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화 〉 꿈보다 해몽(1)
* * *
제논의 오른손을 해한 진범이 원로원이라는 사실도 큰 충격을 줬지만, 그보다 더 이목이 쏠리는 소문이 흘러나왔다.
제논과 알븐하임의 여왕이 서로 애인 관계에 있다는 것. 그러니까 나와 아르웬이 서로 교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멀리서 팝콘만 뜯고 있던 나로서는 황당하기 그지 없는 소문이다. 어째서 이런 소문이 돈 건지 모르겠다만 신문에서는 그 피렌이라는 작자가 최후의 발악으로 소리친 거라고.
그런데 충분히 착각할만한 것이, 내가 아르웬에게 연설문을 전달하고 여려모로 편의를 봐준 건 사실이다.
아르웬과 척을 져봤자 하등 좋은 건 없는데다가 그녀도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으니까. 하지만 피렌은 단지 그 이유들로 나와 아르웬이 서로 애인 관계라고 단정지은 모양이다.
[테르스 왕국. 하스크 지방에 제논 클라우드는 없었다. 마을 주민들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며...]
[알븐하임의 원로원은 해산 절차를 밟았으며, 대의원 피렌 게리트 스톰워커는 두 귀가 잘리는 형벌을 받았다. 이외에 제논을 직접 습격한 칼라스 등 3명은 영원히 감옥에 갇히게 되는...]
[칼라스의 고백. 맹약서는 거짓이며 제논에 대한 신상도 모두 거짓말이다. 그렇다면 현재 제논의 오른손은?]
이밖에도 피렌의 마지막 발악으로 퍼뜨린 제논의 신상에 대해 조사했지만, 당연하게도 모두 거짓이었기에 나오는 건 하나도 없었다.
테르스 왕국 입장에서는 싱글벙글하며 하스크 지방으로 찾아갔으나 나오는 건 전혀 없으니 허탈했겠지. 아마 뭐지, 씨발? 이런 욕설을 내뱉었지 않을까.
피렌은 또다시 뒷통수를 얻어맞은 격이 되었지만, 제논의 신상은 다시 한 번 오리무중으로 변했다. 오른손을 다친 건 맞지만 칼라스 일행이 쳐들어왔다가 역으로 당했다는 식으로 상황을 꾸몄으니 꽤 헷갈릴 것이다.
[알븐하임의 여왕은 이 사실을 미리 눈치채고 제논에게 알렸을 것. 필요한 건 오직 명분이었을 뿐.]
[카이르와 엘리샤처럼 비극으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제논과 메리처럼 이어질 것인지.]
[알븐하임의 국민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상황에서, 아르웬 여왕은 국정이 우선이라며 대답을 회피하고 있다.]
물론 반 이상은 나와 아르웬의 관계를 주목하고 있다. 처음에는 헛소문이겠지, 조금만 지나면 거품처럼 빠지겠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양측에서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자 자기들 멋대로 확정지으려는 징조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은 정말로 나와 아르웬을 연인이라 단정지을 것 같아 서둘러 의견을 구했다.
가장 먼저 마리와 세실리부터다. 마리는 저택에 머물지 않고 곧바로 돌아갔다가 소식을 듣자마자 다시 찾아왔다.
결국에는 또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 당분간 저택에서 숙식을 해결하기로 정했다. 부모님도 상황을 아셔서 흔쾌히 수락하셨다.
"이용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우리 세 명이 머리를 맞대며 고민한 끝에, 의외로 마리가 긍정적인 의견을 내세웠다.
세실리를 받아들이는 것조차 한 걸음 양보했던 그녀였기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세실리도 마찬가지였는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이유로?"
"어차피 진짜로 사귀는 것도 아니잖아? 정치적으로 잘 이용하면 되겠지. 여왕에게도 이득이면 이득이지, 손해는 아닐거고. 정략 결혼 같은 개념이라 생각하면 편할거야."
나는 마리의 설명을 듣고 단번에 이해가 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정략 결혼이 있는 마당에 소문을 적당히 이용하면 안 될 건 없다.
아르웬은 국민들의 지지를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도 있으니 좋고, 나는 그저 그런 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체를 밝히기 전에는 반드시 해명을 해야 된다.
정체를 밝힌다면 마리와 약혼을 했다는 사실이 탄로나는데다가 세실리까지 공표해야 된다. 자칫하다간 좋지 못한 소문이 흉흉하게 번질 수도 있다.
