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83화 (84/763)

< 83화 >

제논 일대기가 휴재를 선언하여 많은 이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지만, 그걸 비웃기라도 하듯 '카이르 외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이르 외전은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카이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아냈으며, 많은 독자들은 기대와 의문을 가지며 책을 구입했다.

다른 사람의 책이었다면 금방 관심을 껐겠지만 자그마치 제논 일대기 작가의 작품이다. 그러니 외전이어도 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본편은 아니나 기나긴 휴재 기간 동안 공허함을 달래줄 수 있다면 외전으로도 충분했다.

[마지막 장면에 카이르의 정체가 밝혀진다. 절대로 결말을 입에 담지 말 것.]

[외전이지만 제논 일대기 본편과 깊은 연관이 있는 책. 팬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한다.]

[외전이라고 했지만 단순한 외전이 아니다.]

그리고 외전을 정독한 독자들의 반응은 격렬했다. 위의 평가처럼 단순한 외전 정도가 아니었으며 본편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구입해야 하는 책으로 탈바꿈되었다.

왜냐하면 '카이르'의 정체는 바로 제논의 스승이었으며, 외전에는 스승의 과거사를 다루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스승이 어떤 배경에서 태어나 성장했는지. 어떤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왔는지. 또 그 과정 속에서 어떤 인연을 만났는지.

훗날 엘프 여왕이 될 여인과 어떤 이유로 만나게 되었는지, 마지막으로 어떻게 하여 그녀와 사랑을 꽃피웠는지.

결코 불가능할 거라 단정지었던 인간과 엘프 간의 사랑을 달콤하게 녹여냈으며 특히 카이르의 묵묵한 독백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기 충분했다.

-햇살 같은 그녀의 미소를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전에 설명했지만 종족을 불문하고 마나를 수준급 이상으로 다룬다면 노화가 더디게 진행된다. 엘프와 마족이 장수하는 이유가 이때문이며 반대로 인간과 수인이 단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카이르도 이 점을 잘 알고 있기에 불에 달군 쇠를 망치로 두드리듯이 스스로를 단련시켰다. 엘프에 비해서 짧디 짧은 수명을 악착같이 늘려 사랑하는 여인, 엘리샤의 미소를 보기 위해서.

이 과정 속에서 훗날 '질투'를 담당할 사람을 만나 가르침을 내리고, 마지막으로 '제논'과 만나는 것으로 외전을 깔끔하게 끝냈다.

[현실적이어서 더욱 공감가는 이야기. 과연 그의 노력이 의미가 없었을까?]

[엘리샤도 카이르의 진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여태껏 적지 않은 독자들이 엘프와 인간의 사랑 이야기가 너무 허무맹랑하다며 비판했지만, 외전에서 카이르의 진심이 드러나자 평가는 180도 뒤집어졌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에서 현실에서 몇 번 쯤은 있을법한 이야기로.

수명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미소를 보기 위해 스스로를 갈고 닦는다. 어지간한 각오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이야기였으며 그렇기에 더욱 애절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본편에서 카이르와 엘리샤의 관계가 드러났을 때는 다소 뜬금없었지만 외전에서 모두 명확하게 해소시켰다.

[둘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진다. 과연 그들의 이야기는 행복으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비극으로 끝날 것인가?]

[이미 불길한 징조는 여럿 보였다. 하지만 독자들은 행복을 원하는 중이다.]

[카이르가 죽는다면 엘리샤도 괴로워할 것.]

하지만 독자들은 외전이 등장하자 더욱 불안해졌다. 카이르와 엘리샤의 애절한 스토리가 끝에는 비극으로 치닫을까봐.

이미 본편에서 카이르가 떠나기 전, 엘리샤에게 남겼던 말로 하여금 독자들에게 불안감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더 나아가 본편의 끝에 제자였던 '질투'와 맞닥뜨리기까지.

다음 본편이 나와야만 이 불안감을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본편은 최소 1년이 흘러야 한다. 독자들도 떼를 써봤자 나오는 건 하나도 없다는 걸 알고 있어서 잠자코 기다렸다.

출판사에서 깜짝 놀랄만한 소식을 전달하기 전까지는.

[메디아 출판사에서 대신 전달해드립니다. 제논 작가님께서 본인의 작품에 등장하는 장면을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해도 상관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음악으로 표현하든, 그림으로 표현하든, 조각으로 표현하든 말이죠. 수익을 창출하셔도 상관없다 하셨으니 예술가 분들은 마음 놓고 표현하셔도 됩니다.]

희대의 걸작, 제논 일대기를 또다른 예술로 표현한다. 이 소식 하나만으로도 예술계에 몸을 담고 있던 독자들을 흥분시켰다.

