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 다시 집필(1)
* * *
아르웬의 대국민 연설은 알븐하임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끼쳤다. 본디 엘프는 평소에는 잘 규합되어 있는 듯했지만, 정작 위기의 상황에서 분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건 종족 전쟁뿐만 아니라 알븐하임 내부를 잘 들여다 보면 곳곳에 균열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균열이 너무 촘촘한 나머지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 했을 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번 혼혈 사태에서 다시 한 번 분열의 조짐이 보였으나 아르웬이 연설을 통해 잘 마무리지었으며 더 나아가 진정한 하나로 규합되려는 현상을 띄기 시작했다.
연설의 내용은 주로 순혈과 혼혈을 통합이었지만 잘 들여다 보면 엘프에게 없어서는 섭섭할 '교만'을 뿌리치라며 당부하고 있다. 교만이야말로 진정한 적이며 선조들의 명예를 더럽히는 거라고.
덕분에 알븐하임의 엘프들이 깊게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상 나라 전체에 큰 변화를 일으킨 셈이다.
당연하지만, 주변 국가는 혹여 알븐하임이 진정한 의미로 하나가 될까봐 눈치를 보는 중이다. 특히 인간 측 나라들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만일 엘프가 단합을 이룬다면 여러모로 곤란해지는 건 인간이다.
종족 전쟁 당시에도 인간 측이 승리를 거둘 수 있던 이유가 바로 단합력이다. 겉보기에는 온갖 권모술수와 알력 다툼으로 인해 분열되는 것처럼 보여도 단합을 이루었다.
더군다나 3000년 전 악마 전쟁도 마찬가지고 현재까지도 인간에게 있어서 '근성'과 '단합'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아이덴티티나 마찬가지.
다른 종족에 비해 형편없는 태생적 능력을 지녔지만, 불굴의 정신력과 하나 되어 맞서싸우는 단합력은 인간에게 있어서 제일 큰 강점이다.
헌데 그 강점을 엘프가 가져버린다? 현재는 모르겠지만 미래에 있어서 불안 요소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엘프가 하나가 된다면, 현재는 모르지만 먼 미래에는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올 것.]
[다른 종족이 듣는다면 마치 선동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엘프는 과연 변할 것인가?]
위의 평가들처럼 엘프의 변화에 주목하는 중이다. 몇몇은 엘프가 먼 미래에 세계를 집어삼킬까봐 경계하는 중이고, 몇몇은 엘프는 엘프일 뿐이라며 교만은 없앨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평가들이 오고 갔으나 공통된 평가는 있다. 바로 연설의 내용이다.
특히 마지막에 언급했던 구절, '엘프의, 엘프에 의한, 엘프를 위한'는 여러번 회자되고 있다. 앞선 연설을 모두 함축시켰으며 간단한 문장인데도 머릿속 깊히 각인시켰다며 호평을 내렸다.
물론 이 모두 아이작이 대신 작성한 거지만 사람들이 알리가 만무했다.
"아이작."
"응?"
"그 연설문 네가 작성한 거지?"
극소수를 제외하고.
*****
세실리의 상태가 점점 악화되어 지체없이 미네르바 제국으로 복귀했다. 세실리는 가르츠와 함께 헬리움으로 돌아갔으며 내일을 기약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고 시간이 빌 때 세실리와 단 둘이 데이트를 즐겼다. 마리가 수업 때문에 바쁜 것도 있고 기꺼이 양보한 덕분에 즐길 수 있었다.
그런 우리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학생들이 있었으나 이제는 다 무시했다. 어차피 데이트라고 해봤자 함께 식사를 하거나 아카데미 곳곳을 돌아다니는 것뿐이다.
"아이작."
"응?"
"그 연설문 네가 작성한 거지?"
그러다 세실리가 대뜸 저런 질문을 날렸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방음이 되는 방을 잡아서 소리가 바깥으로 새어나갈 일은 없었다.
나는 세실리의 질문을 듣고 살짝 당황하였으나 이내 담담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알고 있었어?"
"그냥 찔러본 건데? 딱히 숨길 생각도 없었던 거야?"
"누나는 아르웬을 알고 있잖아. 게다가 누나는 눈치도 빠르니 언젠가 알 거라 생각하고 있었지."
