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결의를 다지고 다음 날이 밝아왔다. 오늘 시험을 치는 전공은 없고 과제만 제출하면 그만인지라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충분하다.
원래는 아무 일도 없기를 빌었으나 여러가지 사건사고를 겪고나서 마음가짐을 바꿔먹었다. 아무 일도 없기를 비는 게 아니라 무슨 일이 발생할시 그에 따른 대처 능력을 키우자고.
가족에게 의지하는 것보단 나 스스로의 능력을 키우자고 말이다. 마음가짐을 이렇게 잡으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간에 세실리에게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 묻는 게 우선이다. 그녀는 과연 어떤 의도로 나를 유혹한 것일까. 제대로 된 증거도 제시하지 않았는데 그런 행동을 선보여서 당황을 넘어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리에 대한 처우도 긴 시간 고민에 고민을 거쳐 결정을 바꿀 수 있었다. 정말로 그녀를 위한다면, 뒤늦게 비밀이 밝혀져 마리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자고.
적어도 나를 좋아하는 여자가 내 우유부단함 때문에 피해를 보는 것만큼은 막아야 할 것 같다. 비록 다른 사람과 달리 마리는 내가 제논 일대기 저자라는 걸 짐작조차 못 하고 있지만 잘못하면 배신감마저 들 수도 있다.
자기보다 다른 사람이 더 믿음직스럽냐고. 어째서 자기한테는 그 비밀을 알려줄 수 없던거냐고.
우연히 인연이 닿아 힘겹게 쌓아올렸던 관계인데 내 안일한 판단으로 한꺼번에 무너질까봐 걱정된다. 게다가 마리는 눈치가 상당히 빠른 편이라 어쩌면 낌새를 파악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나는 어제 일로 그녀에게 한 번 상처를 줘버렸다. 나 같아도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단 둘이 있는 걸 보면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다.
'일단은 수업부터 듣자.'
나는 다시 한 번 굳게 다짐하며 강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첫 수업은 철학이며 마리, 세실리, 리나 이 세 명이 함께 듣는 강의다.
리나는 몰라도 어제 마리와 세실리는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분명히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과연 내가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으나 지금은 나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한동한 이러한 상황이 반복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상황은 상황대로 꼬이게 되고 나와 더불어 다른 사람도 난처해진다.
이에 속으로 재차 다짐을 하며 강의실에 거의 다 도착한 순간이었다.
"엇."
"어?"
공교롭게도 강의실 문 앞에서 세실리와 만나게 되었다. 내가 당황한 것처럼 세실리도 나와 만날 줄은 몰랐는지 눈이 동그랗게 떠진 상태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내가 쉬이 입을 열지 못하고 있을 때 쯤, 세실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더니 나긋나긋한 어조로 인사했다.
"안녕. 좋은 아침이네."
"아... 네. 좋은 아침이네요."
"후훗."
내가 얼떨떨한 심정으로 인사하자 세실리는 살풋 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미소를 보니 문득 어제 일이 떠올라 괜히 민망해졌다.
그에 내가 살짝 부끄러워하며 뒷목을 매만지고 있을 쯤, 세실리는 나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제 일은 정말 미안했어요."
"네?"
"당신에게만큼은 그랬으면 안 됐는데... 제 잘못이에요. 다시 사과드리겠습니다."
뜬금없는 사과와 존댓말에 당황을 숨길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에 세실리의 태도가 이리 바뀐걸까.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세실리는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꾸벅 숙이며 제 마음을 표현했다.
누가 보아도 정중한 태도요, 인사다.
나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행동에 의문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앞으로 둘만 있을 때는 이렇게 대할 거예요. 당신은 우리 마족의 은인이니 은인에 걸맞는 대우를 해줘야할테니까."
"... ..."
"그럼 안으로 들어갈까요?"
당최 무슨 시츄에이션인지 하나도 감이 잡히질 않는다. 나는 싱긋 웃으며 강의실 안으로 들어간 세실리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봤다.
그녀의 말마따나 현재 강의실 문 앞에는 우리 둘 밖에 없긴하다만... 존댓말은 조금 그랬다.
가까웠던 세실리와 나 사이의 거리가 미묘하게 벌어졌다는 느낌? 평소 나에게 줄곧 장난을 잘 치던 세실리여서 괴리감이 느껴졌다.
'은인이라...'
아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어제 세실리가 말하길 제논 일대기의 저자는 마족의 숙원을 이루어준 은인이라고 했으니까.