"하지만 마리. 아이작은 아직 17살밖에 되지 않았어. 엘프와 연인 관계라 하기에는 너무 어리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세실리가 약간 부정적인 의견을 내보였다. 그녀의 말마따나 나와 아르웬이 연인 관계라는 소문이 떠도는 것도 나의 정체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끔 가다가 나이 지긋한 현자라고 추측되지만, 세계수 뿌리 오염을 시작으로 의외로 나이가 어릴 수도 있다는 의견도 점차 제시되었다. 예언자나 회귀자는 굳이 나이가 많지 않아도 되니까.
세실리는 마족이니 그렇다 쳐도 아르웬은 연을 맺기에 개연성이 다소 부족하며 시간상으로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연인 관계라 말한 적이 없어. 단지 '인연'을 가진 거지 결코 서로에게 마음을 품지 않은거야. 시간상으로도 문제 없어. 지난 전시회 때 아이작이랑 여왕이 우연히 만났다며? 그런 걸로 적당히 이야기를 꾸미면 되잖아."
"이야기?"
"응. 한 10살 때 쯤에 아르웬과 만나서 지금까지 연락을 주고 받고 있다는 식으로. 여왕도 독서를 좋아한다며? 마침 잘 됐네. 서로에게 책을 추천하다가 지금까지 이어졌다고 말해 봐."
"음..."
왠지 이상한 소문만 더 돌아다닐 것 같다. 예를 들면 어린 시절의 내가 성장하여 아르웬에게 고백했다던가, 아니면 그 반대의 상황이라던가 등등.
이런 경우는 같은 인간에게도 자주 발생하는 상황이다. 꼬맹이가 성장하여 이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어른에게 고백한다는 이야기. 흔히 '역키잡'이라고 설명되는 상황이다.
전생 같았으면 온갖 다양한 시선으로 보겠지만 이 세상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일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현재 이종족 간의 사랑이 증가하고 있으니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래도 현재 상황을 타파하기에는 이만한 해법도 없다.
"괜찮은 것 같네. 다만 아르웬에게도 의견을 물어봐야겠지."
"바로 부르게?"
"응. 그전에 잠깐 부모님에게 허락 받아야지."
"아델리아 씨한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바깥으로 나가자 뒤에서 마리가 조심스레 부탁했다. 그녀도 아델리아가 나의 호위 기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참이다.
그러자 뭔가 느끼는 게 있었는지 미묘한 표정을 지었는데, 아무래도 눈치가 빠른 그녀이니 아델리아가 나에게 호감을 품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챘을 것이다.
당장은 친한 언니 동생으로 지내겠지만, 아델리아의 진짜 신분과 더불어 속사정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지을지 모르겠다. 마리의 성격상 동정해주겠지.
'그래도 아직은 아니야.'
어머니에게 넌지시 들은 게 있다. 아델리아를 정말 받아들이고 싶다면, 훗날 정체를 밝혔을 때 그녀의 선택을 들은 후에 결정하라고.
그 선택이 무엇인지는 나도 바보가 아닌지라 잘 알고 있다. 아마 테르스 왕국과 긴밀한 연관이 있는 거겠지.
지금 당장은 거리를 두며 멀찍히 지켜보고 있는 그녀지만, 사람 마음은 욕심에 이끌리는 법이다. 하물며 테르스 왕국은 문화 강국이라는 특징상 어떻게든 나와 연결 고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터.
아델리아를 사생아가 아닌, 왕족의 성을 부여하면서 나와 연결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더군다나 평소 가깝게 지냈다는 정황이 있으니 전략적으로도 알맞고.
'정체를 밝히면 그때부터 진짜로 힘들겠구나.'
최근에 위기가 있었지만 다행히 잘 넘긴데다가 최고의 상황까지 만들어냈다. 나와 아르웬의 사이의 소문은 예상치 못 했지만.
이후로 나는 부모님에게 모든 상황을 설명했다. 그에 부모님은 알아서 하라며, 나의 선택을 존중해주겠다고 하셨다.
중간에 아델리아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니 그녀는 훈련이 모두 끝나 현재 목욕 중이라고. 어차피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많으니 나중을 기약하면 된다.
그렇게 부모님에게 모든 허락을 받고 두 여자가 기다리고 있는 침실로 돌아왔다. 내가 없는 사이에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는지 표정은 햇빛처럼 화사하기 그지 없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별 거 아니야. 그래서 허락은 받았어?"