거짓 하나 묻어있지 않은 진심이었다. 세실리 정도라면 아르웬이 나를 찾아왔다는 사실 정도는 알 거라 예측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나와 아르웬 사이를 이어주는 심부름꾼, 시리스도 있었으니 절대 억측은 아니다.
"설마 그냥 도와준 건 아니지? 책임감이 강하다지만 그 여자는 너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어."
"나도 알아. 그래서 마법을 좀 알려달라고 했지."
"마법?"
"응. 정확히는 마법의 종류와 그 효과에 대한 기록을 작성해달라고 부탁했어. 엘프와 마족의 마법은 궤를 달리하니까."
"흐음."
세실리는 내 대답을 듣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을 뿐, 그걸로 괜찮겠냐는 투로 물었다.
"고작 그걸로는 부족하지 않아? 아르웬의 대국민 연설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더 나아가 알븐하임이 크게 발전하게 될 계기를 마련했어. 내 생각에는 보답을 더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무슨 보답? 지금 원하는 건 다 가졌는데."
"어..."
세실리는 내 말에 붉은 눈을 데록데록 굴리며 생각에 빠졌다. 그동안 나는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기다렸다.
이윽고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허탈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도 그러네. 정말 가질 건 다 가졌구나. 그래도 난 네가 좀 더 욕심이 많았으면 좋겠어."
"욕심이라..."
나는 커피 찻잔을 내려놓고 곰곰이 생각했다. 전생의 영향 때문인지 세실리의 말마따나 그닥 욕심이 없는 편에 속했다.
이미 이룰 건 다 이루었는데 욕심이 생길리가 있나. 굳이 있다면 역사를 좀 더 파헤치고 싶다.
하지만 그것조차 알븐하임의 성지에 있는 책들을 시리스를 통해 전달받는 중이다. 덕분에 지식량이 늘어 제논 일대기에 참고할 수 있었다.
현재로서 욕심이 있다면, 제논 일대기를 보다 더 많은 사람이 읽기를 원하는 것과 마이샬 영지를 문화 거리로 발전시키는 것. 사실상 이것 둘 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13권, 더 나아가 완결부터 내야겠지.'
13권도 벌써 반 정도 쓴 상황이다. 12권처럼 이미 모든 구상을 해놓았고 남은 건 알븐하임, 책 속의 명칭으로는 엘븐하임의 침공이다.
엘븐하임이 침공당한다면 알븐하임 쪽에서 검열하겠다고 압박을 가했지만, 솔직히 상관은 없다. 피해를 보는 건 알븐하임이지 내가 아니니까.
게다가 아르웬이 알려주길 원로원의 독단적 결정이라 했으니 자충수에 가깝다. 정치인은 민심을 잡아야 하는데 그 민심을 자기들이 알아서 깎는 중이다.
'여의치 않으면 편지나 보내야겠다.'
문화를 검열하는 게 얼마나 저열한 짓인지 전생의 중국을 통해 잘 알고 있다. 더 가관인 건 문화가 검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끝까지 찾아본다는 것이다.
어쩌면 알븐하임에서도 그와 유사한 현상이 나타나는 건 아닌지 궁금해진다. 이걸 계기로 알븐하임의 국민들도 원로원에게 불만을 품지는 않을까.
나는 생각에서 빠져나와 세실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세실리도 내 입이 떨어질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중이다.
지금은 딱히 큰 욕심은 없었지만, 그녀를 바라보니 하나 생긴 것 같다. 여태까지 궁금했던 점이기도 하고.
"원래 없었는데, 지금 하나 생긴 것 같아."
"정말? 그게 뭐야?"
"뿔."
"뿔?"
"응."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세실리의 뿔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뿔 한 번만 만져봐도 돼?"
"뭐, 뭐?"
"뿔 한 번만 만져봐도 되냐고. 평소에 궁금했거든."
마족에게 있어서 타인이 뿔은 만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세실리에게 들었다. 당신이 악마가 되어도 영원히 사랑할 거라는 고백 비슷한 거라고 했던가.