더군다나 은인을 만난다면 자신의 몸을 기끼어 바치겠다는 의지까지 피력했다. 나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바뀔만도하다.
원래대로였다면 그러지 말라고, 그냥 평소대로 반말을 하면서 장난쳐도 된다고 당황했겠지만...
'...뭐지?'
가슴 속이 묘하게 간질거렸다. 내 정체를 알고나서 깍듯이 대하는 마족의 공주라니. 이걸 무어라 설명해야 좋을까.
어제 일에 대해서 사과하지 않았더라면 뻔뻔하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녀는 그 부분까지 사과했다. 그것도 고개를 꾸벅 숙임으로서.
나는 강의실 문 앞에 한동안 못 박힌 듯 서 있다가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세실리보다는 당장 중요한 게 있었으니까.
'그래도 뭔가...'
기분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미묘하다.
나는 그런 마음을 지닌 채 강의실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리고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맨 앞자리에 앉은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포착되었다.
무언가 불만인듯,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뾰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리였다. 한 눈에 봐도 그녀의 기분이 저기압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간질거렸던 마음이 싹- 날아가며 긴장으로 대신 채워지기 시작했다. 마리가 저러는 건 필시 어제 일 때문일 것이리라.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나는 눈치없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마리 쪽으로 다가갔다. 오늘은 내가 늦은 것도 있지만 마리가 상당히 빨리 온 터라 옆자리는 비워진 상태다.
뒤이어 내가 마리에게 천천히 다가갈 때 쯤, 기척이라도 느꼈는지 책상에 고정했던 그녀의 시선이 나에게로 옮겨졌다. 하지만 나는 어제 일 때문에 그녀가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일 줄 알았다.
"...아이작!"
푸른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며 반갑게 맞이하기 전까지는. 심지어 팔까지 흔들며 격하게 반겨줬다.
나는 상심했을 것으로 추정되던 마리가 활발하게 대해주자 당황한 것도 잠시, 이내 피식거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그녀답다고 생각해서.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헤어리지도 못한 채 실수를 저질렀으니 사과를 하는 건 변함이 없다. 그래도 납덩이로 짓누르는 것 같던 마음은 약간이나마 가벼워졌다.
"안녕."
"응. 안녕."
내가 특유의 무뚝뚝함으로 인사하자 마리는 해맑게 웃으며 인사해줬다. 방실방실 웃는 얼굴이 정말 귀엽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내가 자리에 앉고 노트를 꺼낸 순간이었다.
"어제는 잘 들어갔어?"
나는 마리의 질문을 듣고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는 밝았으나 그 속에 뼈가 실려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결코 착각이 아닐 것이다.
그에 시선을 옮기니 뭐가 문제라는 듯, 방긋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참 예쁜 미소구나, 라고 생각하겠다만 나에게는 아니다.
마리는 인지하지 못 하고 있겠지만 입꼬리가 미약하게나마 떨리고 있다. 불안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지은 미소라는 의미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 하고 있지만 역시 마음에 담아둔 것이 분명하다. 나는 어떻게 대답할지 한 번 두 번 생각을 거친 후에 입을 열었다.
"잘 들어갔지. 너는?"
"나야 뭐..."
그녀는 말을 흐리며 뒤를 힐끔거렸다. 마리의 시선이 향한 곳은 세실리가 앉아있었는데, 그녀는 현재 리나와 잡담을 하는 중이었다.
"...잘 들어갔지. 별 일 없었어."
"그래?"
거짓말이다. 세실리를 봤을 때 그녀의 눈빛은 잠시나마 낮게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나와의 관계가 어색해지는 것이 싫어서 이런 행동을 보이는 듯했다. 그러면 그럴 수록 마리에 대한 죄책감이 증가했다.
덕분에 결정을 내리기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더이상 그녀가 상처받는 일은 없을테니까.
"아참. 아이작 너 혹시 이번에 나온 제논 일대기 9권 봤어?"
내가 씁쓸함을 감추지 못 하고 있을 때 분위기를 전환시키려는지 마리가 그리 물었다. 미리 예상하고 있던 질문이었던지라 전혀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읽었지. 이번 신권부터는 출판사에서 신기술을 도입해서 물량이 계속 나오잖아? 너는 읽었어?"
"어제 읽었지롱. 칠죄종이라는 개념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제논 일대기를 읽으면 읽을 수록 이 사람의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하다니까? 그리고..."
