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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55화 (56/763)

< 55화 >

미네르바 제국의 황녀, 리나의 아카데미 생활은 의외로 평범한 편이었다. 그녀는 입학 전까지만 해도 피곤한 일들만 있을거라 예상했다.

피곤한 일이라함은 자신의 오라버니이자 황태자, 레오르트가 줄곧 겪는 것처럼 파리가 꼬이는 것이다. 실제로 입학 당시 소피아라는 영애가 달라붙은 걸 시작으로 첫 강의 시작 전에 잭슨이 무모하게 접근한 걸 보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예상 외로 그런 상황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헬리움의 공주이자 입학 첫 날부터 새로 사귄 친구, 세실리 덕분이다.

입학식부터 비범한 행동을 선보여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끌었고, 더 나아가 아름다운 외모와 더불어 고혹적인 분위기로 기품을 뿜내는 미인.

이미 세실리에 대한 이야기는 헤일로 아카데미에서 파다하게 퍼진지 오래다. 이때문에 세실리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찾아오는 경우가 적지 않아 있었으나 그것마저도 무산되었다.

리나의 옆에 세실리가 있듯이, 세실리의 옆에는 리나가 떡하니 있었으니까. 어지간한 용기가 아니라면 감히 이 둘에게 접근할 사람은 없었다.

그 덕분에 나름대로 평탄한 아카데미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새로 사귄 친구도 있겠다, 황궁에서는 못 다한 것들을 즐길 수 있어서 그녀에게는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무엇보다 예상치 못한 수확이 하나 있다. 세실리와 정답게 대화를 나누던 리나는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질문을 날렸다.

"세실리.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응? 물어봐. 리나의 질문이라면 언제나 환영이니까."

리나의 부탁에 세실리는 흔쾌히 허락했다. 이에 리나는 가면 따위는 벗어던진 채 그녀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을 꺼냈다.

"세실리도 제논 일대기의 저자를 찾고 있지?"

"제논 일대기?"

세실리는 리나의 질문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이에 리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하고 싶은 질문을 이었다.

"응. 헬리움에서도 당연히 찾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거든."

이 질문을 한 이유는 간단하다. 직접적으로 말은 못 하지만 조금이라도 세실리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

세실리와 가까워지면 질 수록 깨닫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세실리만 그런 건지 잘 모르겠지만 마족은 제논 일대기의 저자를 그야말로 은인을 넘어 구원자로 생각하는 중이다.

세계와 반강제적으로 단절되고 오직 어둠 속에 숨어서 살아야하는 마족들이었으니 구원자로 대우하는 건 당연한 일일 터. 그러니 마족들도 제논 일대기의 저자를 찾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일 것이다.

그리고 리나, 자신은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누구인지 꿰뚫고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공동 저자'라고 할 수 있겠지.

'붉은 사자가 해준 이야기를 아이작이 적은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중지 손가락에 굳은살이 심하게 박히지도 않을테고.'

황태자, 레오르트는 붉은 사자로 명성을 떨친 호크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로 확정지었다. 하지만 자신은 다르게 생각하는 중이다.

평생동안 무예만 단련한 기사에게 그만한 필력이 있다? 리나로서는 근거가 빈약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호크가 스토리를 대략적으로 알려준다면 아이작이 대필하는 식으로 제논 일대기가 발간된다고 예상했다.

리나가 머릿속으로 그런 추측을 하는 동안 그녀의 말을 들은 세실리는 눈을 깜빡였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찾고는 있지. 그래도 난 신경쓰지 않으려고."

"응? 어째서?"

세실리의 대답에 리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자신 같았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을텐데 세실리는 아니라고 답했다.

이에 세실리는 그윽하면서도 아련한 눈빛을 짓더니 조용히 말했다.

"나도 처음에는 그 분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실례를 끼치는 것 같아서."

"실례?"

"응. 무엇보다 지금 당장은 학업에 집중하려고. 입학식 때 내가 한 연설을 들었지? 우리 마족도 인간처럼 살아가는 걸 보여주겠다고 말이야. 그 분도 분명 그러기를 원할거야. 그러니 그 분을 찾기보다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걸 이루어야지. 찾는거야, 훗날 그 분이 스스로 정체를 밝힐 때 찾아가도 늦지 않을테고."

싱긋 웃으며 설명을 꺼낸 세실리에 리나는 살짝 멍한 표정을 지었다. 황실의 힘을 동원해서 찾은 자신과 레오르트와 달리 매우 어른스러운 결정이었다.

물론 세실리는 이미 '그 분'을 찾았기에 위의 말을 꺼낼 수 있었지만 관찰력이 뛰어난 리나는 저 말이 진심이라는 걸 곧장 눈치챘다. 그래서 약간 떨떠름해졌다.

"...그래? 알았어."

그래서 세실리에게 힌트를 주는 건 관두었다. 마음을 주고받는 친구끼리, 그리고 제논 일대기를 사랑하는 팬들끼리 이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으나 그녀의 다짐을 듣고 접어버렸다.

세실리는 리나의 반응을 듣고 빙긋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서 그녀에게 제안했다.

"잠깐 화장실 갔다 올래?"

"...응. 그러자."

리나는 그녀의 제안을 가볍게 수락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강의실 문 밖으로 나가기 직전, 그녀의 눈에 한 사람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책상에 엎드려 얼굴을 숨기고 있는 마리의 모습이. 평소와 달라도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귀가 왜 저렇게 빨갛지?'