내 개인적인 호기심도 해결하는 거지만, 세실리를 향한 내 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오랜만의 데이트인데 이정도는 해줘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세실리는 처음에는 우물쭈물거리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 만져도 돼."
"정말로?"
"응. 몇 개월 전에 말했잖아. 난 네가 원하는 걸 다 해주겠다고. 그게 뿔이든, 내 몸이든 상관없어."
세실리가 가슴에 손을 얹으며 상냥하게 답했다. 긴장했는지 뺨에 홍조가 미미하게 일어났으며 목소리도 살짝 떨리는 게 느껴졌다.
마족에게 있어서 뿔을 만진다는 건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물며 육체보다는 정신적으로 흔들리는 경우가 더욱 많으니 정서적 교감에 가치를 두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세실리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옆자리에 앉았다. 세실리는 내가 바로 옆자리에 앉자 몸을 흠칫하더니 고개를 아래로 떨구며 조신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만지라는 듯이 머리를 내 쪽으로 움직였는데, 재채기 사건도 그렇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귀여웠다. 어서 빨리 머리를 쓰다듬어달라 재촉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리도 그렇고 사랑에 빠진 여자들은 전부 귀여운 건가, 아니면 세실리의 성격이 이런 걸까. 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관자놀이 부근에 달려있는 뿔에게 시선을 옮겼다.
슬슬 악주기가 다가와서 그런지 검은색보다는 붉은색이 차지하는 비율이 더 많았다.
스윽
"으응..."
내가 조심스레 뿔을 만지자 세실리가 고양이처럼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다. 눈까지 감은 것이 내 손길을 느끼는 모양새다.
하지만 지난 번에 들었다시피 뿔에는 감각이 없다. 그녀는 단지 내가 뿔을 만져주는 것만으로도 안정을 느끼는 중이다.
'딱딱하네.'
생전 처음 만져보는 마족의 뿔은 딱딱했다. 뿔이니 딱딱한 건 당연하겠지만 느낌이 다를 줄 알았다.
나는 한동안 세실리의 뿔을 어루만지다가 반대쪽 손을 움직여 그녀의 얼굴을 붙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돌려 나와 얼굴을 마주하도록 만들었다.
내가 얼굴을 돌리자 세실리도 감았던 눈을 뜨며 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붉디 붉은 눈동자는 묘하게 촉촉해졌으며 짙은 감정이 담겨있었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세실리는 정말이지 아름답다는 말조차 부족할 정도로 예뻤다.
"누나. 그거 알아?"
"...뭐가?"
"누나는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어. 지난 번 재채기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정말 사랑스러워."
"... ..."
진심을 담아 말하니 세실리의 얼굴이 급속도로 빨갛게 익어간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조차 얼굴색에 묻힐 만큼 그녀가 쑥스러워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는 것이 그녀답다는 생각이 든다. 마리였으면 부끄럽다니, 창피하다니 소리 지르며 고개를 돌렸겠지.
이에 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가 얼굴을 서서히 갖다 대기 시작했다. 한 손은 뿔을 살살 만지고, 다른 한 손은 세실리의 얼굴을 잡으면서.
내가 얼굴을 가까이 접근시키자 세실리가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쪽
곧이어 내 입술에서 느껴지는 말랑말랑한 무언가. 나는 그 감촉이 느껴지자 입을 살짝 벌렸다.
세실리도 이에 응하여 입을 조심스레 벌렸으며 덕분에 서로가 서로의 입술을 덮을 수 있었다.
"... ..."
"... ..."
한동안 진한 키스가 이어졌다. 세실리의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는 걸 실시간으로 느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혀는 강하게 섞지 않았다. 혀를 섞는 건 본방에서나 할 예정이지, 이렇게 좁디 좁은 공간은 아니니까.
단지 지금 이 키스는 전조에 불과하다. 앞으로 방학도 얼마 남지 않았겠다, 그녀에게 기대를 주기 위한 사전 작업.
나는 세실리의 뿔을 살살 만져주면서 키스를 이어나가다가 조심스레 입술을 떼었다. 달달한 커피의 향기가 입 안에 맴돌았다.
"하아... 하아... 흐으..."
키스를 하면서 숨을 참았던 것일까. 세실리가 달뜬 숨소리를 내면서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저번에는 뿔을 만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뿔을 만져주면서 키스를 하다보니 감정적으로 격해진 모양이다.
