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화 〉 월척(2)
* * *
이전에 언급했듯이 피렌의 정치 경력은 수백 년이 넘는다. 종족 전쟁 이전부터 현재까지 원로원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세월동안 다양한 경험을 겪었다.
원로원 내에 파벌이 갈려 선택을 해야 할 때도 있었고, 종족 전쟁 당시 원로원이 최악의 선택을 한 탓에 존속마저 위태로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피렌은 그럴 때마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위기를 넘긴 방식도 다양했다.
날조와 선동으로, 진실과 해명으로, 가끔은 아무도 모르게 비열한 술수로.
그러한 방식을 토대로 위기에 몰렸던 원로원을 지금까지 유지시켰으며 결국에는 대의원 자리까지 올라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
먼 과거, 원로원에 입단할 당시 지녔던 깨끗한 신념은 권력에 의해 더렵혀진지 오래고 남은 건 탐욕과 자만 뿐. 권력의 맛을 한 번 맛본 이는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벗어날 수 없다.
틈만 나면 권력에 위해가 가는 알븐하임의 왕들을 시시각각 견제하여 내려오게 만든 것도 그 일환이다. 왕권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원로원의 이권은 약해지니.
살면서 갖가지 위기들이 닥쳐왔지만, 그때마다 피렌은 경험과 임기응변을 십분 발휘하여 무난하게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일생일대의 위기가, 지금 다시 찾아왔다.
"원로원의 수장, 피렌 게리트 스톰워커의 지시를 받아 제논을 습격한 죄인들이니라!"
아르웬이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우렁차게 외쳤다. 음성 증폭 마법으로 인해 광장에 메아리가 울린다.
그 소리가 다른 소리를 잡아먹은 것처럼, 메아리가 모두 사라지자 광장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누군가의 기침 소리마저 크게 들릴 정도로 거대한 침묵이 가라앉는다.
그녀가 발언한 사실은, 광장에 모여있는 국민들과 타국의 인사들에게 거대한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다.
"저게... 무슨 소리야?"
"분명... 피렌 의원님이라고 했지?"
"저, 저기 있는 죄인들이 제논... 을 해쳤다는 거야?"
믿기 힘든 사실에 군중들이 점점 술렁이기 시작했다. 알븐하임의 국민들도 원로원이 어떤 곳인지 잘 알고, 또한 피렌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
원로원은 수백 년 동안 알븐하임의 상징으로 묵묵히 자리를 지켜왔으니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 게다가 종족 전쟁 당시 원로원의 끔찍한 만행으로 알븐하임을 패배로 몰아넣었으니 평가조차 빈말로 좋다 할 수 없었다.
헌데 아르웬은 여기서 불 난 곳에 부채질 정도가 아니라 기름을 콸콸콸 쏟아버리는 행위를 벌였다.
"피, 피렌 님? 저게 대체 무슨..."
"... ..."
당혹스러워하는 측근처럼 피렌도 깜짝 놀란 건 마찬가지다. 아니, 놀람을 넘어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맹약서는 거짓이 아니고 칼라스에게 의심스러운 정황은 하나도 없었다.
첩자가 단정짓기에도 애매하다. 여태까지 칼라스와 얼굴을 마주한 적이 수십 년이 넘을 뿐더러 죄인처럼 잡혀 단상 위에 올라간 걸 보면 결코 첩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위를 통해 칼라스의 범죄를 눈치챘다는 것인데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과거를 뒤지고 또 뒤져도 나오는 건 하나도 없었으니.
피렌이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어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폭탄 발언을 꺼냈던 아르웬이 말을 이었다. 작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강직한 목소리며 어조였다.
"이 죄인들은 제논이 우리에게 베푼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위험한 지식을 가졌다는 이유로 그를 해하였다! 헤아리지 못할 정도의 은혜를 베푼 제논의 오른손을! 무참하게 망가뜨렸다! 알븐하임의 여왕인 나의 의견도 듣지 않고 독단적으로 일을 저질렀지!"