은은한 푸른빛을 띄는 흰색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귀는 한 눈에 봐도 빨갛게 익어있었다. 옛날부터 마리를 보았던 리나에게는 다소 신기한 반응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궁금해서라도 그녀에게 다가갔으나 리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아주 어릴 때 저지른 실수로 인해 마리가 자신에게 깊은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으니까.

그러니 지금은 궁금해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걸까? 조금 걱정되긴하네.'

마지막으로 그녀는 이런 부분에서는 눈치가 '살짝' 부족했다. 리나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마리를 바라보다가 이내 문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한편 책상에 엎드려 누워있던 마리는...

'나랑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분명히 그랬어. 그럼... 아니다. 일단 옷은 뭘 입고 가야할까? 그냥 교복을 입고 오라고는 했는데...'

머릿속이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

마리와 만나는 시간은 저녁 6시로 잡았다. 숙소에서 준비물을 갖고 올 겸 겸사겸사 저녁을 해결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마리는 그냥 처음부터 같이 가면 안 되냐고 의문을 드러냈지만 내가 보여줄 게 있다고 하자 금방 입을 다물었다. 입을 다물 때 얼굴이 붉어진 건 덤이다.

아무래도 그녀는 내가 일종의 고백? 비슷한 걸 위해 따로 만나는 걸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일단 고백은 맞긴하다만 오해를 풀어줘야할지 말아야할지 약간 고민되었다.

'...설마 실망하지는 않겠지?'

그리고 현재로 돌아와, 나는 약속한 식당 앞에서 마리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다. 복장은 사복을 입기에 애매하여 교복을 입고 있었다.

식당은 지난 번 레오르트와 리나 남매와 함께 식사를 나누었던 그곳이다. 방음이 되는 식당은 내가 알기론 여기밖에 없었다.

'우선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이걸 보여주자.'

살짝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내 손에 들린 우편 봉투를 다시 체크했다. 우편 봉투 속에는 여태까지 내가 썼던 제논 일대기의 초판본이 들어있다.

마리와의 저녁 식사가 끝난 후, 그녀에게 이걸 건내주면서 모든 상황을 설명할 계획이다. 과연 그녀가 믿을지 말지 미지수이긴하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할 예정이다.

"아이작!"

내가 다른 의미로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진득히 기다리는 중에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이에 고개를 돌리니 은은한 푸른빛을 띄는 백발의 소녀, 마리가 손을 붕- 붕- 흔들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화장이라도 한 걸까, 내가 당부한대로 교복을 입었지만 왠지 전보다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다. 나는 여태까지 본 것보다 더욱 생기넘치는 그녀의 모습에 살짝 멍해졌다.

확실히 다른 사람에게 묻혀서 그렇지, 마리도 예쁘긴 예쁜 편이다. 특히 오늘은 작정하고 만나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예쁜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돌아다녔다.

"내가 너무 늦진 않았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마리가 헤헤 웃으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행복 바이러스를 뿜내는 그녀의 미소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냐. 나도 방금 왔어. 시간도 6시가 아니고."

"그럼 다행이네. 이제 안으로 들어가자."

마리는 한시라도 빨리 나와 단 둘이 있고 싶었는지 재촉하는 뉘앙스로 말했다. 그걸 들으며 정말 나를 좋아하는구나, 라고 다시금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저절로 잔잔한 미소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항상 말했지만 마리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다른 곳에 신경 쓸 필요가 하나도 없고 오로지 그녀에게만 집중할 수 있으니까.

그녀에게 내 비밀을 고백하려는 결정은 결코 그릇된 선택이 아니다. 나는 초판이 든 우편을 왼쪽 겨드랑이에 끼운 뒤 오른손을 내밀며 능글맞게 제안했다.

"그럼 가실까요, 레이디?"

"... ..."

내가 그리 말하자마자 마리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졌다. 단순한 매너인데 저런 반응을 보이니 나로서는 의아해질 수밖에 없다.

'왜 저러지? 부끄러운 건가?'

집에서 배웠던 예법 상으로 이 행동은 일종의 매너에 불과하다. 이건 어머니에게 배운 거다.

하지만 뒤늦게 어머니가 말해줬던 게 하나 더 떠올릴 수 있었다. 이 행동은 어디까지나 사교회나 무도회처럼 '공식적인 행사'에서만 매너로 작용하는 것이지, 평상시에서는 의미가 180도 달라진다고.

만약 평상시에, 그것도 남성이 여성에게 이 행동을 선보인다는 건 '나는 당신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품고 있어요'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것만으로도 나에게 기겁할만한 사유인데 문제는 여기가 끝이 아니다.

"...응."

꼬옥-

마리가 부끄러워하면서도 내 손을 살포시 붙잡았으니까. 붙잡은 손에 미약한 떨림과 절대 놓치기 싫다는 의지가 동시에 느껴졌다.

그 덕분에 이번에는 내 얼굴이 빨갛게 익을 차례였다. 남자가 내민 손을 여자가 잡아주는 행동?

'나 또한 당신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품고 있다'라는 화답이다. 그게 아니라면 웃음만 흘리고 정중하게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리는 내가 내민 손을 부드럽게 잡아줬다. 내 간접적인 고백을 받아준 거나 마찬가지였다.

"... ..."

우리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한 채, 손만 붙잡고 서로를 바라봤다.

나는 어떻게 할지 갈피를 잡지 못 하다가 어색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갈까?"

"...응."

마리가 고개를 푹 떨구며 개미가 지나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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