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20화 (21/763)

< 20화 >

제논 일대기 8권이 출간된지 대략 보름이 흘렀을 때였다. 오늘도 여지없이 상쾌한 하루를 시작하기 전, 나는 숙소 문 앞에 놓여있던 신문을 가져왔다.

신문은 총 두 종류였는데 하나는 호이토르 신문사고, 다른 하나는 투틀리 신문사의 것이다. 호이토르의 신문사는 주로 인간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투틀리 신문사는 종족 구별없이 광범위하게 소식을 알려준다는 차이점이 있다.

하나가 아니라 두 신문사의 신문을 구독하는지라 구독료가 조금 많이 나가긴해도 큰 문제는 없다. 부모님이 쓰라고 주신 생활비는 차고 넘쳤으니까.

"음..."

나는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끝낸 뒤 신문을 펼쳐 내가 원하는 소식을 찾기 시작했다. 모두 알겠지만 내가 원하는 소식은 이번에 출간된 제논 일대기 8권에 대한 것이다.

우선적으로 인간쪽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호이토르 신문사부터 읽었는데, 신문을 펼치자마자 내가 바라는 소식이 첫 장부터 기재돼 있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앞으로 내밀며 어떤 소식이 실렸는지 체크했다.

[수많은 구독자의 마음을 애태웠던 제논 일대기.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가지각색의 반응들이 나열돼 있었다. 이때다 싶어 직설적으로 비난을 하는 평론가도 있는 반면, 씁쓸한 현실을 정확히 바라보며 평가를 내린 평론가도 많았다. 귀족 비판은 이들에게 상당히 민감하고 매콤한 주제일테니 당연한 반응이다.

그래도 딱히 큰 문제는 없는 듯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이걸 넣어도 될까? 싶었으나 레오르트의 이야기를 듣고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누군가 작정하고 나를 조지기 위해 찾는다면 곧바로 숨어버리거나 황실에 몸을 의탁하면 그만이다.

'뭐, 어두운 면만 적은 건 아니니까.'

제논을 함정에 빠뜨렸던 크로스트 백작이 귀족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인물이라면, 케이 백작은 그와 반대로 귀족의 밝은 면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케이 백작을 향한 평가도 꽤 많은 편이었다. 대부분 케이 백작의 모습이야말로 귀족이 지향해야할 덕목이라 칭찬하고 있다.

'제이로스 혁명이 없었다면 좀 위험했겠지.'

이 세상에서도 지구의 프랑스 혁명과 유사한 사건이 존재한다. 그때문인지 몰라도 귀족들이 '대놓고' 평민을 겁박하거나 차별하는 경우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귀족이 평민을 깔보는 악습은 여전하다지만 아직까지 그런 상황은 못 봤다.

하물며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는 말처럼, 개념이 착실하게 박혀있는 귀족들도 많다. 당장 멀리 가지 않아도 마리의 가문인 레킬리스 공작가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하고 있다. 황제 다음으로 높은 공작이 그런 모토로 살고 있는데 그 아래의 귀족들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나는 각국의 반응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페이지를 넘겼다. 호이토르 신문사는 미네르바 제국에 뿌리를 둔 회사였기에 다른 나라의 평가는 뒷부분에 있다.

"음..."

역시 예상대로 테르스 왕국이 가장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중이다. 테르스 왕국은 제이로스 혁명이 발발한 나라이니 이런 이야기에는 더욱 예민하겠지.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거의 다 크로스트 백작을 신명나게 까고 있다는 거다. 평민은 물론이고 귀족과 심지어 왕족도 다를 바가 없었다. 전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크로스트 백작의 최후가 꼴 좋다고 즐거워하는 중이다.

'테르스 왕국은 평민이랑 귀족 사이의 차이가 별로 없다고 했지?'

테르스 왕국은 입헌군주제에 가까운 통치 방식을 실행 중이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멋대로 통치하지 마라는 의미에 가깝다. 한바탕 홍역을 치뤄서인지 귀족이 차별을 저지르면 엄벌에 처해진다.

나는 신문을 계속해서 넘기다가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슬슬 강의 들으러 갈 시간이다. 현재 호이토르 신문만 다 읽고 투툴리 신문은 아직 페이지도 넘기지 않았다.

'그냥 수업이 다 끝나고 읽어야겠다."

나는 신문을 침대 위에 두고 강의실로 향할 준비를 갖췄다. 밖으로 나가기 전에 강의용 노트인지 확인하는 건 잊지 않았다. 그때처럼 치명적인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다.

