 또다시 '홀름강'을 신청받아 목숨을 잃었다고. 이 탓에 대족장의 자리는 공석이며 그걸 두고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국가가 세워진다면 권력층이 생기고, 그 권력층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들이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신분 제도 자체가 불합리와 불평등의 극치를 달라고 있으니.

하지만 권력층이 통치를 잘하고 부패하지 않는다면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은 현격히 적어진다.

설령 권력에 눈이 멀어 반란을 일으킨다고 한들, 정당성과 명분이 부여되지 않은 채로 진행된다면 그 국가는 멸망의 길로 이어진다.

가장 큰 예시로, 테르스 왕국에 발발했던 제이로스 혁명이 있겠다. 테르스 왕국은 문화강국이며 알븐하임 못지 않게 아름다운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허나 제이로스 혁명 이전에 문화, 그러니까 예술은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평민들에게 문화는 허락되지 않았으며 문화의 나라라는 평가도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만약 평민이 예술을 한다? 곧바로 탄압하고 감옥에 처박아 둔다. 심할 경우 양 손을 잘라버리는 형벌까지 행하여 끔찍한 고통을 주게 된다.

이걸 본 몇몇 양심 있는 고위 귀족이 상층부에 항의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강등 및 신분 폐지.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제이로스 혁명이 발발했다.

비록 제이로스 혁명은 상층부를 완전히 엎어버리진 못 했으나 왕이 바뀌었고, 더 나아가 예술이 평민들에게도 스며들었다. 그 덕분에 테르스 왕국이 문화의 나라라는 칭호까지 얻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칭호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의 피와 땀이 흘렀는지 모른다. 이처럼 반란은 그 자체만으로도 그 나라의 역사를 단편적으로 알려준다.

[전통에만 충실한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 보여준다. 문명이 이룩된다면 그 문명을 해치는 전통은 폐기해야 된다.]

[굳이 폐기가 아니더라도 융퉁성이 있어야 혼란에 빠지지 않는다.]

[히크는 문화와 전통을 통해 수인을 하나로 합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문화와 전통이 다시 한 번 애니머즈를 분열시키고 있다.]

애니머즈의 쿠데타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보면 되지만 약간 다르다. 사절단이 알려준 내용에 따르자면 근 10년 동안 대족장이 여러번 바뀌었다고.

'흘름강'이라는, 아주 독특한 문화로 인해 왕의 자리가 공석이 되어 나라가 혼란스러운 상황이라고 한다.

듣자하니 원래의 대족장은 어질고 현명하여 애니머즈를 잘 통치하고, 더 나아가 주변 국가와 활발히 교류했으나 지금은 아니다. 대놓고 폭정을 부리고 여색을 탐하는 탓에 불과 2년도 지나지 않아 홀름강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후로 대족장의 자리를 두고 애니머즈는 두 세력으로 분열되었는데 '정통성'을 중요하게 여기며 레오나와 같은 사자 수인들이 중심인 세력이다.

반대로 국가의 기반을 뒤흔든 전통을 폐기하자며 의견을 내세우고, 더 나아가 대족장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해야 된다는 쪽이다. 이 세력의 중심은 딱히 없지만 대부분 전통을 철폐하자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다시 말해 앞뒤가 꽉꽉 막히고 정통성에만 충실한 왕과 그 신하들의 대립이라고 볼 수 있다. 대족장의 자리가 공석인 이유도 이 두 세력의 적절한 합의점을 찾기 못 했기 때문이다.

홀름강이 무분별하게 남발된다는 이유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명분이 충족되기 때문이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으니 홀름강이 수도 없이 발생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전통에 흠집이 발생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 애니머즈의 근간이 뿌리채 뽑힐 터. 두 세력도 바보가 아니어서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려는 걸 어떻게든 막고 있었다.

물론 제논 일대기 15권이 발매되고나서 무위로 돌아갔지만. 아마 저쪽에서도 나를 찾기 위해 벼르고 있지 않을까.

먼 나라의 이야기지만 나와 간접적인 관계가 있는 이상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루미너스 님.'

[말하렴.]

'저 정말로 기억을 잃은 회귀자나 예언자 같은 건 아니죠?'

[... ...]

이제는 몇 시즌 홈런인지도 모를 타율에 나 스스로조차 의심스러워서 루미너스 신전에 직접 찾아갔다.

기사에서 나온 추측처럼 제약이 있기에 기억을 하지 못 하는 게 아닐까, 라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의심. 처음에는 헛소리라 치부했으나 연달아 이런 사건사고가 터지다보니 의심의 싹을 틔웠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그래도 세상에는 만약이라는 게 있다.

애니머즈와 관련된 일이 터진 탓에 주변인의 시선도 묘해졌다. 당장 마리가 나에게 너 정말로 미래인이야? 라는 질문을 했으니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힐 것이다.

[절대 아니란다. 이건 내 신성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 너는 지구에서 이곳으로 넘어온 영혼일 뿐, 그저 평범한 소설 작가란다.]

