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화 〉 15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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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문제도 없다. 언듯 본다면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뒤가 구린 사람들, 특히 정치인이 저런 말을 하면 신빙성이 0에 수렴하게 된다.
여태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뜬금없이 저런 말을 한다면 그 누구라도 의심을 할 것이니.
더구나 특정 몇몇이 조용한 것도 아니고 나라 단위로 조용하다가 저런 반응을 보였으니 심상치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애니머즈는 300년 전 히크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건국되었으나 이후로 딱히 큰 움직임을 보인 적이 없었으니까.
내실을 다지기 위함도 있을테지만 수 십년도 아니고 수 백년이 흘렀으니 이제는 외부로 눈을 돌릴 때가 되었다.
만약 남들의 눈을 피하여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면 다른 나라 입장에서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는 셈이니 서둘러 인력을 급파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아무런 일도 없는 것인가? 미네르바 제국, 테르스 왕국 등. 많은 나라가 애니머즈에 사절단을...]
[역사적으로 문명이 세워지면 자연스레 문화가 발전하는 법. 정치 또한 마찬가지이며 애니머즈는 그 현상을 겪고 있을 것이다.]
[정치의 연장선은 전쟁. 그 눈길이 외부로 돌아가는 것을 막아야 된다.]
애니머즈의 '아무런 문제도 없다' 이 한 마디에 세상은 또다시 들썩거렸다. 정말로 애니머즈 내에 정치적 혼란이 발생하고 있다면 다른 나라 입장에서는 경계해야 되는 상황이다.
특히 인간들은 종족 전쟁 당시 수인을 종족 단위로 학살한 전적이 있으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애당초 말 같지도 않은 명분을 구실로 전쟁을 하는 시대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내부 사정을 알아야 대비를 할 수 있다는 의미. 다소 긴장되는 상황에 직면했다고 볼 수 있다.
제논 일대기 15권이 발매되고 아무런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가 눈덩이가 되어 점점 크기를 부풀리기 시작했다.
[제논 일대기에 나온 이야기처럼 정치적 문제로 대족장이 살해된 것인가?]
[우려가 점점 현실이 되는 중이다. 설마 제논은 이것까지 예상했나?]
[건국된 이후로 마땅한 움직임이 없던 애니머즈. 호전적인 수인의 종족 특징으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저마다 다양한 예측을 쏟아내고 있을 때, 당연히 내 쪽에도 시선이 쏠렸다. 일단 대략적인 의견은 이렇다.
제논 일대기에 나온 것처럼 정치적인 문제로 토사구팽당했던 수인이 돌아와 대족장에게 홀름강을 신청했다. 그 결과로 대족장은 공석이 되었으며 이 문제로 인해 내부적으로 혼란을 겪는 중이라고.
사실 전통과 문화는 종족을 결집시키기 위해 중요한 매체를 하지만, 수인은 다소 야만적이라고 할 수 있다.
'홀름강'은 승패의 여부에 따라 상대방의 모든 것, 그러니까 목숨마저 손아귀에 쥘 수 있는 문화였으니. 부족 단위로 흩어져 있다면 모를까, 국가가 건국된 상황에서는 여러모로 수많은 문제점을 낳는다.
제논 일대기처럼 누군가 대족장, 그러니까 왕에게 홀름강을 신청하여 승리를 점하게 되면 그 이후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국가의 기둥이 시시때때로 흔들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국가를 위해 전통과 문화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유지하여 결국 원래대로 돌아갈 것인가?]
[수인은 홀름강을 창조와 자연의 여신, 하르트가 지켜보고 있다며 신성시 여기고 있다.]
[문화와 전통을 유지하는 건 좋다. 하지만 알븐하임의 원로원을 보듯이 전통에 고집을 부리면 결국 도태되기 마련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전통과 문화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전통과 문화를 유지하며 안정적인 삶을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그 전통과 문화 속에 담겨있는 불합리와 불평등을 적절하게 해소하여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때마침 알븐하임과 엘프라는 좋은 예시도 있었으니 수많은 학자가 이를 토대로 각자 의견을 제시했다. 혼혈 사태처럼 또다른 사회적 현상을 야기했다.
"이건 또 뭐지."
나는 신문에 나온 기사들을 보며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웬일로 잠잠하다 했는데 자기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는 중이다.
아직 애니머즈로 급파한 사절단이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이미 문제가 있다는 걸로 확정지은 모양이다. 그것도 제논 일대기에 나온 내용을 토대로 말이다.
전이었다면 미치고 팔짝 뛰었겠지만 이제는 허허 웃으며 넘어갈 수 있다. 사실상 반포기 상태에 가깝다.
'레오나한테 한 번 물어봐?'
마음 같아서는 이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레오나에게 묻고 싶다. 정말로 애니머즈에 문제가 있는 것이냐고.
애당초 그녀는 스스로가 사족이라는 부분에 자긍심을 갖고 있다. 헌데 그런 자긍심을 억누르고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레오나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가 신문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스레 참견했다가 의심을 받을 수 있으니 지금으로서는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지금은...'
대충 밥이나 먹으러 갈까. 현재 내가 있는 곳은 연구실.
엘레나는 다른 교수와 의논할 게 있다며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고, 신디는 내 맞은편의 소파에서 퍼질러 자는 중이다.
학위를 따도 피곤한 건 여전한지 신디의 눈 밑의 다크 서클이 전보다 더욱 진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깨우기에는 미안하니 일단 나 혼자서 식사를 해결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끼익
신디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문을 열어 연구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어? 체리?"
"아, 안녕하세요..."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체리와 딱 마주치게 되었다. 벛꽃을 연상시키는 분홍 머리와 생기가 하나도 없는 눈을 보자마자 딱 알아챘다.