뒤이어 문 밖으로 나가자 상쾌한 아침 공기가 나를 맞이해줬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강의실로 나아갔다.

'그나저나 아카데미에서 제논 일대기는 어떻게 구매하지?'

제논 일대기가 발간된다는 소식이 나오자마자 서점 앞에 어마어마한 숫자의 인파가 몰려든 적이 있다. 그걸 보고 나서 경악보다는 황당해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마 지금즈음이면 싹 쓸어갔지 않았을까.

부모님은 초판이 있으니 읽는데에 지장이 없을테고, 누나와 형이 문제다. 당장 작가 본인조차 초판을 제외하면 책을 구매할 수 없는 실정인데 그 두 명은 어떻게 구할지 의문이다.

'이때까지 어떻게 구매했는지 신기하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길을 걷다보니 어느새 강의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다양한 이야기가 귀에 속속 들어왔다.

"이번에 나온 8권 봤어?"

"당연히 봤지. 조금 씁쓸하긴 해도 예상대로라더라."

"평민이 그런 업적을 세웠는데 견제를 안 할 귀족은 없겠지.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야. 너 이번에 나온 거 샀어? 샀으면 나 좀 빌려주라."

"싫어. 나도 아직 다 못 읽었단 말이야."

이제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을 수 있는 대화 주제다. 하도 많이 듣다보니까 이제는 가볍게 넘긴다. 그보다는 지인들이 자리에 앉아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다.

나는 대충 빈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강의실을 두리번거렸다.

"세실리 님. 세실리 님은 이번에 나온 제논 일대기 8권을 읽으셨나요?"

"아뇨. 아직 구매하지도 못 했어요."

"아. 그러시구나. 제가 빌려드릴 수 있는데 빌려드릴까요?"

"괜찮아요. 내용이 궁금하지만 참을 수는 있어요."

당장 눈에 들어온 얼굴은 세실리밖에 없었는데 그녀의 곁에는 수많은 여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세실리는 자신한테 붙은 여학생들의 질문 공세에 일일이 대답하면서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아무래도 현재 상황이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나는 그녀의 곁에 리나가 없다는 것에 의문을 가진 것도 잠시, 뒤늦게 따로 떨어져 앉아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에 리나가 앉아있는 곳을 쳐다보니 그녀의 곁에도 다수의 여학생이 몰려있었다.

"리나 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너무 막 나간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음... 글쎄요?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당당할 수 있죠. 저라면 제논 같은 영웅을 그대로 포섭하겠지만요. 실제로 그런 사례가 빈번하고."

"그럼 제논이 왜 귀족 작위를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세요? 케이 백작도 자기 기사단에 들어오면 귀족이 될 수 있을 거라 권유했잖아요."

"제논 성격상 귀족보다는 자유로운 모험가의 신분이 낫다고 판단한 거겠죠."

리나는 쩔쩔매는 세실리와 달리 조곤조곤하면서 우아한 말투로 여학생들을 상대하는 중이다. 마치 어른이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모습이라 살짝 웃음이 새어나올 뻔했다.

'왜 따로 떨어져 앉은거지?'

세실리와 리나는 항상 같이 붙어다니는 편이다. 저 둘이 떨어져 있는 모습은 적어도 내 눈으로는 보지 못 했다.

하지만 지금은 따로 찢어져, 그것도 멀찍히 떨어져 있는 상태다. 평소 붙어다니던 둘의 모습만 보았던 나로서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싸우기라도 한 건가?'

나는 여학생 무리를 상대하느라 힘을 빼고 있는 둘을 번갈아보다가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당장 내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다.

'그런데 마리는 어디 갔...'

그 생각을 함과 동시에 누군가 내 옆에 앉으며 밝게 인사했다.

"안녕!"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마리가 환한 미소를 지은 채 나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나 또한 손을 흔들며 대충 인사했다.

"...그래. 안녕."

"뭐야. 반응이 왜 그래?"

"아무것도 아냐."

원래 강의실에 일찍 오는 편인 그녀가 어째서 이 시간에 오는 건지 약간 의아했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세실리와 리나가 따로 떨어져 앉아있는데다 그들의 주변에 여학생들이 우글우글 몰려있으니 내 옆에 앉은 것일 수도 있다.

그동안 마리는 특유의 활기찬 목소리로 나에게 안부를 물었다.

"주말동안 뭐 했어?"

"책 읽었어."

"무슨 책? 설마 제논 일대기 8권?"

"아니. 역사책."

"엑. 역사책?"