'그런데 신간마다 이런 일들이 터지는 걸까요? 이걸 정말로 우연이라 할 수 있는 건가요?'

[...솔직히 내가 봐도 어이없는 건 마찬가지란다.]

'... ...'

자그마치 신조차 이건 좀... 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황당하긴 해도 덕분에 신뢰도가 팍팍 상승했다.

사실 루미너스에게 이리 따지는 것도 반쯤은 하소연에 가깝다. 세상이 나를 가만 두지 않는다고, 뭐만 했다 하면 억지로 끼워맞추니 눈물이 날 지경이다.

시간이 흐른다면 점차 나아질 거라고 루미너스가 조언해줬으나 이대로 가다간 답도 없어진다. 어떻게든 해결 방안을 마련해 놓아야 되는데...

'...어떻게 안 되겠죠?'

[아니면 며칠 전으로 회귀해서 싹 갈아엎는 건 어떠니? 지금의 신성력이면 2주 전으로 회귀가 가능하단다.]

'아뇨. 사양할게요. 스토리를 싹 갈아엎기도 싫고 절박한 것도 아니어서.'

회귀는 절박한 상황에서나 할 법한 행위지,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냥 내가 참고 말지.

게다가 스토리를 갈아엎어도 사람들은 또 이상한 곳에서 찾아낼 게 분명하다. 현재 상황에서는 어떻게 되었던 간에 무슨 일이 터질 것이다.

그러므로 당장 내가 할 일은 하나다.

'...대신 신성력 좀 부탁할게요. 최근 피곤한 일이 많아져서.'

[그 아이들이 많이 괴롭히니?]

'그것도 있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좀 피곤해요.'

루미너스에게 신성력을 받아 며칠동안 쌓이고 쌓였던 스트레스와 피로를 해결해야 된다.

현재 상황도 상황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마리와 세실리가 나를 골고루 괴롭히고 있다.

간신히 타협을 봐서 망정이지, 지난번에는 서로 자기가 먼저 하겠다고 싸웠던 탓에 곤란을 겪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리나가 얼굴을 붉히는 건 덤이고.

걔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몰라도 나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얼굴을 붉힌다. 근래에는 잦아졌다지만 마리나 세실리 둘 중에 신호를 보낼 때마다 은글슬쩍 어디로 갈 거냐고 질문한다.

설마 그녀에게 그렇고 그런 취향이 있는 건 아니겠지만 왠지 기분이 미묘해졌다.

[그 아이들 말고 더 있을텐데... 벌써부터 이리 힘들어 하면...]

'네? 뭐라고요?'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리고 얘야. 힘들다 해서 무턱대고 신성력을 받으러 오는 건 추천하지 않으마. 체력을 늘려야지 신성력으로 메꾸면 아무 의미가 없어지니까.]

'저도 노력하고 있는데 단기간에 체력이 늘어나기는 힘들죠. 당장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음...]

루미너스는 내 말에 고민하는 기색을 드러내더니 한 가지 방법에 대해 입을 열었다.

[단기간에 체력을 늘리는 방법이 하나 있긴 있단다. 특히 신성력이 무한에 가까운 너에게 아주 적합한 방법이겠지.]

'어? 알려주실 수 있어요?'

[알려주는 건 문제 없다만... 약간의 변화가 생길 거란다. 모라의 취향에 따라 네 머리가 길어진 것처럼, 이 방법을 사용하게 되면 네 몸에서 라일락 향기가 나겠지.]

'아. 그거 들어본 적이 있어요.'

신들이 총애하는 신자는 다양한 변화를 맞이한다. 대표적으로 몸에 나는 체향이 있다.

루미너스는 신화에 따르면 라일락 향기를 좋아하며, 그에게 총애를 받으면 받을수록 신자에게서 라일락 향기가 난다. 이 탓에 루미너스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라일락 향수를 사용하는 문화가 있다.

이밖에도 모라는 복숭아 향기를 풍기고, 남매의 어머니이자 창조와 자연의 여신인 하르트는 뿜내는 기운 자체가 달라진다.

'설마 루미너스 님도 모라 님처럼 이상한 짓을...'

[난 그 철부지와 다르단다. 라일락 향기만 해도 충분하거든.]

역시 남매는 남매인 건지 모라를 철부지 취급한다. 이렇게 보면 정말 인간적인 신들이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그 방법이라는 게 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혹시 성기사들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니?]

'성기사라면...'

성기사는 모두들 알다시피 교단에서 무력을 담당하는 인력이다. 직접적으로 무력을 사용하기에 치유보다는 신체 강화 쪽에 신성력을 사용하며, 대심문관이자 추기경인 케이트가 성기사다.

보통 성기사는 일반 성직자보다 훨씬 높은 계급을 가지고 있다. 기도까지 하면서 개인 수련까지 게을리 하지 않으니 문무겸비 그 자체이기에 등급이 높은 것이다.

또한 성기사는 마력뿐만 아니라 신성력까지 사용하기에 일반 기사보다 배는 강하다. 소문으로는 케이트가 엘프 전사장과 맞먹는 실력을 가졌다고 했으니 얼마나 강한지 대충 감이 잡힐 것이리라.

