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신(神)'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지구에서는 단지 '신앙' 하나만으로 신을 믿는 이들이 많고, 인간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 낸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종교의 자유가 존재하는만큼 신을 믿던지 말던지 개인의 자유였다. 참고로 나는 무신론자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신을 부정한다면 골치아픈 걸 넘어서 큰일난다. 왜냐하면 지구와 달리 여기는 명백하게 '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몇 정신병자들이 신은 없다고 난동을 부렸다가 마른하늘에 벼락이 떨어지는, '천벌'을 받는 전적이 여러 번 발생했다.
그 대신 의미 그대로의 '신'처럼 전지전능(全知全能)한 건 아니고, 이 세상을 굽어살피는 절대자 또는 초월자에 가깝다. 또한 신도의 신앙심을 양식으로 삼아 그들에게 힘을 나누어주거나 규칙에 위반되는 행위를 한다면 천벌을 내리는 등등. 이밖에도 본인의 '화신(化身)'을 통해 기적을 행사하거나 신탁을 내리는 경우도 있다.
한 마디로 신과 신도는 일종의 부모와 자식 같은 관계라 할 수 있고, 어쩌면 그보다 더 깊은 관계다.
'신이라...'
현재 나는 신학 강의를 들으면서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생에서는 신학을 학문으로 봐야 옳은가? 라며 수많은 갑론을박이 오고 갔지만 이 세상에는 매우 중요한 학문 중 하나다. 당장 신의 존재가 명확한데 신학이 발달되지 않는다는 게 더 이상하다.
그 이유로 현재 신학을 강의 중인 교수도 자그마치 대주교급 인사다. 귀족으로 따지면 백작 정도 되는 권력을 갖고 있는 걸로 안다.
"빛의 신 루미너스 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러나 항상 올바른 길을 가도록 정진하거라. 난 너희가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총 3명의 신이 있다.
제일 먼저 교수가 언급한 빛의 신 '루미너스'. 루미너스는 주로 인간이 믿는 신이며, 신도수가 어마어마한지라 세상에 끼치는 영향력도 가히 무시무시한 수준이다.
그리고 루미너스를 상징하는 단어는 많지만 그중 대중적으로 알려진 건 '태양'과 '희망'이다. 이때문인지 목숨이 왔다 갔다하는 전쟁에 나서는 군인들 중에 루미너스의 신도가 많다. 내 아버지도 루미너스의 신자였던 걸로 안다.
두 번째는 어둠의 신 '모라'다. 모라는 독특하게도 마족이 믿는 신인데, 마족이 모라를 믿는 이유는 그녀가 어둠 즉, '달'과 '안식'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암울한 마족의 현실을 보면 그들이 어떤 안식을 원하는지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자연의 신 '히르트'. 이 신은 주로 수인과 드워프가 믿는 신이다.
히르트를 상징하는 건 '자연' 그 자체이며, 야생에서 살던 수인들에게는 그 누구보다 히르트만큼 편안한 신은 없었을 것이다. 드워프도 본인들의 창작을 위한 '재료'가 자연에서 나온다는 걸 알고 있기에 히르트를 섬기고 있다.
그럼 여기서 엘프는 어떤 신을 믿냐고 물을 수도 있는데, 엘프는 3명의 신 모두 섬기고 있다. 무려 '천사'의 후예여서 그런지 신성력을 다른 종족보다 더 수월하게 사용할 수 있다.
나는 새삼스레 엘프와 다른 종족간의 격차를 상기하다가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신들이라면 내가 왜 여기에 환생했는지 알고 있을까?'
하지만 그걸 묻기 위해 신전으로 갈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다. 지금도 충분히 잘 살고 있는데 상황이 복잡하게 꼬이는 건 질색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신이니 내 존재를 진작에 알아차렸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데도 신탁이 내려졌다거나 화신이 나타났다는 소식은 전혀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는 중이다.
이에 기회가 된다면 신전에 방문할 생각이나 그전까지는 평범하게 지낼 것이다. 하물며 내가 만화나 소설 속 주인공처럼 세상을 뒤바꾸는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닌데 그들이 신경 쓸...
'...내가 쓰는 소설도 포함되려나?'