내 대답을 들은 마리가 차마 못 들을 걸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마리는 역사라면 치를 떨 정도로 싫어한다.

그에 내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마리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 하겠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 재미없는 걸 왜 굳이 찾아서 읽어? 제논 일대기도 있는 마당에."

"난 재밌던데."

게다가 엘레나 교수의 연구실에는 여태까지 접하지 못 했던 역사책과 논문이 쌓여있다. 요즘에는 그것들을 읽는 낙으로 살고 있다.

신디에게 작문을 가르치는 건 암 걸릴 것 같았지만. 꼭꼭 씹어서 소화까지 시켜줘야 겨우겨우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신디의 이해력은 파멸적이다. 그래도 열정이 없는 건 아니라 차마 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 사람마다 취향이 다른 법이니까. 그나저나..."

마리는 뒤를 살짝 돌아보며 말을 흐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세실리, 그리고 리나였다.

뒤이어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못 말린다는 뉘앙스로 입을 열었다.

"쟤들은 아직도 저러네."

"무슨 일 있었어?"

"아. 넌 모르겠구나. 쟤들 어제 카페에서 싸웠어."

역시 싸웠구나.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놀라운 건 마찬가지였다.

나는 여전히 여학생들에게 둘러쌓여있는 리나와 세실리를 번갈아보다가 마리에게 물었다.

"왜? 뭐 때문에 싸웠어?"

"나도 몰라. 나도 우연히 지나가다가 본 거야."

"흠..."

저 둘이 싸울만한 주제가 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무튼 너 이번에 발간된 제논 일대기 신권 읽었어?"

내가 골똘히 생각하는 도중에 마리가 살짝 들뜬 억양으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상념에서 빠져나와 그녀와 마주했다.

그녀의 눈매는 살짝 접혀서 히죽거리는 인상이 되었는데, 왠지 모르게 재수없게 느껴졌다. 마치 우월감이라도 느끼는 것 같달까. 이에 내가 한 쪽 눈썹을 치켜뜨며 대답했다.

"아니. 너는?"

"후후후."

대답은 하지 않고 이상한 웃음소리를 흘리는 그녀. 나는 그 반응을 보자마자 마리가 8권을 구매했다라는 걸 예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마리의 입이 열림과 동시에 내가 예상하던 대답이 나왔다.

"당연히 구했지. 그것도 이때까지 못 샀던 것까지. 아빠가 힘을 좀 써줬거든."

"그러냐. 불법을 저지른 건 아니지?"

"설마 그럴리가. 단지 인맥을 동원했을 뿐이야. 불법은 절대 아니라고?"

고작 책 몇 권 사겠다고 인맥을 동원할 필요가 있나. 그것도 황제 다음 가는 권력을 지닌 공작 가문이.

내가 속으로 어이없어하는 동안 마리가 약올리는 표정으로 말했다.

"부럽지? 부러우면 부럽다고 해. 네가 정말 원한다면 빌려줄 수도 있어."

"됐어. 시간이 걸리더라도 나중에 사면 돼."

무엇보다 내가 작가란다. 내가 손을 내저으며 퉁명스레 대답할 때였다.

마리는 내 대답을 듣고 이것 봐라? 하는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그렇게 나오겠다면 차마 거부할 수 없는 이야기를 꺼내야겠네."

"거부할 수 없는 이야기?"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래 저런 말을 하는 걸까. 그런 의문을 갖는 동안 마리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여나 다른 사람이 듣지 않을까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나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나는 무럭무럭 차오르는 의문을 가슴에 안고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대었다. 그러자 마리가 순간적으로 당황하더니 조용히 소리쳤다.

"야, 야! 얼굴 말고 귀를 대라고. 귀!"

"아."

그제서야 얼굴을 돌려 귀를 보여줬다. 마리는 한숨을 내쉬더니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양손을 그러 모아 내 귀에 갖다 대었다.

"이거 듣고 놀라지 마. 실은 우리 아빠가 정말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알려줬거든."

"사실? 공작께서 편지라도 보내신 거야?"

"응. 그 편지에 뭐라고 적혀있었냐면..."

마리는 잠깐 말을 멈칫거리더니 다시 한 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어서 내 귀에다 소근거렸다.

"우리 아빠가 제논 일대기 저자를 찾았데."

"... ..."

그 말 하나로 심장이 아래로 덜컹 떨어지는 기분을.

"심지어 우리 집에 초대한다던데? 저자도 흔쾌히 수락했다고 했어."

"...뭐?"

바로 이어진 그녀의 설명에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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