나는 연구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녀를 보고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대충 시계를 확인하니 수업이 끝날 시간이긴 하다. 그러나 내가 나오는 타이밍에 정확히 문 앞에서 기다리는 건 좀 이상하다.
"무슨 볼 일이라도 있어서 찾아온 거니?"
"아뇨. 제... 아니, 아이작 조교님이랑 같이 밥 먹으려고..."
"나랑?"
"네. 아이작 조교님은 12시 30분 전후로 식사를 하러 가시잖아요? 그래서 수업이 끝나자마자 기다렸어요."
"... ..."
뭐지. 이 섬뜩함은. 나는 체리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하자 흠칫거렸다.
실은 체리가 연구실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일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처럼 내 생활 패턴을 언급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정말로 이러다가 스토커가 되는 게 아닐까. 체리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고려하자면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응?"
나는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느낌도 잠시, 그녀가 소중히 안고 있는 종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얼굴과 눈빛에만 시선이 팔려있던 탓에 뒤늦게 눈치챘다.
그때 갈기갈기 찢기고 발자국이 남아있던 종이가 아니라 새로 작성했는지 매우 깨끗한 원고지다. 아무래도 내가 말했던대로 수정 작업을 거친 모양.
이에 그 종이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체리. 혹시 그거 수정한 거니?"
"네... 오늘 아이작 조교님에게 보여드리려고... 헤헤."
부끄럽다는 듯이 웃으니 정말 예쁘긴 했지만 눈빛이 죽어버려 음습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래도 인형처럼 딱딱하게 움직이던 때와 비교하자면 확연히 나아진 모습이다. 그때는 정말로 살아움직이는 시체 수준이었으니.
나는 점점 활기를 띄는 체리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가 그녀와 함께 식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겸사겸사 원고지도 확인하면 될테니 문제는 없을 것이리라.
"알았어.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가자. 다 먹고 나서 확인하면 되겠지."
"네에... 감사합니다."
"감사하면 나중에 밥이라도 사줘."
농담 삼아 그리 말한 거지만 밥은 내가 모두 사줄 생각이다.
회생 불가 수준으로 짓밟혔다가 겨우겨우 싹을 틔운 꿈나무에게 이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겠나.
체리는 내 농담에 눈을 느릿느릿 깜빡이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밥 대신 더 좋은 거 줄 수도 있는데."
"뭐?"
"밥 대신 더 좋은 거 줄 수도 있어요."
"그래? 그게 뭔데?"
내 질문에 그녀는 미소를 유지하면서 특유의 음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언젠가 드릴게요. 정말 맛있을 거예요."
"음... 알겠어."
나는 그 답을 듣자마자 체리의 가슴 쪽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교복으로 가렸음에도 세실리와 비견될만한 커다란 흉부.
설마 세실리처럼 자기 자신을 디저트라니 뭐니 하면서 칭하는 건 아니겠지. 음란마귀가 낀 건지 모르겠다간 그런 쪽으로 사고가 흐른다.
물론 체리는 마리나 세실리처럼 요망하지 않으니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다. 아마 정말로 밥보다 맛있는 걸 주겠다고 한 거겠지.
'...머리에 마구니가 끼었네.'
안 그래도 정신 상태가 불안정한 애한테 무슨 생각을 한 걸까. 나는 고개를 좌우로 털었다.
체리는 아델리아처럼 불우한 가정 환경으로 인해 본인의 꿈과 희망을 갈갈이 찢겼다가 겨우겨우 복구한 상태다.
그런 아이에게 이상한 상상을 하다니, 동업자이자 선배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기대할게. 네가 직접 만드는 거야?"
"...네."
"어떤 건지 조금은 알려줄 수 있어?"
"설명하긴 어렵지만..."
말을 흐린 체리는 베시시 웃더니 수줍어하며 입을 열었다.
"분명 벚꽃향이 날 거예요."
"벚꽃향이라... 특이하네."
벚꽃향이라는 걸 보면 아마 자기를 연상시키는 음식을 나에게 주려는 모양이다. 기특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귀여웠다.
나는 훗날 체리가 나에게 선물해줄 음식을 기대하며 그녀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우선 식사부터 해결해야 되는데...
"...체리?"
"네?"
"후우... 아니다."
체리는 길게 기른 내 머리카락을 붙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 상태로 졸졸졸 따라오니 당연히 주변에서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다.
사실 체리가 내 머리를 잡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맨 처음 만났을 때도 이랬고 나를 볼 때마다 계속 머리를 붙잡았다.
이때문에 한 번 따끔하게 혼을 낸 적이 있으나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 버릇(?)이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반쯤 포기한 상황이다.
"내 머리가 그렇게나 좋은 거야?"
"네... 부드럽고... 빨간색에다가... 냄새도 좋고... 맛있어요."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화들짝 놀라 체리를 돌아봤다.
그러나 체리는 왜 쳐다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느릿느릿 깜빡였다.
"왜요?"
"...아냐."
아마 멋있다를 잘못 들은 거겠지. 나는 찝찝함을 마음 속에 품은 채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움..."
뒤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를 뒤로 한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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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정확히 사흘 후.
[애니머즈의 대족장이 살해되었다! 책 속의 내용처럼 정책에 불만을 가진 호족이 홀름강을 신청해...]
[이후로 애니머즈는 혼돈의 도가니. 서로가 서로에게 홀름강을 무분별하게 남발하게 되어...]
[국가의 기반이 거세게 흔들리고 있다.]
"아. 씨발. 또?"
어째 바람 잘 날이 없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