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나는 마리가 알려준 정보를 듣고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제논 일대기의 작가가 바로 나인데 그녀가 어째서 저런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잠깐이나마 블러핑 또는 거짓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하면 블러핑일 가능성이 적은 게, 정말로 거짓말을 하려고 했다면 지금처럼 은밀히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 마리는 정말로 중요한 정보라고 판단하여 나에게 귀를 빌려달라고 한 것이다.
'...뭐지?'
홍철 없는 홍철팀이라고, 전생에서 유명한 밈이 있다. 모든 건 완벽한데 정작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빠진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비슷한 말로 팥없는 단팥빵이 있다.
그리고 지금 상황이 딱 그 꼴이다. 작가 본인은 바로 코앞에 있는데 이상한 사람을 초대했다고 하니 나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가 실수라도 하셨나?'
나는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가 마리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녀는 자신의 제안을 결코 거부할 수 없을거라 판단하고 있는지 씨익 웃으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일단 다른 의문을 제쳐두고 확인이 우선이다. 나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조용히 물었다.
"...진짜야?"
"응."
"진짜 제논 일대기의 작가라고?"
"그렇다니까. 나 못 믿어?"
믿지 못할 수밖에 없다. 바로 진짜 작가를 놔두고 엉뚱한 사람을 초대했으니까.
하지만 속내를 그대로 말할 수 없으니 최대한 어떻게 된 경위인지 파악하는 게 좋을 듯했다.
"당연하지. 너도 알다시피 제논 일대기가 나오고 1년이 지났잖아. 그 1년동안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누구인지 온갖 추측만 난무할 뿐, 제대로 된 단서는 없었어. 황실에서도 작가를 찾아다녔지만 실마리도 못 잡았다고."
"응. 그렇지."
"그런데 찾았다고? 어떻게?"
"나도 자세한 건 몰라. 편지에는 저자를 찾았고, 우리 저택에 초대할 거라는 말만 적혀있었어. 아빠가 우연히 꼬리를 밟았다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내 원고가 출판사에 도달하는 과정을 떠올렸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아버지는 사람을 시켜 원고를 출판사에게 전달한다고 말씀하셨다.
전직 네이비 기사단의 단장이었으니 알게 모르게 인맥도 많으실 터. 어쩌면 그 꼬리가 밟힌 것일 수도 있다. 더군다나 아카데미에 오기 전에 아버지도 지금까지는 잘 숨을 수 있었지만 언젠가는 들킬거라 언급하셨다.
나는 버릇처럼 펜혹을 살살 문지르다가 다른 질문을 꺼냈다.
"사칭일 가능성은 없어?"
"에이. 어떤 미친 놈이 귀족에게, 그것도 황제 다음 가는 공작 가문에게 사칭을 하겠어? 만약 정말 사칭이라면 간이 배 밖으로 나오다 못해 아예 없는거지."
"음... 그건 그래."
정말로 아버지가 실수라도 한 걸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어서 약간 걱정스럽다.
그러나 세상은 넓고 미친놈은 많다고, 오히려 상식을 역이용한 것일 수도 있다. 마리의 말마따나 감히 공작에게 사기 칠 사람은 없을테지만, 가끔씩 한탕 벌기 위해 자기 목숨을 담보로 도박을 하는 사람은 널려있다.
'일단 사칭일 가능성은 높은데...'
작가를 찾았다는 말만 했으면 모를까, 작가를 저택에 초대한다고 말했으니 사칭 쪽에 무게가 쏠린다. 그러므로 집에 편지를 발송하여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먼저다. 혹시 모를 최악의 수도 염두하는 것이 좋다.
나는 모든 생각을 정리한 후 콧숨을 길게 내쉬었다. 뒤이어 마리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응?"
"나보고 뭐 어쩌라는 거야? 나한테 뭐 부탁할 거라도 있어?"
주제는 다시 돌고 돌아 원점으로 돌아왔다. 마리가 저런 극비 정보를 알려줄 정도라면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을 터.
마리는 내 질문에 순간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배시시 웃었다. 자신만만했던 표정은 어디 가고 쑥쓰러움만 남았다.
"...제안은? 받아줄 거야?"
"무슨 제안?"
"작가가 저택에 올 때 너도 데려가줄게. 너도 제논 일대기의 팬이잖아. 친필 사인이라도 받아놓으면 좋지."
친필 사인이라... 그러고 보니 전생에서도 내 고유의 사인은 없었다. 있어봤자 서명할 때 대충 휘갈기던 사인밖에 없다.
하지만 마리에게 들으니 진지하게 사인의 필요성을 느꼈다. 적어도 지금 같은 상황, 그러니까 사칭범에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원고부터는 친필 사인을 넣는 게 좋을 듯싶다.
