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119화 (120/763)

< 119화 >

나는 무릎을 꿇고 머리까지 박으며 용서를 구하는 아르웬을 보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왕으로서는 물론, 한 사람으로서 매우 굴욕적인 자세다.

솔직히 말해 허리만 숙여도 그녀의 진심이 나에게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약간 과할 정도로 사과를 구하는 걸 보면 그녀에게 있어서 레인이 얼마나 큰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선처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엘프, 그리고 다크 엘프라는 종족이 모두 이러진 않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

그동안 아르웬이 납작 엎드린 상태로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은회색 머리카락이 땅 위에 흩뿌려진 상태이며 고개를 숙이고 있기에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방금 전 분위기를 보나 목소리로 보나 본인의 죄를 뉘우치고 있다는 확실하다. 문제는 아르웬이 허리까지 숙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르웬에게 책임자로서 죄가 있다지만, 본질적으로는 레인이 죄를 저지른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아르웬이 아니라 레인이 바짝 엎드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로 아르웬의 뒷통수에서 눈을 떼어 레인을 쳐다봤다. 레인은 꽤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떨리는 눈동자로 아르웬을 바라보는 중이다.

아마 레인은 본인이 잘못했는데 부모님이 대신 사과한 것과 비슷한 감정을 겪고 있지 않을까. 잘못을 저지른 어린 아이가 본인의 잘못을 명확히 깨닫기 위해서는 다른 누구도 아닌 부모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아르웬에게서 후견을 받는 레인도 크나큰 영향이 있을 터. 나는 이다음에 레인이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조용히 기다렸다.

"여, 여왕님..."

"... ..."

"끄윽... 흑..."

아르웬을 망연히 바라보던 레인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그녀의 곁에 있는 시리스는 차마 이 광경을 못 보겠는지 눈을 감는 중이다.

과연 이다음에 레인은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 나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칠까, 아니면 아르웬처럼 용서를 구할까.

어느 것이 되었던 간에 레인이 벌을 받는 건 절대 변하지 않는다. 이미 쓴맛을 제대로 보았으니 괜찮겠지만, 여기서 확실한 처벌이 들어간다면 그 효과는 배가 된다.

내가 속으로 레인에게 어떤 벌을 내려야 적당할지 고민하고 있을 쯤, 레인은 눈을 질끈 감더니 아르웬의 곁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1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아르웬처럼 바짝 엎드린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 ..."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나는 바닥에 엎드린 엘프 두 명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슬쩍 시리스를 쳐다봤다. 왠지 상황이 기묘하게 바뀌어 눈치를 보는 것이었으나 그녀는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다.

잠깐 눈을 떴을 때 나와 눈을 마주친 그녀는 지그시 감더니 이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이윽고 아르웬의 곁에 서더니 부드러우면서도 절도있는 동작으로 천천히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 ..."

"레인을 막을 수 있었는데도 막지 않고 방관한 점.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니. 당신까지 이러시면 어떡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왜 또 엎드리는 거야. 이 사람도 무슨 잘못을 한 건가.

무슨 연쇄작용도 아니고 시리스까지 이러니까 난감하기 그지 없다. 게다가 그림이 이상하다 못해 기묘하다.

세 사람 모두 미모가 출중한 엘프일 뿐더러 심지어 아르웬은 한 나라의 여왕이다. 이로 인해 지난 번처럼 가슴이 간질거렸지만 애써 인내했다.

"후우.."

나는 엎드려서 도통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세 명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이러고 있는 것보다 일으켜 세우는 것이 좋을 듯했다.

"...일단 세 분 모두 일어나세요. 솔직히 레인이면 몰라도 다른 두 명까지 이럴 필요는 없는데 조금 당황스럽네요."

"...나는 내 진심을 그대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아르웬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우울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바닥에 엎드려서 그런지 그녀의 무릎이 흙으로 지저분해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안 그래도 흰색에 가까운 드레스라 자국이 더 눈에 띄었다.

그녀가 일어나자 레인과 시리스도 연달아 일어났다. 레인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히끅거리는 중이었고, 시리스는 무표정이었으나 어딘가 슬퍼보이는 눈빛이다.