나는 빙긋 웃었다가 아직까지 만지고 있는 뿔을 확인했다.
설마했지만, 방금 전보다 붉은색이 차지하는 비율이 더 많아졌다. 키스를 하면서도 그에 따라 욕망도 한층 강렬해진 듯했다.
"누나."
"흐으... 으응?"
"방학 때까지 참을 수 있지?"
방학에는 헬리움에 정식적으로 방문할 계획이다. 세실리의 전투 방식을 눈으로 보면서 제논 일대기에 참고해야 되고, 더 나아가 헬리움 곳곳을 돌아다닐 예정이다.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대로 해야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세실리의 부모님과 대면하여 자세한 상황을 설명하는 게 좋을 것이다.
"...못 됐어."
세실리는 내 질문에 주먹으로 가슴을 툭 때리면서 앙탈을 부렸다. 그래도 미소를 짓는 것이 마냥 기분 나쁘진 않은 모양이다.
나는 얕은 웃음을 흘리면서도 그녀의 뿔을 만지는 건 멈추지 않았다. 왠지 모를 중독성이 있는데다가 세실리가 좋아하니 멈추기가 어려웠다.
"누나."
"응. 아이작."
내 부름에 세실리가 행복한 미소를 띄며 대답했다. 나는 잠깐 말을 멈추며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를 감상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릴리스의 모델이 누나라고 말했잖아."
"응."
"13권에 릴리스의 삽화도 넣을건데 누나를 참고해도 괜찮지?"
"나를?"
"응."
모델, 더 나아가 삽화로 참고한다고 하자 세실리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하긴 모델과 달리 삽화는 그림으로 그리는 것이니 격이 다른 이야기다.
내가 그림에 일가견이 있다지만, 실제 인물을 눈으로 보면서 그리는 것과 상상하면서 그리는 건 하늘과 땅 차이다.
가능하면 칠죄종을 전부 삽화로 그리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여러모로 힘드니 릴리스만이라도 삽화로 넣고 싶었다.
"상관없긴한데 나라도 괜찮아?"
"누나만큼 릴리스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거야."
"그, 그럼 나야 영광이지. 그림은 네가 그릴 거야?"
"응. 부족하겠지만 눈으로 보면서 그리면 좀 더 나을 거야."
"하아..."
왠지 모르겠지만 뜨거운 숨결을 내뱉는 세실리. 나는 의문도 잠시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세실리의 붉은색 눈동자는, 전보다 더욱 진해져 있었다.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것 같은 맹수처럼, 당장이라도 욕망이 폭발할 기세였다.
지금 내가 만지고 있는 뿔도 마찬가지. 끝부분을 제외하면 전부 다 붉은색 투성이다.
"이러는데... 어떻게 참아..."
"... ..."
"아이작..."
"...응. 누나."
그녀는 내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더니 욕망에 패배한 것 같은 말을 꺼냈다.
"그냥 여기서 하면 안 될까?"
그리고 이어지는 단호한 대답.
"안 돼."
"한 번만..."
"안 돼. 계속 그러면 뿔 안 만져줄 거야?"
"히잉..."
다행히도 세실리는 순순히 물러났다.
******
아르웬의 대국민 연설로 세상이 한창 떠들석할 때, 제논 일대기를 발매한 출판사는 바쁘디 바쁜 일정을 보내는 중이었다.
대국민 연설이고 나발이고 그들로서는 물 밀듯이 쏟아져 오는 일거리에 한시라도 쉴 틈이 없었으며, 신기술을 개발한 인쇄소조차 미친듯이 책을 찍어내는 중이다.
본래 제논 일대기는 인간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책이었으나 11권을 기점으로 종족불문하고 널리 퍼져나갔다. 종족을 초월한 사랑 이야기는 독자들의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했으니.
덕분에 출판사 사장은 다시 한 번 돈방석에 앉았지만, 현재 난처한 상황에 직면했다.
"그러니까 당신의 말은... 제논이 보내준 편지를 보여달라는 겁니까?"
"그렇소."
바로 눈 앞의 엘프들 때문에.