특히 테르스 왕국의 반응이 아주 격렬했는데 당연하게도 문화강국인 테르스 왕국에게 있어서 예술은 큰 폭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비록 미네르바 제국에서 다양한 술수를 동원해 많은 문화를 빼았겼지만 테르스 왕국에는 여전히 유명한 예술가들이 모여있다.

또한 제이로스 혁명이 터지고 나서 예술은 귀족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문화로 바뀌었다. 이러한 이유로 테르스 왕국으로서는 이 천금 같은 기회를 절대 놓칠 수가 없었다.

[테르스 왕국. 제논 일대기를 표현하고 싶은 예술가들은 신인, 기성 구분하지 않고 국가 차원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겠다. 우리는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문화를 원한다.]

테르스 왕국의 귀족들이 미네르바 제국의 귀족에 비해서 맵다지만 문화에 한해서는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반대로 미네르바 제국은 예술을 귀족의 전유물로 인식하는 중이라 대다수의 예술가들이 테르스 왕국으로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제국에서 막대한 양의 자금을 지원해도 예술가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명예'라면 죽고 못 사는 이들이 널려있는 중세였으니까.

특히 예술가들에게 명예란 목숨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 애시당초 돈보다 명예를 목적으로 예술계에 몸을 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예술가들이 배고픈 직업이라는 인식이 생긴 이유다.

그러니 귀족의 전유물이 될 바에야 모든 사람이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그런 예술가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또한 이번에 발생한 '이벤트'는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제논 일대기 속 장면을 어떻게 표현할지, 그리고 얼마나 잘 표현하는지에 따라 본인의 평가가 극명하게 나뉠테니까.

[리루스 악단의 지휘자 리루스. 부족한 실력으로나마 사크란의 일생을 작곡할 거라 말해... 작품의 명성에 먹칠을 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화가 이마르 또한 사크란의 최후를... 인생에 있어서 가장 뜻깊은 경험이 될 것이다.]

그중 가장 인기 있는 명장면은 단연코 사크란의 최후였다. 비참했던 마족의 인식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제논 일대기의 독자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장면.

가장 유명한 장면인만큼 많은 사람들이 기대감을 가졌으며 헬리움의 관심 또한 그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 또한 정말 기대가 된다는 말까지 남기며 시간이 되면 전시회에 방문하겠다고 언급했다.

물론, 사크란의 최후 외에도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있는 명장면들은 다양하다. 독자들은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렸으며 예술가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개성적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 속에서 아예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으니, 바로 '수익 창출'이다.

아이작은 2차 창작을 통한 수익 창출을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말했다. 제아무리 예술가가 배고픈 직업이라지만 그건 신인이었을 때 이야기지, 어느 정도 이름을 날리게 되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진다.

예술가가 '돈'보다 '명예'를 중시하는 건 맞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가치를 좀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건 바로 돈 즉, 몸값이다.

이탓에 사람들은 거장들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여기서 의외의 상황이 펼쳐졌다.

[수익은 기부 형식으로 받겠다. 모두가 쉽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 될 것.]

[제논 일대기는 남녀노소, 그리고 계급 상관없이 누구나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나 또한 그러겠다.]

[비싼 가격을 받으면서 전시하는 건 작품의 명성에 먹칠을 가하는 일. 용납할 수 없다.]

신인은 물론이고 이름을 날린 기성마저도 수익을 창출하지 않고 기부 형식으로 받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 이유는 실로 간단했다. 제논 일대기는 단순한 소설 정도가 아니라 계급을 막론하고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제논 일대기가 세계적으로 큰 명성을 얻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바로 위의 이유 때문이었으니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는 순간 명성에 누를 끼치는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만약 지구였다면 원작자가 허락한 순간 너도 나도 좋다며 수익을 창출하겠지만, 여기는 명예가 목숨 이상으로 중요한 세상이어서 방향이 이상하게 흘러간 것이다.

[기부금 또한 문화계의 발전을 위해 사용될 것. 세상에는 미처 재능을 꽃피우지 못 한 채 사그라드는 인재들이 많다.]

[이번 일을 통해 아이들의 꿈을 키울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리루스 악단과 화가 이마르의 협업. 이외에도 수많은 예술가들이 협업할 것이라 말해...]

나비효과라고, 2차 창작 허가의 영향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예술가들은 어차피 제논 일대기를 표현할 거, 아예 공동 전시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거장들은 하나 같이 자존심이 강하지만 결국 제논 일대기의 팬에 지나지 않았으니 잠시 접어뒀다. 도리어 그들은 자기들끼리 싸워봤자 아이작이 싫어할 뿐이라며 협업을 시작했다.