나는 뒷목을 매만지며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다가 옆의 세실리를 힐긋거렸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제 3자의 입장을 고수하려는지 관망하는 표정이다.

아무래도 최종 결정 권한을 나에게 맡기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해결하는 편이 이롭겠지.

이에 앞의 세 사람을 바라보며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입 밖으로 꺼냈다.

"아까 세실리 누나에게 들었어. 다크 엘프 자체적으로 레인의 형량을 결정했다고. 500년 동안 감옥에 있는 거라고?"

"그렇다."

"500년이라... 분명 엘프에게도 적지 않은 기간이야. 그렇지? 자그마치 인생의 반을 감옥에서만 있어야 하는 거니까."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500년이면 세상은 설명조차 부족할 정도로 변화되어 있다. 오랫동안 옥살이를 한 사람들이 후에 석방되어도 사회에 적응하지 못 하는 이유가 바로 너무나 크게 바뀐 세상과 사회 때문이다.

그러니 레인이 500년 동안 감옥에서 지내다 석방되어도 적응을 아예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제 막 인격이 형성되려는 어린 아이에게는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단, 초고를 훔친 건 명백한 잘못이며 더군다나 내 저택에 침입까지 했다. 아무리 미성숙한 아이여도 용서받지 못할 일은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생으로 감옥에 집어넣는 것도 문제가 있는데...'

당장 500년 동안은 괜찮을 것이다. 내가 천수를 누려 사망해도 세실리에게 미래를 맡기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이것만으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500년 뒤에 감옥에서 나왔을 때 어떤 괴물이 탄생할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최악의 경우, 세실리의 눈을 피해 내 후손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 악감정이란 악감정은 모두 품고 나올테니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레인에게 과하지 않고 적당하면서도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그런 벌을 내려야한다.

아, 물론 레인 뿐만 아니라 아르웬과 시리스도 마찬가지고. 이 둘은 직접적인 처벌보다는 책임을 져야하는 입장이니 벌이라기에도 민망하다.

나는 머릿속으로 최대한 생각을 정리한 후, 문득 좋은 생각이 번뜩 떠올라 세실리를 바라봤다. 세실리는 내가 바라보자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나."

"응. 말해."

"누나는 나를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했지?"

"맞아. 그런데 그건 왜? 이 사람들과 관련이 있는거니?"

역시 눈치가 빠르다. 나는 대답 대신 애매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세실리는 내 미소를 보고 못 말린다는 듯이 피식거리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알았어. 그래서 무슨 벌을 내리려고?"

"집행유예."

"집행유예?"

"응."

처음 들어본 말인지 세실리가 의문에 찬 표정으로 지었다. 비단 그녀 뿐만 아니라 앞의 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이 세상은 집행유예는커녕 징역이라는 단어조차 없다. 단지 누군가 범죄를 저질렀다면 몇 년 형을 선고한다는 말만 있을 뿐, 법조차 체계적으로 짜여있지 않다.

나는 집행유예가 어떤 형식으로 구성돼 있는지 곰곰히 생각하다가 하나 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두 알다시피 나는 인간이야. 마족이나 엘프에 비해서 짧디 짧은 수명을 가진 인간이지. 500년은커녕 100년조차 버티지 못 하는 건 당연해."

"... ..."

"그러니 레인에 대한 관리는 전적으로 세실리에게 맡길 거야. 단, 레인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는데다가 어린 나이라는 걸 감안하고 어느 정도 감형을 시켜줄거고. 500년이 아니라 300년 정도?"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내 입에서 감형이라는 소리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는지 레인이 감격해하며 다시 한 번 바짝 엎드렸다. 아르웬도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듯, 입을 살짝 벌리며 혼이 나간 것 같은 표정이다.

그러나 이들을 생각과 달리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집행유예의 진정한 대목은 지금부터 나온다.

"아직 내 설명 안 끝났어. 여기서 조건이 붙어."

"조건이라함은..."

"이미 다크 엘프 내부에서 500년 형을 확정지었으니 이건 바꾸지 않을거야. 300년이라는 소리는 집행유예, 그러니까 일종의 감시라고 해야되나? 아무튼 레인이 300년 동안 특별한 사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범죄를 저지른다면, 그대로 500년 동안 감옥에서 지내는거지. 또한 범죄의 강도에 따라 500년 형에서 더 추가시킬 수 있어. 무슨 말인지 알겠지?"