아무튼 넘어가자. 지금은 다른 것보다 강의에 집중하는 것이 우선이다. 나는 머릿속에 든 상념을 뿌리쳤다.
상념을 모두 뿌리치고 앞을 바라보니 교수가 조곤조곤한 말투로 강의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매우 큰 키와 빼빼 마른 체격이 특징인 교수의 이름은 홀라드. 루미너스 교단에서 대주교라는 거물급 위치를 갖고 있으며 실제로도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라 들었다.
나는 교수의 설명을 듣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신학은 역사만큼 지루한 수업이라 그런지 강의실에 앉아있는 학생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 학생들은 자기가 섬기는 신의 신실한 신자일 확률이 농후하다.
어떻게 아냐고? 호기심에 참여했다가 상상조차 못한 지루함에 도망친 학생들이 많았거든. 나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어서 꾸준히 강의를 듣는 편이다. 문제는...
꾸벅- 꾸벅-
현재 내 옆에 앉아있는 마리가 꾸벅 꾸벅 졸고 있다는 거다. 나는 눈꺼풀이 반 정도 감긴 채 꾸벅거리는 마리를 물끄러미 관찰했다.
그녀가 한 번 꾸벅거릴 대마다 손에 펜은 노트에다가 낙서를 그렸으며, 비단결 같은 그녀의 백색 머리카락이 점점 얼굴을 가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리의 눈꺼풀이 완전히 감기고 고개가 아래로 스르르 내려갔다. 졸음을 넘어 완전히 잠에 빠져든 것이다.
'분명 지난 주까지만 해도 잘 들었던 걸로 아는데...'
참고로 신학은 9시 수업이다. 그럼 마리는 어젯 밤에 뭘 했길래 첫 강의부터 졸기 시작한 걸까.
조금 의문이 들었으나 일단 그녀를 깨우는 게 좋을 듯했다. 몸을 건드릴 수는 없으니 마리의 귀 앞에 손을 갖다 대었다.
딱!
"...으음?"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마리는 몸을 흠칫거리더니 아래로 떨어뜨렸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고개를 들어올리자 커튼처럼 쳐졌던 머리카락도 약간 걷혔는데, 옆모습을 바라보니 어딘가 멍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녀가 잠이 덜 깼다는 것을 확신하며 입을 열었다.
"정신이 드냐?"
"...응?"
내 질문에 마리가 비몽사몽한 상태로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몽롱하면서도 색다른 매력을 풍기는 마리의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 활기찬 모습만 보여주던 그녀였던지라 새롭게 다가왔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에도 마리는 여전히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가 앞을 쳐다봤다. 교수가 강의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 상황 파악을 한 걸까, 그녀는 다시 나에게 시선을 옮기며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나 졸았어?"
"응. 꾸벅 꾸벅 잘 졸더라."
"끄응..."
내 대답에 마리가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침음성을 흘렸다. 나는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는 동안 속에 담았던 의문을 꺼냈다.
"어제 뭘 했길래 첫 수업부터 조는거야?
"...제논 일대기."
"뭐?"
"흐아아암..."
마리는 길게 하품을 하더니 잠긴 음성으로 대답했다.
"1권부터 최신권까지 다시 읽느라 밤 샜어. 원래는 3권까지만 읽으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다 읽었더라고..."
"... ..."
"너도 알잖아. 비루스 교수가 조별 과제로 제논 일대기의 전개를 예상하랬던 거."
할 말이 없어졌다. 앞으로 일주일 후면 본격적인 조별 과제가 시작된다. 이러니 그녀 딴에는 열심히 조사하고 있던 거겠지.
하지만 수면 패턴을 망칠 정도로 의욕을 부리는 건 좋지 않다. 괜히 그랬다간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치게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적당히 해. 안 그러면 오늘처럼 강의에 집중하기 힘들테니까."
"하지만 너무 재미있는 걸 어떡해? 벌써 다음 권이 기다려진다고..."
나는 마리의 볼멘소리에 속으로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작가로서 기쁘긴 하나 다음 권은 적어도 2달 뒤에 나올 것이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비축분이 있어서 8권이 보다 일찍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원고를 작성하는 시간이 잘 없을 뿐 더러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그조차도 힘들다.