"응. 우리끼리 이야기 하라는데? 아버지도 이제부터 나와 연관된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해도 된다고 하셨어."
이번 사건 이후로 아버지는 내가 직접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이상 간섭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하긴 아버지는 조력자에 불과하셨지, 계획을 수립하고 진행시키진 않으셨으니.
나는 책상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가 시리스를 소환하기 위해 마법지를 한 장 들고 왔다. 세실리는 자주 보았으나 마리는 처음이어서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걸 찢으면 소환이 되는 거야?"
"응."
쫘악
짧게 대답한 나는 거침없이 소환지를 반으로 찢었다. 반으로 찢어진 소환지는 이내 푸른빛 입자로 변하더니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부르셨습니까?"
머지않아 허공에서 시리스가 소환되었다. 그녀는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공손하게 인사했다.
마리는 생전 처음 보는 다크 엘프의 모습에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노출도가 심한 시리스의 복장을 보고 흠칫거렸다. 갑옷을 입긴 해도 사실상 속옷이나 다름없는 옷이었으니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 진짜 다, 다크 엘프네? 그런데 옷이..."
"다크 엘프의 능력 때문에 어쩔 수 없어. 보다보면 익숙해질 거야."
"우으..."
의외로 이런 부분에 약한 건지 마리는 부끄러워하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하지만 시리스의 몸매가 몸매인지라 가끔씩 힐끔거렸으며 결국에는 대놓고 바라봤다.
세실리는 그런 마리가 귀여웠는지 빙긋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줬다. 정작 시리스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반응이다.
나는 언제 보아도 훌륭한 시리스의 몸매에 잠깐 시선을 빼앗긴 것도 잠시, 분위기를 풀기 위해 헛기침을 하고는 그녀에게 부탁했다.
"시리스 씨. 다름이 아니라 아르웬을 잠깐 불러줄 수 있어요? 정 힘들다면 전령 역할을 해도 돼요.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수도 있거든요."
"알겠습니다."
시리스는 내 부탁을 듣고 곧바로 텔레포트를 이용했다. 그녀가 다시 돌아오는 동안 마리에게 장난을 치는 건 잊지 않았다.
"마리. 설마 부끄러워하는 거야?"
"그, 그래도... 저런 복장은..."
"너도 첫날밤에 저것보다 심한 걸 입고 왔잖아."
"나, 나는 그래도 가릴 건 다 가렸잖아! 저건 갑옷이 아니라 그냥 속옷이고!"
얼굴을 잔뜩 붉힌 채 빼액 소리지르는 마리. 옆에 앉아있던 세실리는 그걸 보면서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만약 세실리가 가터 벨트를 입고 나와 첫날밤을 치렀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 왠지 짓궂은 장난을 치고 싶었으나 이정도만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아이작."
"응?"
"혹시 저런 거 좋아해?"
"싫어하지는 않지."
"...알았어. 저런 걸 좋아하구나..."
왠지 마리에게 쓸데없는 의욕을 준 것 같다만 넘어가도록 하자.
"아이작."
"아. 왔구나."
잠시 후, 아르웬이 시리스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마리는 아르웬이 등장하자마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석이 아닌 사석이라지만 아르웬은 엄연히 타국의 여왕. 더군다나 이번이 첫 만남이니 예의를 차려야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다.
"안녕하세요, 여왕님. 레킬리스 공작가의 장녀, 마리 하우젠 레킬리스라고 합니다. 여왕님과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알븐하임의 여왕, 아르웬 엘리디아라고 한다. 만나서 반갑구나."
두 여자는 서로에게 각 나라의 예법에 맞게 인사를 나누었다. 세실리는 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어서 간략한 눈인사가 끝이었다.
이윽고 동그란 테이블을 중심으로 각자 자리에 앉았다. 다만 시리스는 자리에 앉지 않고 아르웬의 곁에 서 있었다.
"그래. 무슨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나를 이 자리로 부른 것이냐?"
"실은..."
나는 아르웬에게 전에 했던 이야기를 모두 전달했다. 그녀는 현재 떠도는 소문을 듣자마자 움찔거렸으나 이내 내 설명을 하나하나 듣더니 진중한 표정으로 경청했다.
이윽고 설명의 시간이 지나고, 아르웬은 모든 설명이 끝나자 한동안 고민하는 기색을 띄었다. 가끔씩 나와 눈을 마주치며 뭔가 말하고 싶다는 듯 입술을 오물거렸으나 나는 잠자코 기다려줬다.