인간도 아니고 엘프가 출판사로 찾아오는 일은 여태까지 없었으며, 심지어 알븐하임 내에서도 명문가 소속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출판사에 방문했다.
인간으로 따지면 고위급 귀족에 속하는 자들이라 사장조차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알븐하임은 13권의 내용을 수정하라고 성명문까지 냈으니.
사장은 고급진 비단옷을 입고 당당하게 서 있는 엘프와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그건 보여줄 수 없습니다. 이미 다 태워버렸거든요."
"거짓말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인간."
"제가 거짓말을 왜 하겠습니까? 필체만으로 추적하는 사람이 있는 마당에 그런 건 다 지워야 합니다."
실제로 발생했던 사실을 언급한 사장이다. 세상에는 별의 별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중에는 추적에 능통한 사람들도 있다.
물론 필체만으로 추적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지만, 지난 번 초고 도난 사태 이후로 매사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편지를 다 태운 것? 엘프의 말대로 거짓말이다. 편지 하나 하나가 얼마나 큰 가치를 지녔는데 함부로 태우겠나.
하지만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수는 없는 법이니.
"돈이라면 주겠다. 원한다면 세계수의 이슬도 기꺼이 지급할 수 있지."
"세계수의 이슬이라면..."
"엘릭서의 주재료 중 하나다."
이건 좀 끌리는데. 엘릭서는 만병통치약으로 불리는 약으로, 죽어가는 사람조차 살린다는 명약이다.
대신 그 값이 부르는 게 값인지라 돈이 많은 귀족조차 구매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출혈을 감내해야 된다. 이런 가치를 지닌 엘릭서인데 하물며 그 주재료는?
사장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그러나 곧바로 손해라는 판단이 들었다.
세계수의 이슬이 뉘집 개 이름도 아니고 정식 경매에 나오겠나. 그런 건 보통 경매가 아니라 암시장에 나오는 편이며 돈도 제대로 못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에 사장은 영업용 미소를 유지하면서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세계수의 이슬이라도 안 되는 건 안 됩니다. 없는 걸 줄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세계수의 이슬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녔는지 모르는 건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절하는 겁니다."
회사를 키우기 위해 산전수전 다 겪은 사장이다. 그의 눈에는 이 엘프들이 등처먹기 위해 작업을 거는 거라 판단했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편지를 내놓으라 마라야?'
사장은 황궁에서 파견된 인원의 요구조차 완강하게 거부한 이력이 있다. 조국의 높으신 분들의 제안조차 거부했는데 타국의 인사 정도야 가뿐했다.
무엇보다 사장은 이 엘프들이 싫었다. 오만하기 짝이 없으며 저 깔보는 듯한 시선을 보아라. 그 누가 제안을 받아들이겠나.
"흥.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나보군. 후회하게 될텐데?"
"아까도 말했지만 없는 걸 줄 수는 없습니다. 알븐하임의 명문가에서 오셨다고 하셨죠? 성함을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칼라스 섀도우싱어."
"그러시군요."
누구야, 그게. 사장은 친절한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짜증냈다.
"아무튼 조만간 다시 방문하도록 하지. 그때는 편지를 줬으면 좋겠군."
"제논 씨에게 연락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다. 정확히 사흘 뒤에 다시 오도록 하지."
대표로 추정되는 엘프가 그리 말하면서 모습을 감추었다. 다른 엘프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장은 텔레포트를 통해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 엘프들에 친절한 미소를 싹 지워버렸다. 뒤이어 딱딱해진 표정으로 맞은편을 바라보다가 옆을 슬쩍 쳐다봤다.
옆에는 자신의 충실한 비서이자 믿음직한 직원, 매튜가 서 있었다. 그는 약간 긴장되었는지 식은땀을 흘리는 중이다.
"매튜."
"예, 예!"
"제논이 적은 편지들, 자네가 전부 필사해."
"알겠... 네?"
"앞으로 올 편지들도 필사하고. 나머지는 싹 다 반송시켜. 겸사겸사 소식도 알려주는 게 좋겠지."
사장은 그리 명령을 내리고 혀를 끌끌 차더니 작게 읆조렸다.
"귀쟁이는 역시 안 바뀌는구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