아르웬이 소리쳐도 마땅히 나오는 반응은 없었다. 그도 그럴게 워낙 충격적인 사안인데다가 결정적으로 '증거'가 부족하다.
그녀의 연설 능력은 전에 보았듯이 입증되었으나 이번에는 스케일이 커도 심각할 정도로 크다. 자칫하다간 알븐하임이 주변 국가들의 압박에 시달릴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전쟁까지 선포될 수도 있다.
거짓을 기반한 선동은 한 번 휘둘리게 되면 그 거짓을 풀기 위해 다량의 증거가 필요하지만, 그만큼 어려운 것이 선동이다. 현재 아르웬을 향한 여론이 우세하다고 한들 국민들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대들은 원로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정말 그들이 우리 알븐하임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생각하고 있느냐? 원로원의 만행으로 인해 우리는 종족 전쟁 패배라는 치욕을 겪었고, 더 나아가 지금까지 엘프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많은 분야를 억압했다! 심지어 지금은 그 찬란하게 빛나는 문화마저 억압하려 들고 있지!"
그래서 아르웬은 원로원이 지금까지 저지른 만행들은 하나하나 꼬집으면서 살살 휘두르기 시작했다. 원로원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만큼 그 해악도 널리 알려진 편이다.
간혹 자잘한 악행은 원로원이 역사를 조작하여 덮을 수 있었지만, 종족 전쟁을 보듯이 커다란 만행은 덮을래야 덮을 수 없는 법이다. 고인물은 썩기 마련이라고, 알븐하임의 국민들도 이것 하나는 명시하고 있다.
원로원은 부패한 권력이 가득 모여있는 집단이라고. 그러나 상징성 하나 때문에 지금까지 꾸준히 유지되는 거라고.
신세대 엘프뿐만 아니라 구세대 엘프조차 원로원의 업적을 인정하고 있으나 꺼려하는 입장이다. 단순히 역사를 함께 한 '상징'이라는 이유 하나로 지지하고 있을 뿐.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외면하고 그저 현재의 안위를 중요히 여기고 있느니라! 그것도 알븐하임의 안위가 아닌 본인들의 안위를 위해, 아름다운 문화를 탄압하고 있다! 헌데 과연 제논만 탄압할까? 그대들이 아름다운 문화를 차곡차곡 이룩하고 있을 때, 원로원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제논처럼 해를 가할 것이니라! 그리고 그 문화를 송두리째 부서버리겠지!"
"그, 그래. 맞는 말이야. 제논은 정체도 숨기고 있었잖아."
"우리라고 다를 게 있을까?"
"원로원 놈들... 기어코 또 사고를..."
원래 선동은 그럴싸한 이야기가 나온다면 잘 휘둘리게 돼 있다. 바로 지금처럼.
만약 원로원의 평소 행실이 올바르고 깨끗했다면 모를까, 여태까지 저지른 일이 있다보니 군중들도 하나 둘씩 동조하기 시작했다.
정체를 숨기며 살아가던 제논조차 해를 끼쳤는데 본인들이라고 다를 게 있을까? 이 나라에서 자신의 예술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을까?
다른 나라로 이주해도 원로원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제논처럼 끝까지 추격할텐데 가능한 일일까?
불가능하다. 원로원이 존재하는 이상 문화는 물론, 엘프를 향한 부정적인 언행까지 탄압할 게 뻔하다.
고요한 호수에 돌을 던져 파문이 일어나는 것처럼, 군중들의 마음 또한 거세게 동요했다.
아르웬은 군중들이 어느정도 동요된 모습을 확인하고 곧장 칼라스 일당에게 외쳤다.
"죄인들에게 묻겠다! 그대들은 피렌의 지시를 받아 제논을 해한 게 맞느냐?"
"...예. 그렇습니다."
"제논은 그대들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다. 헌데 왜 그런 것이냐?"