500년 동안 레인을 우리 가문에 종속시켜 수호자 또는 메이드로 삼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썩 내키지가 않는다. 당장 세실리가 우리 가문을 수호할 것이라 선언했는데 굳이 레인까지 끼어들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레인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되, 또다시 비슷한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면 가차없이 500년 동안 감옥에서 썩히게 만드는 것이다.

언뜻 보면 집행유예가 좋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300년 동안 철저하게 감시를 받게 되는 셈이니 행동에 제약이 붙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럼 레인이 특별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300년 동안 얌전히 지내면 무죄라는 겁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시리스가 특유의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비단 그녀 뿐만 아니라 다른 두 엘프의 표정을 보건데 아무래도 이해가 안 되는 것 같다.

하기야 집행유예는 이 세상으로서는 생소하다 못해 새로운 처벌이니 당연한 반응이다.

"절대 아니야. 착각하면 안 돼. 레인은 이미 마땅한 처벌이 내려졌고, 이건 절대 지워지지 않을 낙인이지. 내가 선처하여 한 번 더 기회를 주지만, 그렇다고 무죄가 되는 건 절대 아니야. 너 같으면 300년 동안 감시받고 싶겠어? 심지어 그사이 범죄를 저지르면 변명도 하지 못 하고 500년 동안 감옥에서 썩어야하는데?"

"...몸만 묶이지 않았지, 완전한 자유가 아니라는 거구나."

"맞아. 생소한 개념이라 이해하기 어려울 거야."

명심할 것은, 레인이 무죄가 아니라 유죄라는 것이다.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세실리에게 맡긴 이유도 이때문이다.

"이 시간 이후로 평소처럼 행동해도 상관없지만, 레인은 앞으로 세실리의 감시를 받게 될 거야. 아르웬이 그러지는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 계약이나 각서라도 쓰는 게 좋겠지. 혹시 마법으로도 가능해?"

"가능해. '맹약'이라고, 억지로 부수는 건 거의 불가능한 마법이지. 보통 주종 관계에서나 쓰는 거지만..."

"... ..."

세실리가 말을 흐리며 아르웬을 바라보자 아르웬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악마의 후예인 마족과 신의 선택받은 엘프와의 맹약.

그것도 엘프가 을의 입장이니 기묘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하마. 사실상 우리에게 선처를 해준거나 다름없는 형식의 형벌이니."

"아르웬도 명심해. 이건 무죄가 아니라 유죄를 선고한 거야. 만약 레인이 이와 비슷한 일을 저지른다면 그때는 선처고 뭐고 없어. 무조건 500년 형이야."

"명심하도록 하마. 이는 레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저, 절대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진짜로요!"

레인이 명심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강렬하게 끄덕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에게는 지옥문에 한 발짝 내딛었다 겨우겨우 빠져나온 격이니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다.

뭐, 이렇게 해도 아르웬이 후견인으로서 자격이 박탈당하는 건 어쩔 수 없을거다. 그러나 이건 그들의 사정이고 내가 알 바는 아니다.

무엇보다, 지금은 레인의 처우만 결정한 것이지 아르웬과 시리스가 남아있다. 나는 레인에게서 고개를 돌려 아르웬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르웬 너도 책임을 져야지. 시리스 당신도."

"... ..."

본인들의 차례가 와서 그럴까. 두 엘프 모두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나는 그동안 골똘히 고민했다.

두 사람은 공범이 아니라 방관자였으니 강도는 그리 크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처벌이라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다.

'음... 이걸로 해야겠다.'

사리사욕도 채울 겸, 다양한 지식도 얻을 겸 겸사겸사 좋은 방안이 떠올랐다. 이에 가장 먼저 시리스에게 말했다.

"시리스. 당신은 저와 아르웬 사이의 심부름꾼 역할을 해주세요. 제가 아르웬에게 할 말이나 필요한 게 있을 때마다 연락을 할 수 있도록."

"심부름꾼이라... 알겠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곁에 계속 있어야 하는 겁니까?"

