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레오르트와의 예상치 못한 만남이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내 집필을 방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탄력을 받아 이야기를 쭉- 쭉- 이어나갔다.
'여기서 캐슬락 백작이 소리치는 거지. 국가란 곧 백성이다라고.'
전생에 유명한 영화가 하나 있다. 군사정권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위해 결사적으로 항의하는 한 변호사의 이야기.
특히 명장면은 감명깊게 봤던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 저게 정말로 연기인건가 싶을 정도로 몰입감이 어마어마했다.
'레오르트의 말대로 조금 욕을 먹긴 하겠지만...'
평민 출신인 제논과 귀족간의 갈등은 절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본래 기득권을 굳게 쥐고 있던 세력은 누군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는 걸 극도로 경계하는 편이니까. 실제로 일어날 법한 이야기다.
그래도 상관없다. 당근과 채찍이라는 말이 있듯이, 귀족의 좋은 면도 보여주면 괜찮을 것이다.
하물며 정당한 비판이라면 어느 정도 용납해준다. 레오르트의 말을 듣고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봤더니 정말로 귀족을 향한 풍자가 널려있었다. 비록 직설적인 비판록은 없다는 게 흠이지만.
'증기 기관차의 외관은... 그냥 그림을 그리자. 노트에다가 연습용으로 그리면 되겠지.'
제논이 귀족과의 갈등을 벌이는 에피소드는 8권 초반에서 중반까지다. 그 이후는 드워프의 나라로 향하여 휴식 겸 신문물을 접하고, 그곳에서 '증기 기관차'를 발명하려는 괴짜 드워프와 인연을 맺는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손가락질 하는 괴짜 드워프의 발명을 제논이 도와주는데, 이후로는 여러가지 오판과 시행착오가 있지만 기어코 증기 기관차를 발명한다. 그리고 나서 '마법'이 아닌 '기계공학'이라는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것을 끝으로 8권의 이야기가 종료된다.
'여기는 보급을 마차로 하고 있지?"
동서고금, 아니 지구던 판타지 세상이던 전쟁에 있어서 보급의 중요성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판타지 세상이어도 군대는 잘 먹어야 진격하는 법이다.
여기서 굳이 증기 기관차를 발명할 필요없이 텔레포트나 워프 같은 마법으로 떼우면 되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는데, 불가능하다. 텔레포트나 워프를 이용한 보급 방식은 지극히 비효율적이면서도 위험한 마법이기 때문이다.
자기자신에게 사용하는 건 문제가 없다지만 자신이 아닌 다른 물체를 이동하는 순간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어마어마한 마나량이 요구될 뿐더러 실패하면 모래알처럼 분해되어버린다. 그런 리스크를 감당할만큼 중요한 상황에서나 사용하지, 그 외에는 대부분 마차를 이용하는 편이다.
'물론 마족을 제외하고. 가만 보면 진짜 사기 종족이라니까.'
마족들의 나라, 헬리움이 미네르바 제국조차 건드릴 수없는 강대국이 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말도 안 되는 수송 능력 덕분이다. 다른 나라가 마차를 이용해서 보급을 할 때 마족은 마법을 사용해 거리를 무시한다.
이게 전부 마법을 숨 쉬듯이 사용할 수 있는 능력 덕분이다. 그들에게 마법이란 상상하면 다 이루어지는 '권능'에 가깝다.
비록 지금까지 마법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굉장할 것 같다.
'마법이라...'
퇴고까지 마친 원고를 책상의 가장자리에 놔두고 시계를 확인했다. 현재 시간은 10시 30분. 내일을 위해서라도 지금 자는 편이 좋다.
이어서 간단하게 씻은 후 침대에 몸을 던졌다. 푹신한 매트릭스의 감각이 등을 타고 전해졌다.
'내일은 인문학이랑 마법학, 그리고... 인류학밖에 없네.'
어떤 전공을 들을지는 이미 다 구상해놓았다.
인문학, 마법학, 역사학, 신학, 연금학, 인류학, 철학, 심리학, 행정학, 군사학, 국제학.