'고작 친필 사인 하나로 추적할 수는 없겠지.'
그건 뛰어난 과학 기술력을 갖춘 지구에서조차 힘든 일이다. 설령 마법이 있더라도 이런 사소한 일에 사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쨋거나 각설하고, 나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정했다. 사칭범인지 아닌지 확실치는 않지만 적어도 상판떼기는 보고 싶다.
"알았어. 원하는 게 뭐야?"
마리는 내 물음에 부끄럽다는 얼굴을 유지하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한테 역사 좀 가르쳐 줄 수 있어?"
"역사?"
"응."
"갑자기 왜? 너 역사 싫어하잖아."
"그게 있지..."
마리가 꺼낸 상황은 대략 이렇다.
모두들 알다시피 다음 학년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특정 점수가 필요하다. 그래서 마리도 역사를 포함한 몇몇 전공을 제외시키고 본인이 관심있는 전공에 집중하는 중이다. 가문에서 배운 지식을 복습하는 개념이라 그녀에게는 나름대로 쉬운 편이라고.
허나 가문에서 편지가 온 이후로는 상황이 급변했다. 바로 마리의 아버지, 그러니까 레킬리스 공작이 그녀에게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역사 점수를 최소한 90점 이상을 받으라는 조건. 그게 아니라면 앞으로 제논 일대기를 읽을 생각은 꿈에도 꾸지 말라고 하셨다.
다른 전공을 잘 하면 되는 것을 어째서 역사만 콕 집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다음에 이어진 마리의 설명을 듣고 납득할 수 있었다.
"우리 레킬리스 가문은 역사를 중요시 여기는 가문이야. 과거의 잘못에서 현재를 바로잡고, 미래의 주도권을 쥐어잡을 수 있다고 믿거든. 그때문에 옛날부터 역사 교육을 시키는 편이지."
"선대부터 이어진 이념이야?"
"응."
"흐음..."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개념이 알차게 박혀있는 건 원래부터 알고 있었지만 레킬리스 가문은 그 이상으로 현명한 가문이다. 미네르바 제국이 건국된지 수 백년이 지났음에도 건재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대신 가정 교육은 썩... 좋은 평가를 내리긴 어려울 것 같다. 마리가 역사를 싫어하는 이유가 아마 반항심에서 발로한 것이 아닐까. 전생에서도 아이들이 공부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부모님의 강압 때문이다.
이에 나는 내 추측이 맞는지 마리에게 질문을 날렸다.
"네가 역사를 싫어하는 이유가 그때문이야? 가문에서 맨날 달달 볶아서?"
"어! 맞아! 어떻게 알았어?"
"그런 게 있어."
마리가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보던지 말던지 나는 내 할 말을 이어나갔다.
"근데 학생이 학생을 가르쳐도 돼? 나는 딱히 상관없거든. 복습 개념으로 하면 충분해서."
"아마 부정 행위가 아니라서 괜찮을 걸? 정 안 되면 몰래 몰래 하면 되지 뭐."
"뭘 몰래 한다는 거야?"
우리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낯익은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뭇 남성의 마음을 뒤흔들 정도로 뇌새적인 목소리다.
그에 나는 물론 마리도 목소리가 들린 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뒤로 고개를 돌리니 언제 왔는지 모를 세실리가 뒷자리에 착석해있었다. 또한 눈매를 반쯤 접은 채 장난기가 가득 채워진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는 중이다.
나는 언제 왔는지도 모를 세실리에 떨떠름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언제 오셨어요?"
"방금 전에. 너희 뒷자리가 비어있길래 바로 왔지."
세실리의 대답을 듣자마자 리나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리나의 주변에는 아까부터 재잘재잘 떠들던 여학생들이 주루룩 앉아있었다.
분명 세실리의 곁에도 꽤 많은 학생이 있던 걸로 아는데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의문이다.
"그나저나 내 질문에 대답부터 해줄래? 뭘 몰래 한다고?"
"어..."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마리의 눈치를 봤다. 마리는 불편하다는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중이었다. 리나라면 모를까, 평소 세실리와는 괜찮게 지냈던 그녀였기에 의아해질 수밖에 없었다.
묘하게 바뀌 분위기로 인해 내가 쉬이 대답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 하고 있을 때, 마리가 턱을 괴며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별 거 없어. 아이작이 내 역사 공부 도와주기로 했거든."
"역사? 마리는 역사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어?"