"음... 혹시 제가 필요할 때마다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있나요? 아니면 소환을 한다던가."

과학이 발달하지 않아 전화기도 없고 통신할 수 있는 수단이 편지밖에 없는 세상이다.

그러니 마법으로 때우는 게 가능한지 궁금해 했는데, 때마침 세실리가 적당한 방법 하나를 가르쳐줬다.

"소환 스크롤이라는 게 있어. 대상의 머리카락이나 피를 묻힌 채 스크롤을 찢으면 언제 어디서든 소환할 수 있지. 대신 대상자가 특정 시간 안에 응해야 돼."

"그럼 연락을 씹을 수도 있다는 의미야?"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죄를 갚을 수 있다면 언제 어디서던지 요구에 응하겠습니다."

시리스는 단호하면서도 책임감이 강한 말을 꺼냈다. 워낙 눈매가 사나운 바람에 아까부터 노려보는 것 같은 인상을 줬지만 그냥 표정이 그런 모양이다.

아무튼 시리스의 처우도 결정되었겠다, 마지막으로 아르웬을 쳐다봤다. 아르웬은 나와 눈을 마주치자 긴장한 낯빛이었다.

레인의 후견인인만큼 그녀에게도 큰 책임이 있지만, 이미 머리까지 박은 마당에 크게 처벌하기는 어렵다.

나는 이걸로 괜찮을지 고민하다가 일단 말하기로 정했다. 곤란하다고 하면 강행할 계획이고 절대 안 된다 하면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다.

"아르웬. 너는 여왕이니까 '성지'에 마음대로 오갈 수 있지?"

"그렇다."

"그럼 거기에 있는 책도 좀 빼올 수 있어?"

알븐하임의 성지는 최초로 건설된 도서관이자 역사 그 자체다. 이 세상 모든 역사가 담겨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여러가지 지식이 보관되어 있다.

심지어 엘프에 관한 비판적인 서적도 존재하는데, 엘프는 이상한 부분에서 고집이 강했기에 폐기하지 않고 온전히 보관하는 중이다.

"그, 그걸로 되겠느냐? 그정도라면 시리스에게 지시하지 않고도 내가 공간 이동 마법으로 그대에게 전달할 수 있다."

아르웬은 내 부탁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살짝 놀란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래도 여왕인 그녀에게는 쉬운 부탁인 모양이다.

"그럼 그렇게 해줘. 난 상관없으니까. 가능하면 역사책으로 부탁할게."

"알겠다. 그런데 정녕 그거면 되겠느냐? 여왕인 나에게는 매우 손쉬운 일이라..."

도저히 못 믿겠는지 재차 묻는 아르웬. 그녀는 여왕이니 당연히 쉽겠으나 인간인 나에게는 아니다.

엘레나 교수가 알려줬듯이, 성지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깐깐하면서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한다. 알븐하임에 들어서는 것조차 엄격한 심사가 이루어지는데 성지는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이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가 펜으로 글을 쓰는 시늉을 하면서 대답했다.

"내 직업 잊었어? 그 책을 보고 과연 내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 ..."

"전에도 말했지만, 네가 재미있게 읽은 책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책을 부탁하는거야. 자그마치 성지인데 내가 원하는 책은 있겠지. 만약 없다고 거짓말을 하면... 알지?"

"아, 알겠다. 유의하도록 하마."

아르웬은 혹여 내가 엘프에 안 좋은 이야기를 제논 일대기에 쓸 까봐 무서웠는지 안색이 약간 파리해졌다. 마족의 인식을 악마에서 사람으로 끌어올렸는데 엘프를 끌어내리는 것 정도는 누워서 떡 먹기라 생각할 터.

물론, 이미 정해진 스토리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니 순전히 그녀의 착각에 가깝다. 책 속의 알븐하임이 무너지는 건 이미 결정된 사안이고, 엘프와 다크 엘프가 융화되어 다시 수복하는 스토리는 여전하다.

이들이 이걸 보고 무슨 생각을 할지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마족도 그랬는데 이제와서 무슨 의미를 부여한다고.

"자. 이제 이걸로 처벌은 끝났고... 레인."