그렇게 약 1분 정도가 흘렀을 쯤. 그녀는 생각보다 괜찮다고 판단했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긍정의 표시였다.
"좋은 방법이긴 하구나. 소문을 부정하지는 않되, 연인 관계가 아닌 단순한 인연이라..."
"서로가 서로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다는 것만 해도 충분해. 대신 칼 같이 선을 그어놓긴 해야지."
"어떤 식으로?"
"나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것 정도?"
"약혼자라..."
아르웬은 약혼자라는 단어에 마리를 쳐다봤다. 마리는 그녀와 눈을 마주하자마자 아름답게 웃어보이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떻게든 시리스에게 시선을 빼앗기지 않도록 애를 쓰는 모습이 조금 웃기다. 테이블 밑으로 주먹 쥔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으니.
한편 아르웬은 미묘한 표정으로 마리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세실리를 쳐다봤다. 그러자 얼굴이 더욱 복잡미묘해졌다.
대체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녀의 입이 열리기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알겠다. 그러면 그렇게 하는 걸로 정하도록 하지."
"걸리는 건 없지?"
"걸리는 거라... 아이작."
"응?"
내 질문에 아르웬은 은하수 같은 은회색 눈동자로 나를 직시했다. 그리고 입술을 다시 한 번 오물거리더니 힘겹게 말했다.
"그대는... 잔에 물이 반 정도 채워진 걸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느냐?"
"뭐?"
"잔에 물이 반 정도 채워진 걸 보면 어떤 생각이 드냐고 물었다. 아이작뿐만 아니라 그대들의 의견을 한 번 묻고 싶군."
아르웬은 마리와 세실리에게도 의견을 구했다. 뜬금없는 질문이었기에 나를 포함한 양옆의 두 여인도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쓸데없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 아르웬이다. 필시 저 질문에 의미가 담겨있을 터.
이에 내가 골똘히 생각하는 동안, 마리는 지체없이 본인의 생각을 꺼냈다.
"제 식견이 모자라 여왕님이 무슨 저의로 질문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의미가 있는 건가요?"
"일단 신탁이라고 해두마."
"신탁이라... 물 한 잔 하고 정신 차리라는 뜻이 아닌지... 라는 의견을 조심스레 내겠습니다."
"... ..."
가차없이 본인이 하고픈 말을 꺼낸 마리. 그 말을 들은 아르웬의 반응은 사뭇 볼만했다. 안 그래도 새하얬던 피부가 더욱 하얘질 정도였으니.
그사이 곰곰이 생각하고 있던 세실리가 또다른 의견을 꺼냈다.
"생각의 여하에 따라 다르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닐까요? 물이 반밖에 차지 않았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반이나 찼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으음..."
세실리의 대답에는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름 괜찮지만 명확하지는 않다는 표시였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인원은 나 혼자 뿐. 신탁이라 했으니 분명 의미가 있을 것이다.
루미너스 님이 또 무슨 장난을 친 건가 싶지만 꿈보다 해몽이라고, 적어도 좋은 말을 해줘야 할 것 같다. 안 그러면 괜히 기분이 우울해질 수도 있으니.
이에 나는 어딘가 기대하는 눈빛의 아르웬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내 의견을 입 밖으로 꺼냈다.
"애매하지만 다양한 의미가 있을 수도 있지. 남아있는 잔을 가득 채울 수도 있고, 아니면 그 물을 바닥에 쏟아버릴 수도 있지. 마음 먹기에 따라 채울 수도 있고 비울 수도 있다는 뜻 아닐까?"
"채울 수도 있고, 비울 수도 있다라..."
"선택을 하라는 뜻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어. 물을 채우는 게 아니라 아예 잔을 부술 수도 있겠지. 워낙 애매해서 나도 잘 모르겠네."
"... ..."
내 대답을 들은 아르웬은 한동안 깊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쳐다봤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후련한 듯한 표정이었다.
"알겠다. 그대들에게 의견을 구하길 잘한 것 같구나."
"그래서 무슨 질문을 했길래 그런 신탁이 내려왔는지 알려줄 수 있어?"
내 질문에 아르웬은 전보다 더욱 진한 미소를 짓더니.
"비밀이니라."
어딘가 요망하게 들릴 법한 대답을 꺼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