"제논이 가진 지식이... 위험해서 그렇습니다."
칼라스는 작게 대답했으나 음성 증폭 마법 덕분에 군중들은 전부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증언까지 이어지고, 군중들은 점점 과격해졌다.
하지만 마지막 한 방이 부족하다. 아르웬은 그 한 방을 위해 피렌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피렌은 겉으로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표정이었지만, 안색이 창백해진 걸 보면 심적으로 수세에 몰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아르웬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죄인의 입에서 원로원의 대의원, 피렌이 지목된 바. 피렌 대의원, 이 단상으로 올라오거라."
"... ..."
"올라오지 않는다면 강제로 끌고 오도록 하겠노라."
그 말과 동시에 피렌의 곁으로 엘프 전사들이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미 사전에 얘기를 한 것인지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저리 가라! 내가 스스로 올라가겠다!"
"... ..."
하지만 피렌은 자존심인지 그들의 인계를 완강히 거부했다. 엘프 전사들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호위를 하는 방식으로 단상으로 향했다.
이윽고 피렌은 약간이나마 흐뜨려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아르웬이 서 있는 단상 위로 나아갔다. 그가 올라가는 와중에도 군중들의 웅성거림은 전혀 잦아들지 않았다.
마침내 원로원의 대의원, 피렌이 여왕이 있는 단상 위에 올라섰다. 그는 아르웬을 마주 보기 전에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칼라스 일당을 노려봤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를 칭찬한 피렌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뒷수습을 실패하여 자신마저 위기에 몰리게 만든 원흉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만약 이 사태를 넘긴다면 그를 원로원에서 퇴출시키는 건 물론이고 그의 가문마저 압박할 계획이다. 이번 일로 원로원의 위세는 더욱 줄어들 것이니.
"...여왕 폐하. 이번에는 장난이 너무 지나치시군요."
피렌은 최대한 담담함을 유지하며 아르웬을 향해 말했다. 그러나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흐르는 걸 보면 그가 긴장했다는 걸 금방 간파할 수 있다.
아르웬도 그 점을 곧바로 눈치채고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아직 한 방이 남아있었지만 타이밍을 노릴 생각이다.
"장난이라고 했느냐? 나는 진실을 말한 거다만."
"진실이라니, 저는 저 자들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모른다고? 저 죄인들의 입에 그대의 이름이 언급되었는데 그래도 발뺌할 셈인게냐?"
"모르는 사람을 모른다고 하지, 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피렌은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거짓말을 이어나갔다. 그들의 대화는 마법을 통해 전부 생중계되는 상황이다.
"재미있구나. 그토록 나에게 제논을 찾아야 된다고 아우성을 치더니... 정말로 발뺌할 셈이냐? 만약 순순히 죄를 인정한다면 원로원의 대의원으로서 최고의 예우를 다해주겠노라."
"없는 죄를 만드는 걸 보면 그토록 제가 싫으셨던 모양이군요. 저에게 죄가 있다면 증거가 있지 않겠습니까? 고작 죄인의 증언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증거라... 그래. 증거. 그대의 말대로다."
따악!
피렌의 입에서 '증거'라는 키워드가 언급되자 아르웬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순간적으로 마나의 파동이 일어나며 단상 쪽에 네모반듯한 무언가가 형성되었다.
아이작이 보았다면 영화관의 스크린이라 생각할 법한 크기였으며 피렌은 물론 멀리서 지켜보는 군중들마저도 선명히 볼 수 있었다. 그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스크린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스크린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그래서, 제논은 찾았나?]
저택에서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칼라스와 피렌의 모습이었다. 피렌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물론입니다. 역시 인간들은 별 것 없더군요. 특히 출판사 사장은 아무런 능력도 없는 인간이라 추적하기 쉬웠습니다.]
[호오. 그거 대단하군. 제논은 다른 종족의 힘을 빌려 정체를 숨겼을 줄 알았는데. 예를 들면 마족이라던지.]