세실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문을 표했다. 그녀도 마리가 역사를 싫어하는 걸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 물음에 마리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살짝 낮아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가문에서 역사 점수 잘 받아놓으라고 하셨어. 90점 이상 못 맞추면 제논 일대기는 앞으로 영영 못 읽을 거라고."
"아하. 그래서 아이작한테 부탁한거야? 아이작은 역사에 대해서 잘 아니까."
마리도 딱히 부정할 생각은 없었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의 긍정을 확인한 세실리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요사스럽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에 흠칫거렸다. 먹잇감을 바라보는 맹수의 눈빛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무언가 불안했다.
"그럼 나도 껴도 돼?"
아니나 다를까, 내 불안감은 적중했다. 마리도 이 전개를 예상했는지 다 포기했다는 뉘앙스로 대답했다.
"마음대로 해. 어차피 내가 아니라 아이작이 허락하는거니까."
"껴도 되지?"
"...네."
차마 후환이 두려워서 안 된다고는 못 하겠다. 세실리는 내가 허락하자 방긋 웃으며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약간 부담스럽긴 해도 세실리처럼 아름다운 미녀가 웃어주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달아오르기 시작한 얼굴을 간신히 추스리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화제를 전환시키기 위함이다.
"...세실리 님? 묻고 싶은 질문이 있는데 괜찮을까요?"
"리나와 싸운 이유?"
"어?"
어떻게 알았지? 정말로 독심술이라도 배운 건가?
내가 잠시나마 당황하자 세실리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넌 모르겠지만 아이작은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편이거든. 마리도 동의하지?"
"어느 정도는."
"...그렇게 티가 나?"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얼굴을 더듬거렸다. 나름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나만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마리는 내가 얼굴을 더듬으며 얼떨떨해하자 피식 웃었다. 같잖다는 표정이다.
"저번에 나한테 실수로 그림 준 거 있지? 그때 네 얼굴색이 어땠는지 알아?"
"당연히 모르지."
"그 허여멀건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란색으로 변했다가 다시 돌아왔다고. 누가 봐도 나 당황했소, 라는 걸 보여주는데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그건... 하."
얼굴색이 변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영역이다. 제아무리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도 얼굴색까지 자유자재로 바꿀 수는 없다.
"...일단 이건 넘어가고, 세실리 씨."
"응."
"세실리 씨는 왜 리나 씨랑 싸운 거예요?"
"별 거 아니야. 그리고 화해도 했어."
"그럼 대체 왜 싸우신 거예요?"
내 질문에 세실리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친절히 대답해줬다.
"리나가 제논 일대기 8권 내용을 거의 다 발설했거든."
"... ..."
"아무래도 리나는 내가 읽었을 거라 생각했나봐. 그것 때문에 내가 화를 좀 냈지. 화해는 했지만 따로 떨어져 앉은 이유도 이때문이고. 귀에 들어오는 이야기가 하나같이 8권에 관한 이야기들밖에 없더라고."
납득이 가는 이유였다.
*****
시간이 흘러 인문학 강의가 종료되었을 시간.
아이작이 잠깐 화장실에 간 동안 백발의 미녀, 마리는 그림 한 장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필기를 모두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세실리가 마리에게 권유했다.
"마리는 화장실 갈 생각없어?"
"응? 난 딱히?"
"그래? 그런데 지금 뭘 보고 있어?"
세실리는 마리가 손에 쥔 그림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이에 마리는 세실리를 한 번 힐끔거렸다가 평온한 말투로 설명했다.
"제논 일대기 8권에 첨부된 삽화야. 증기 기관차라고, 스토리에 꽤 중요한 역할을 하는건데 알려줄까?"
"아니. 절대 알려주지 마. 말하면 알지?"
"그럼 됐고."
그리하여 세실리도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마리는 세실리마저 밖으로 나가자 그림에 더욱 집중했다.
"흐음..."
제논 일대기 8권의 핵심이나 다름없는 이 그림의 명칭은 증기 기관차. 스승의 유언을 이어받은 한 괴짜 드워프가 인생을 갈아넣어 발명한 희대의 역작이다.
현재 대다수의 사람들이 초반부 귀족 비판에 관심을 쏟아붓고 있지만, 증기 기관차에 대한 관심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 교통수단을 제작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람도 많았고, 발명되기만 한다면 문명을 몇 단계나 진보시킬거라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다른 걸 다 제쳐두고 마리의 관심을 이끈 건 다름아닌 증기 기관차의 외관이다. 원통형 몸체에 아래에는 바퀴가 달려있고, 증기를 배출하는 기관이 머리 부분에 뿔처럼 달려있다.
그리고 마리는 이 그림과 비슷한 걸 본 적이 있다.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그녀는 애매함에 뺨을 긁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