이뿐만 아니라 신디에게 작문을 가르치고, 마리와 세실리에게 역사까지 가르치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아예 없는 수준이다. 공강 시간 때마다 숙소로 돌아가서 집필을 하고 있다지만 나도 여유가 필요한 몸이다.
'덕분에 설정을 꼼꼼이 정립할 수 있다는 거지만...'
연구실에 있는 논문과 서적은 나에게 엄청난 도움이 되고 있다. 게다가 신디도 작문 능력이 떨어질 뿐이지 역사에 관해서는 박학다식한 편이라 내가 궁금했던 점들을 명쾌하게 설명해줬다.
이에 제논 일대기 9권은 여러모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될 예정이다. 여태까지 알음알음 존재감을 드러냈던 악마측 간부들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며, 이를 통해 많은 신선한 충격을 선사할 것이다.
왜냐하면 악마측 간부에는 인간과 수인, 마족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엘프까지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배경 설정은 전생의 서브컬쳐에서 흔히 활용되던 '칠죄종'이며 각각 특별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내가 잠깐 머릿속으로 설정들을 떠올리고 있을 때, 마리가 자신의 노트를 들여다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졸긴 졸았나보네. 이거 뭐라고 적은거야?"
"적었다기보다는 그냥 선을 그은 거지."
"칫. 미안한데 필기한 거 있어? 보여주면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후우... 이번만이다?"
"감사~"
마리는 내가 필기한 부분을 보여주자 밝게 웃으며 옮겨적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부분이 하나 있었다.
"음냐..."
"... ..."
본래 잠이라는 건 쉽게 달아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필기를 옮겨 적다가 다시 꾸벅 꾸벅 조는 마리의 모습에 황당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럴 거면 왜 보여달라고 한 거야.
이에 내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마리를 깨우려는 찰나였다.
"그냥 자게 놔둬. 마리는 잠이 많은 편이라 한 번 늦게 자면 계속 졸거든."
내 오른편에 앉아있던 리나였다. 그녀는 여전하다는 표정으로 꾸벅 꾸벅 조는 마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정말 괜찮냐는 듯이 물었다.
"정말 그래도 돼요? 이러다 벌점이라도 맞으면..."
"괜찮아. 마리도 배운 게 있어서 신학 점수는 괜찮게 받을 거거든. 황궁에서 같이 교육받았던 내가 장담할 수 있어."
리나의 말을 듣자 하니 그녀와 마리는 전에 따로 심화 과정을 거친 듯했다. 하기야 황녀와 공작가 영애이니 다른 귀족과 전혀 다른 교육을 받았겠지.
나는 그녀의 말을 듣다가 속에 품어놨던 의문을 꺼내었다.
"저번부터 생각했던건데 리나 님이랑 마리는 언제부터 안면을 튼 거예요?"
"아마... 10살 때 즈음? 그때부터 만났던 걸로 알아."
"그렇군요."
"그건 왜 물어?"
"그냥 궁금해서요."
평소 마리는 리나를 껄그러워하는 편이다. 마리가 리나를 바라볼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니 그 정도는 눈치챌 수 있다.
허나 그 이유를 당사자들한테 직접 물어볼 수는 없으니 가슴 속에 묻어놓을 생각이다.
리나는 내 대답이 싱겁게 느껴졌는지 피식 웃었다가 이어서 내 이름을 불렀다.
"아이작."
"네."
"혹시 아이작은 모임에 관심있어?"
"모임이요?"
"응. 모임."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동안 리나는 빙긋 웃더니 나에게 말했다.
"곧 있으면 모임이 하나 있는데 모임이라고 해봤자 신입생밖에 없어. 대신 문학, 무학 가리지 않고 모여서 사람이 많을 거야."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난 오라버니가 미리 알려준 거거든. 그리고 조금 있으면 아카데미에서도 알려줄거야. 어때?"
리나는 내 눈과 똑바로 마주하더니 기대와 흥미가 담긴 얼굴로 재차 권유했다.
"아이작은 참석할 거야?"
말이 좋아 권유 또는 부탁이지.
"참석 여부는 개인 자유지만 난 개인적으로 아이작이 '꼭' 왔으면 좋겠거든."
나에게는 '황녀'의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서럽네.'
제논 일대기 9권이 늦게 나오면 리나 책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