대화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피렌의 안색은 처참해졌고, 군중들은 삽시간에 입을 다물었다.
선동이 아니라 명백한 증거가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데 그 누가 이견을 제시할 수 있을까. 녹화 마법은 편집은 몰라도 조작은 절대 불가능하다.
단, 제논의 정체(가짜지만)를 직접적으로 발설한 부분은 아르웬이 제외시켰다. 제 아무리 가짜 신분이라지만 혼란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회유를 잘 했는지 궁금하군.]
[뭐, 대의원님도 예상했다시피 회유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소중한 문화를 검열하는 놈들과 한 패가 되기는 싫다며 문전박대하더군요. 예술가들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술가들의 특징이긴 하지. 그래서?]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 하도록 약간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평생 글을 못 쓰게 만들겠다고 하니 금방 울고 불며 빌더군요.]
[허허허허허! 아주 좋아. 그 조치라는 게 어떤 건지 궁금한데 말해 줄 수 있나?]
[뭐... 당분간 글을 쓰지 못 하도록 손가락을 꺾어버렸습니다.]
군중들은 그 광경을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가졌다.
토할 것 같다고. 더이상 그만 봐도 되니까 제발 그만하라고.
몇 명은 눈을 질끈 감았고, 또 몇 명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입을 틀어막았다.
원래 제논이 겪은 고통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는 없없지만, 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상상이 그려졌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치욕스러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한 예술가의 자존심과 신념이 저 탐욕에 가득 찬 이들 때문에 깡그리 무너졌으니 자살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용한 일이다.
[피렌 님께서 만족하실 만한 물건을 제가 또 가지고 왔습니다.]
[이건...]
[맹약서입니다.]
[맹약서?]
설상가상 '맹약'까지 맺었다는 사실에 군중들은 경악을 금치 못 했다. 마법의 대가, 엘프인만큼 그들도 맹약이 어떤 마법인지 인지하고 있다.
한 번 맺게 되면 맹약서에 적힌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 말은 즉슨, 제논은 앞으로 제논 일대기를 발간할 때마다 원하는 이야기를 쓸 수 없다는 뜻.
한 마디로 저 탐욕스러운 엘프 때문에 제논 일대기의 전개가 완전히 망가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덕분에 우리 원로원이 힘을 쓸 수 있겠군.]
피렌의 말을 끝으로, 증거 자료는 거기서 끝이 났다. 하지만 피렌을 포함한 그 누구도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아르웬이 보여준 증거는, 알븐하임뿐만 아니라 세상을 거세게 뒤흔들만한 것이었으니.
그렇게 길고 긴 고요함이 장내에 가라앉았을 때 쯤.
"아주 개새끼구만!!"
누군가의 통렬한 외침을 시작으로, 군중들이 폭발했다.
"저 망할 놈의 목을 당장 쳐라!!"
"같은 엘프라는 게 수치스럽다!"
"원로원도 빨리 폐지해! 안 그러면 나라에 가망이 없으니까!!"
군중들은 하나 된 마음으로 피렌을 질타하기 시작했다. 질타 수준이 아니라 비난과 욕설, 그리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이 폭풍처럼 밀려들어왔다.
아르웬은 귀가 멀듯이 그 소리들을 들으며 피렌을 바라봤다. 피렌은 이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다.
"나, 알븐하임의 여왕이 명하노라."
"... ..."
"원로원의 대의원이자 죄인, 피렌 게리트 스톰워커를 포박하라!"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피렌의 정신 또한 돌아왔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쿠웅!
"크윽!"
어느새인가 접근한 엘프 전사들이 재빨리 그를 제압했으니까. 가장 먼저 무릎을 꿇리고 저항조차 하지 못 하도록 팔을 붙잡았다.
다시 말하지만 피렌은 군인이 아니라 정치인. 게다가 주름이 자글자글할만큼 나이를 먹어 전사들에게 대항할 수 있을리가 없다.