"네, 네!"

레인은 내가 부르자 부동 자세를 취하며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아마 그녀는 내가 생사여탈권을 쥐었다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실제로 권한은 나에게 있으니 수틀리면 그녀는 500년 확정이다. 덕분에 철이 좀 든 것 같지만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줄 필요가 없다.

"누누이 말하지만 너는 무죄가 아니라 유죄야. 300년 동안 세실리의 감시 아래에 살아야하는 건 물론, 그 사이에 범죄를 저지르면 500년에다 더 심한 형벌까지 받을 수도 있어. 알겠지?"

"며, 명심할게요! 당신이 죽은 후에도 반드시 가슴에 담을게요!"

"뭔가 어감이 좀 이상한데... 어쨌던 알겠어."

"...혹시 질문 하나 해도 됩니까?"

상황이 종료되려는 찰나, 시리스가 낮게 깔긴 목소리로 나에게 질문했다. 그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녀 쪽으로 향했다.

시리스는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도 특유의 날카로운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무슨 질문을 하려는지 궁금해하여 턱을 까닥였다.

"말하세요."

"심부름꾼의 기간은 언제까집니까?"

"아, 그걸 생각 안 하고 있었네. 제가 죽을 때까지 할래요? 어차피 전 인간이라 당신에게는 짧은 기간일텐데."

어디까지나 분위기를 살짝 완화하기 위한 농담이었다. 하지만 역시 엘프라고 해야할까.

"그럼 대략 80년 정도... 알겠습니다.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받아들일 거예요?"

"그정도 기간이면 알맞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리스는 아무런 토도 달지 않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얼굴을 보니 알아서 납득한 모양새라 도리어 내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보니 평생동안 노예 한 명이 생긴 것 같달까. 나는 머쓱함과 황당함에 머리를 긁적였다가 아르웬을 슬쩍 바라봤다.

"나, 나도 그대가 신들의 품으로 돌아갈 때까지 부탁을 들어주도록 하마. 어차피 성지에 있는 책들은 나조차도 전부 읽지 못 했으니 80년의 기간이 매우 짧게 느껴질 것이니라."

"... ..."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이건 이득이지 결코 손해는 아니다. 부담스러워도 그들이 무리없이 받아들였으니 나도 받아들일 생각이고.

아무튼 간에 이후로 레인에게 초고를 돌려받음으로서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고, 초고가 진품인지, 그리고 훼손된 부분이 없는지 체크했다.

다행히 지금까지 보관을 잘 하고 있었는지 훼손된 부분은 한 곳도 없었다.

나는 깨끗한 초고를 훑어보다가 문득 궁금한 게 떠올라 앞의 세 명을 바라보며 질문을 꺼냈다.

"흠... 아참.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저택에는 어떻게 침입한 거야? 분명 황궁에서 파견한 기사단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는데 조금 이상해서. 다크 엘프가 그정도로 강해?"

"강하기 보다는 그들의 능력이 이질적인 것이니라. 마법사가 없는 이상 그들을 감지하는 건 매우 어렵지."

대답은 아르웬에게서 나왔다. 나는 그녀에게 시선을 두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황궁에서 파견나온 기사단은 엄청 강하다고 하셨는데 기사로는 어림도 없어?"

"실루엣 정도는 보이겠지만 은밀한 작업을 파악하는 건 어려울 것이니라. 이 탓에 인간 기준으로 백작급 이상 저택에는 강화형 탐지 마법이 설치되어 있지. 그 밑으로는 잡범들만 막는 탐지 마법이 설치돼 있고."

풀업 영웅 질럿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다크 템플러 한 명 못 이긴다는 건가. 옵저버(마법사)가 무조건 있어야겠네.

설명을 들으니 다크 엘프는 전생의 여러 매체에서도 나온 것처럼, '은신'에 특화된 종족인 듯했다. 직업적으로 도적이 아주 잘 어울릴 것 같다.

'만약 종족 전쟁에 다크 엘프마저 참전했다면...'

안 보이는 곳에서 인간 지도자의 목을 썩둑 썩둑 썰고 다녔을테니 100% 확률로 패배했을 것이다. 엘프는 뒷공작(암살)보다는 언제나 전면전을 선호했으니까.