그 사람, 바로 네 앞에 있어. 나는 속마음을 삼킨 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재잘거리는 마리를 바라봤다.
이렇게 옆에서 바라보니 작고 귀여운 새가 지져귀는 것 같아 심신이 안정되는 기분이다. 이런 소녀에게 상처를 입혔다니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다.
나는 마리가 자기 혼자 신나게 떠드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리."
"응. 왜?"
"너는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얼마나 큰 가치를 지녔다고 생각하고 있어?"
마리는 내 질문을 듣고 큼지막한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한 모습이다.
그동안 나는 턱을 괴며 그녀의 입이 열리기까지 진득하게 기다렸다. 이 질문은 기회가 된다면 리나와 레오르트에게도 질문할 생각이나 우선은 가장 편한 상대인 마리부터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뜬금없이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상관없다. 점심 시간 혹은 모든 수업이 끝난다면 마리와 독단으로 만날 계획이었으니.
이윽고 머지않아 마리는 검지 손가락으로 뺨을 툭- 툭- 두드리더니 본인의 생각을 밖으로 꺼냈다.
"일단 '내'가 아닌 '레킬리스 가문'의 일원으로서 말하자면, 우리 가문은 물론 제국조차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거야. 저자가 세계에 끼친 영향력이 무시무시하거든."
"정말 그정도야?"
"당연하지. 특히 우리 제국과 테이로스 왕국이 저자를 포섭하려고 안달이 나있을 걸? 문화라면 서로 가지기 위해 암투를 벌이는 중이니까. 국가의 내정을 다스리는데 문화만큼 효과가 뛰어난 것도 없지."
"문화라..."
문화라고 하니 쉽게 이해가 된다. 전생의 예를 들자면 중국이 있다.
중국은 과거에 문화강국이라 칭송받았지만, 역사적으로 엄청난 실수를 저질러 본인들이 그 문화를 다 말아먹었다. 그때문에 훗날 미국과 경쟁할 정도로 성장해도 문화가 발목을 잡았다.
물론 문화 발전을 저해시키던 중국 정부의 검열과 강압이 가장 큰 문제이긴 했지만, 애시당초 문화를 다 말아먹은 그 사건만 없었다면 중국은 정말로 그 누구도 막기 힘든 강대국이 되었을 것이다.
'...조금 무섭긴 하네.'
나라는 존재 하나만으로 국가의 문화가 크게 발전된다니,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힘이란 말인가. 하물며 이 세상은 중세 시대를 표방하고 있어 문화를 더욱 중요시 여길 것이다.
내가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마리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다른 의견을 꺼냈다.
"그리고 저자가 쓴 책이 무기가 될 수도 있어. 마족의 인식을 뒤바꾼 것처럼, 다른 종족의 인식도 바꾸는 건 일도 아니겠지. 물론 저자가 그런 의도를 담지 않겠지만 많이 위험할 거야."
"위험하다고?"
"응. 자칫하다간 안 좋은 사상이 멀리 퍼져나갈 수도 있으니까. 이때문에 국가에서 깊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어."
하기야 여기는 스마트폰은커녕 인터넷조차 없다. 결국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한정돼 있다는 것인데 그중 대표적인 게 바로 신문이다.
인맥이 협소한 나로서는 바깥 세상 소식을 알기 위해서는 신문밖에 없다. 그게 날조된 것인지, 아니면 진실인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자면 내가 쓴 책이 사상 전파용으로 쓰여질 수도 있다는 의미다. 자연히 눈쌀이 찌푸려질 수밖에.
'난 그저 재미있는 책을 쓰고 싶을 뿐인데...'
나는 정치와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사람이다. 전생에서는 대학교밖에 다니지 않던 사회초년생이었으며 그것마저 기한이 극도로 짧다. 복잡한 정치 세계에 입성하자니 속이 거북했다.
하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기왕 이렇게 된 거 매번 피하는 건 정답이 아니다. 최소한 대응책은 마련해야 내가 원하는 책을 쓸 수 있을테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의 능력을 길러놓아야한다.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야?"
내가 속으로 다짐하고 있을 때 마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궁금증을 드러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리."
"응?"
"혹시... 오늘 시간 있어?"
뒤이어 나는 살짝 머뭇거렸다가 용기를 담아 그녀에게 권유했다.
"너랑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거든."
다소 오해의 요지가 충분한 말이어서 그럴까.
"...에?"
마리의 새하얀 얼굴이 급속도로 붉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