"놔, 놔라! 네 놈들이 감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보군. 피렌 대의, 아니 죄인."
"너...!"
이제는 격식 따위는 던져버리고 말까지 놓은 피렌. 아르웬은 이글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피렌을 보며 조소를 머금었다.
더이상 원로원은 존속을 유지할 수 없다. 안 그래도 위태위태하던 상황이었는데 도장까지 쾅! 찍어버린 이상 역사 속으로 사라질 일만 남았다.
"네 년이 우리 없이 알븐하임을 잘 통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우리 원로원이 지금까지 알븐하임을 어떻게 다스렸는지 하나도 모르는 풋내기 여왕이!!"
"잘 알고 있지. 그러나 썩어버린 팔다리를 그대로 유지할 수 없는 노릇이지 않느냐?"
피렌이 바락바락 소리쳐도 아르웬은 명료하게 받아쳤다. 당연하게도 피렌은 열불이 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목을 쳐라!!"
"여왕님! 제발 저 더러운 얼굴을 치워주십시오! 엘프의 수치입니다!"
"감히 신마저 인정한 제논을 다치게 해?! 알븐하임이 망한다면 전부 네 놈 탓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군중들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가끔씩 분노에 이기지 못해 나서는 자들도 있었으나 곧바로 전사들에게 제지되었다.
피렌은 자신을 향한 욕설이 수도 없이 몰아치자 점점 기가 쇠약해지는 한편, 여기서 끝낼 수 없었는지 이를 꽉 깨물었다. 아르웬도 그 부분을 눈치챘다.
하지만 가만히 있었다. 대충 그가 무엇을 발설할지 눈치채고 있었으니까.
뒤이어 피렌은 결심했다는 표정을 짓더니 아르웬이 아닌, 군중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들어라! 그 놈의 이름은 제논 클라우드!"
"... ..."
"테르스 왕국의 하스크 지방에 살고 있는 인간 노인이다! 수염을 단정하게 기른, 백발에 푸른 눈을 지녔다!"
혼자서 죽을 수는 없다는 듯, 제논의 가짜 신분을 밝히기 시작한 피렌. 하지만 폭발한 군중들을 잠재우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물론 들을 사람은 듣겠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전부 가짜였으니 밝혀도 그만, 밝히지 않아도 그만이었으니까.
이에 아르웬이 끌고 가라고 손짓하려는 찰나, 피렌이 폭탄 선언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리고 여왕이랍시고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고 있는, 아르웬 엘로디아의 연인이다!!"
"...뭐?"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아르웬은 물론, 군중들 또한 그 폭탄 선언을 듣고 깜짝 놀라 분노를 멈추었다.
"내가 모를 줄 알고 있었나? 연설문을 네 년한테 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눈치챘지! 연인이 아닌 이상에야 과연 지금까지 연락을 하고, 또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을까?"
"무, 무슨 소리를...! 당장 죄인을 끌고 가라!"
아르웬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 한 채 서둘러 명령을 내렸다. 허나 피렌은 전사들에게 끌려가는 와중에도 발악을 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네 년은 역사에 이렇게 기록될 것이다! 고작 인간 연인에게 마음을 뺏겨 국정을 말아먹은 암군으로! 그 인간이 죽고 나면 네 년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전부 지켜볼 것이다! 전부!! 이 눈으로!!"
"... ..."
이후로 피렌은 단상 밑으로 내려갔지만...
"여왕님이... 제논과 사귀고 있다고?"
"그게 정말이야?"
"연설문을 줬다는 소리는 또 뭐야?"
군중들은 다른 의미로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제논도 엘프와 이어지지 못 해서 책에 그 이야기를 담았잖아."
"정말이야? 그러면..."
"앞뒤가 딱딱 들어맞는데?"
원래 악당은 끝까지 영향력을 끼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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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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