하지만 전황이 불리해지자 어떤 엘프 전사는 어떻게든 승기를 잡기 위해 뒷공작을 벌였다가 엘프의 명예를 실추했다며 구속당했다.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 방법을 그 전사가 가장 먼저 깨닫게 되었는데도 말이다.

만약 엘프들이 조금만 그 사실을 일찍 깨달았다면 그 엘프 전사는 영웅으로 추앙받지 않았을까. 나는 그 엘프 전사에 대해 떠올리다가 때마침 앞에 아르웬도 있겠다, 그 사람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질문하기로 정했다.

책에서는 감옥에 투옥되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전쟁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아르웬.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될까? 종족 전쟁 당시 법을 어겼다고 투옥당한 엘프 전사에 대한 건데."

"그 전사는 현재 석방되어 본인의 저택에서 칩거 중이다. 아마 알븐하임으로부터 배신당했다는 아픔 때문이겠지."

"... ..."

"알븐하임으로서는 애국자와 뛰어난 전사를 잃은 셈이니 매우 큰 손실이니라. 나조차도 복귀해달라 요청했지만 가볍게 묵살당했지."

확실히 조국에서 배신당한 군인의 아픔은 이루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본인의 선택이 정답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면 원망이 더더욱 깊어졌겠지.

실제로 제논 일대기에서 '교만'을 담당하고 있던 엘프도 이와 비슷한 아픔을 겪고 있다. 그는 알븐하임의 추악한 현실에 분노하여 스스로 악마로 전향했다.

'그래도 덕분에 좋은 스토리를 짤 수 있겠다.'

알븐하임이 악마들의 손에 멸망하는 건 정해진 수순이지만, 그 이후의 과정에서 영웅이 등장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대충 스토리를 짜는 것도 잠시, 앞의 세 사람을 하나하나 둘러봤다. 그들은 여전히 긴장한 표정으로 내 입이 떨어지기까지 기다리는 중이다.

이에 피식거리며 능청스레 입을 열었다.

"이제 다 끝났는데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 나도 딱히 할 말은 없고."

"저, 정말 끝이에요?"

레인이 불안에 떠는 목소리로 묻는다. 나는 별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털썩!

긴장이 풀리기라도 한 것일까. 레인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옆에서 시리스가 다급하게 부축해준 덕에 겨우겨우 일어설 수는 있었지만, 갓 태어난 산양처럼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다크 엘프 두 명을 쳐다보는 것도 잠시, 아르웬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은회색 눈동자에는 미묘한 감정이 섞여있었다.

감사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자비를 베풀어줘서 고맙다는 건지. 어쨌거나 호의적인 감정인 건 확실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지저분해진 그녀의 무릎이 신경 쓰였다. 그녀가 엎드려 사과한 것도 영 그랬는데 더러워진 무릎을 보니 내가 다 불편하다.

"잠깐 실례할게."

"그, 그대여? 지금 무슨..."

툭- 툭-

나는 아르웬이 당황하건 말건 허리를 살짝 굽히며 그녀의 더러워진 무릎을 손으로 털어줬다. 순백에 가까운 은회색 드레스라 세탁을 해야겠지만 일단 흙먼지나 털어주는 식이다.

다행히 마법 처리라도 한 건지 아니면 재질이 좋은 것인지 손으로 턴 것만 해도 전보다 훨씬 깨끗해졌다. 얼룩이 묻어있지만 물로 빨아도 충분할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알븐하임의 여왕이 엎드리는 건 좀 과했어. 너는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좀 불편하더라."

"... ..."

"비록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사이가 조금은 어색해지겠지만 가능하면 축제 때처럼 지내자. 알겠지?"

아르웬의 무릎을 다 털어준 뒤에 굽혔던 허리를 서서히 폈다. 아르웬은 내 말을 듣고 뺨을 살짝 붉혔다가 고개를 아래로 숙이며 작게 대답했다.

"...알겠다."

"그럼 이제 다 끝났으니까..."

길고 길었던 초고 도난 사건의 결과는.

"우리는 이만 가볼게."

레인에게 집행유예를 떨어뜨림으로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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