아이작은 단지 '팬아트'를 받는다는 개념으로 2차 창작을 기꺼이 허락한 거지만 그 파급력은 예상을 한참 웃돌았다.

특정 계층만 즐기는 문화가 아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가 탄생하기 시작했으며 발전을 앞당기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물론 즐기는 사람이 있다면 즐기지 못 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

"아니. 내가 작가인데 정작 내가 즐길 수가 없네."

그 사람은 바로 제논 일대기의 원작자이자 파란을 일으킨 아이작이었다.

*****

나는 신문을 통해 전달된 소식들을 보며 황당함을 금치 못 했다. 단지 팬아트를 받는다는 개념으로 2차 창작을 허락한 건데 전시회 수준으로 규모가 커졌다.

심지어 전시회를 어디에서 개최할지 미네르바 제국과 테르스 왕국이 서로 피터지게 싸우는 중이다.

미네르바 제국은 출판사가 자기네 나라에 있으니 출판사 근처에 개최해야 한다며 소리쳤고, 테르스 왕국은 개소리 말라며 자신의 수도에서 개최할 거라 꿋꿋하게 버티는 중이다.

'시각적인 예술품도 못 보는 게 아쉽네.'

출판사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 나는 이렇게 부탁했다.

다른 건 몰라도 눈으로 볼 수 있는 예술품은 나에게 따로 보내달라고. 그러나 출판사는 힘들다는 답변을 보냈다.

초고의 경우는 우편물로도 보낼 수 있어서 추적당할 염려는 없지만 예술품 같은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용량이 매우 커 우편물로 보낼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며 이탓에 추적을 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아버지도 출판사의 설득이 일리있다며 아쉽지만 포기하는 게 좋다고 말씀하셨다.

"나도 보고 싶은데..."

팬아트를 볼 수 없는 작가라니 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 상황인가. 나는 턱을 괴며 자기들끼리 신나게 떠드는 신문을 바라봤다.

마음 같아서는 개최하는 곳으로 달려가 구경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 시간이 없다.

지금 당장 어디에서 개최할지 치고 박고 싸우는 중인데 방학은 불과 보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러니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한다는 뜻인데 3학년이 되지 않는 이상 이것마저 힘들다.

"쓰읍... 나중을 기약해야겠네."

팬아트를 보지 못 하는 작가라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상황일까.

나는 아쉬움을 뒤로 하며 신문을 내려놓았다. 지금은 전시회보다 중요한 일이 남아있다.

그것은 바로 내 책상에 한가득 쌓여있는 팬레터들. 이중에 가장 눈에 띄는 건 분홍빛 편지지였다.

[체리 블라썸 로즈베리]

편지를 집으니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1년이 넘는 기간동안 꾸전히 팬레터를 보내준 독자의 이름이다.

단 한 번도 답신을 해주지 않았는데도 한결같은 모습을 보아하니 절로 미소가 나왔다. 이런 사람이 진짜 팬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곧 있으면 아카데미에 입학하겠네.'

1년 전에 보낸 편지에서 2년 후면 아카데미에 입학한다고 했으니 아마 내년에 입학할 터. 운이 좋으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따스한 미소를 유지하며 체리의 팬레터를 읽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로즈베리 가문의 체리에요. 최근 날씨가 부쩍 더워졌어요. 작가님도...]

언제 봐도 느끼는 거지만 필체가 아름답고 글솜씨도 예사롭지가 않았다.

내 글이 담백하지만 가끔씩 매운맛이 있다면 체리는 가볍고 통통 튀는 맛이 있다고 해야할까. 무엇보다 여느 귀족처럼 어려운 말을 쓰지 않아 글이 눈에 잘 들어왔다.

'이런 애가 소설을 써야하는데.'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체리의 팬레터를 끝까지 정독했다.

이리하여 내 방학은 짦고 가늘게 지나갈 것처럼 보였다.

[테르스 왕국. 전시회 개최 포기. 과연 그 이유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미네르바 제국.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높은 마이샬 영지에서 개최를 원해...]

이틀도 되지 않아 우리 제국의 높으신 분들이 트롤링을 저지르기 전까지는.

"이건 또 뭐야."

설마 리나와 레오르트 남매가 추진한 건가.

물론 내 입장에서 트롤링이지 현재 제국민들은 찬양하기 바빴다.

무엇보다 방학 기간도 얼마 남지 않아 볼 수 있을지부터가...

"아이작! 소식 들었니? 아카데미에서도 방학 기간을 늘렸다고 하는구나!"

"... ..."

"리루스 악단의 음악을 듣는 게 평생의 소원이었는데... 이 엄마는 정말 기쁘단다."

아무래도 내 방학은 그냥 굵게 지나갈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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