[성기사가 그렇게 강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신성력이지. 신성력을 사용한 신체 강화는 그 몸이 기억하게 되거든. 일반 마력을 소모하는 것보다 신성력을 소모하는 체력 단련은 효율부터 크게 차이가 난단다.]

'전 신성력을 사용할 줄 모르는데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신성력과 마력은 서로 섞이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니까. 마력이 곧 신성력이라 보면 된단다.]

'진작에 말해주시지.'

[얘는. 아무튼 간에 받아들이겠느냐?]

'네.'

어차피 신성력도 무한에 가까이 받을 수 있는데 이걸 포기하면 멍청이다. 라일락 향기가 강하게 난다는 것 또한 문제가 없다.

오히려 체향이 꽃향기처럼 달콤하게 바뀌니 이로운 점만 있다. 애당초 향수도 안 뿌리는 스타일이다.

[...그 아이가 찾기 더 쉬워지겠지만.]

'네?'

[아무것도 아니란다.]

이후로 신성력을 받고 개인 예배실 밖으로 나왔다.

"킁킁. 킁... 이건 좀 심하지 않나?"

강렬한 라일락 향이 내 몸에서 진동하는 것을 생생히 겪었다.

*****

끼익­

아이작이 개인 예배실에서 나온지 얼마 지나지 않을 때였다. 바로 옆에 있던 개인 예배실 문이 열리더니 한 여성이 모습이 드러났다.

산뜻한 들판처럼 빛나는 황금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땋고,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인상적인 미녀였다.

한없이 자애로워 보이는 인상에 시골에서 지내고 자란 소녀처럼 순수한 미모를 갖고 있는 여자.

루미너스 교단이 주로 착용하는 백색의 성복을 착용하고 있어 그녀의 몸매를 가감없이 표현하는 중이었다.

풍만한 가슴부터 시작해 잘록한 허리와 넓은 골반, 마지막으로 옆트임으로 인해 드러난 뽀얀 허벅지까지.

그녀의 이름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악마 숭배자의 뚝배기를 메이스로 박살내던 추기경이자 대심문관, 케이트 루이즈 안젤리카.

겉보기와 달리 이단과 악마에 관해서는 잔혹한 성정을 지닌 것으로 유명한 성기사다.

"...응?"

케이트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초록빛 눈동자를 깜빡이며 코를 벌름거렸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으나 강렬한 라일락 향기가 코를 비집고 들어왔다.

이어서 그녀가 연신 향기를 맡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동안, 케이트의 곁으로 한 여신도가 다가왔다.

"기도는 모두 끝나셨나요, 케이트 추기경님?"

"킁킁. 아, 네. 안나 성도님. 그런데 이 냄새는..."

"아아. 이 냄새 말이에요?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누가 라일락 향수라도 뿌리고 온 모양이에요."

향수라... 여신도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케이트는 속으로 아니라고 여겼다. 왜냐하면 이건 인위적으로 만든 향기가 절대 아니었으니까.

인위적으로 만든 향수와 자연 그대로의 향기를 구분할 수 있던 이유는 간단하다. 신에게 총애를 받는 몸인만큼, 그녀에게도 강한 라일락 향기가 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예배실 밖에서 나는 그 향기와 자신한테서 나는 향기가 놀라우만치 똑같다. 다시 말해 이 신전을 다니는 누군가가 루미너스에게 총애를 받고 있다는 뜻.

이에 케이트는 세상 누구보다 자애로운 성녀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여신도에게 물었다.

"향기가 아직 짙은 걸 보아하니 방금 전 지나친 것 같은데 누가 여기에 온 건가요?"

"아뇨. 오지는 않았고 옆 예배실에서 한 명이 나오긴 했어요. 이름은... 아이작이라고 했던가? 빨간머리에 금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남자 분이셨죠."

"아, 그렇... 잠깐만요. 빨간머리에 금색 눈동자라 하셨나요?"

"네."

"빨간머리와 금색 눈동자라..."

케이트는 뭔가 거슬리는 게 있는지 턱을 만지며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빨간머리와 금색 눈동자의 조합은 전세계를 둘러봐도 흔하지 않다.

애당초 빨간머리 자체부터가 세상에 몇 없는 편이다.

'신탁에서는 분명...'

루미너스가 내려준 신탁을 곰곰이 되새기던 케이트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신탁이 워낙 애매하여 섣불리 판별하기가 어렵다.

애꿎은 사람만 지목할 수도 있으니 직접 확인하는 것이 우선. 그녀는 여신도에게 질문했다.

"그 성도분의 성함이 아이작이라고 했나요? 어디에 거주하는지는 알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교복을 입은 걸 보면 헤일로 아카데미 학생인 것 같은데... 아마 그럴 거예요."

"아카데미라... 알겠습니다."

뒤이어 케이트는 친절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네요."

아랫배에 슬며시 손을 얹으면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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