이렇게 총 11과목이며, 다른 건 몰라도 '연금학'은 다들 처음 들어봤을거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세상의 화학이다.
지구에서도 연금술은 현대 화학의 아버지라 불리는데, 여기는 판타지 세상이라 그런지 몰라도 연금술이 크게 진보됐다. 멀리 가지 않아도 포션이 연금술로 제작된다는 사실을 알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화학처럼 정립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신기해.'
원자라던지, 분자라던지 세부적으로 정립된 건 아니지만 먼 미래에는 누군가가 정립해주지 않을까. 나는 깜깜한 천장을 올려다 보다가 눈을 조용히 감았다.
앞으로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니 긴장되기도 하고, 기대도 된다. 무려 11개의 전공을 듣자니 벌써 머리가 아프지만 유급을 면하기 위해서는 노력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상대 평가로 점수를 매기지 않고 절대 평가에 가깝다는 거다. 내가 노력만 한다면 만점도 충분히 받을 수 있다.
'제논 일대기는... 당분간 주말에만 써야겠... 다...'
침대에 몸을 뉘어서 그럴까. 잠이 솔솔 오면서 눈꺼풀이 닫혔다.
이윽고 온전한 암흑 속에서, 나는 의식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잠에 빠져들었다.
*****
다음 날이 되자 학식으로 아침을 떼우고 곧바로 강의실로 향했다. 강의실에 들어서니 익숙한 얼굴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모두들 알고 있겠지만 마리, 세실리, 그리고 리나다. 각각 개성이 뛰어난 미녀들이 한데 모여서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자체적으로 빛이 나는 듯했다.
저 세 명 모두 인문학을 같이 듣는 걸까. 나는 남는 자리가 있는 둘러보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리가 없네?'
세 여자의 주위에는 앞뒤 양옆 할 것 없이 학생들이 앉아있었다. 지난 주까지만 해도 그들의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나로서는 의문이 드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앞쪽에는 빈자리가 많은 걸 보면 더더욱.
일단 하는 수없이 빈자리에 앉았지만 의문은 풀리지 않아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마자 정답게 떠들고 있던 세 명 중 마리와 눈을 마주쳤다.
"앗! 저기 아이작이다."
마리가 소리치자마자 세실리와 리나도 따라 나를 쳐다봤다. 그들과 눈을 마주친 나는 손을 흔들어주는 걸로 인사했다.
"근데 쟤는 왜 우리 옆에 안 앉... 뭐야? 언제 꽉 찼지?"
"응? 그러게."
말을 들어보니 그들도 이제서야 주변 상황을 눈치챈 듯했다. 나는 의아해하는 세 명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들의 오른편에 앉아있는 남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이름이 잭슨이었던가. 아무튼 첫 날부터 세실리와 리나에게 작업을 걸다가 대차게 까였던 놈이다. 그런 놈이 나와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한 쪽 입꼬리를 쭈욱 올렸다.
실로 비열한 미소에 직감할 수 있었다. 저 놈 짓이라고.
보아하니 자기한테는 면박을 줬던 여자들이 나한테 관심을 주니까 질투한 모양이다. 학생들을 포섭한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안면이 있던 건지 모르겠으나 매우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벌써 파벌이 생기는 건가?'
돈 많은 백작가 아들내미라고 했으니 돈으로 매수했을 가능성이 높다.
'애새끼도 아니고 뭐하는... 아니지. 17살이면 애새끼가 맞구나.'
괜히 귀찮은 일에는 휘말리기 싫었으니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나는 가급적이면 평탄한 학업 생활을 즐기고 싶다.
"읏차."
"응?"
"안녕?"
고개를 앞으로 돌리자마자 누군가 내 옆에 앉으며 살갑게 인사했다.
백색 머리카락의 미녀, 마리가 빙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내 옆자리에 앉자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 그냥 제자리에 앉아있지 왜 굳이 내 옆에 앉은 건지 살짝 의문이 든다.
내가 그 생각을 하는 동안 마리가시원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내 인사 안 받아줘?"
"...안녕."
그제서야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거리는 마리였다.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봤다.
세실리는 어딘가 불편하다는 듯이 고운 미간을 좁혔고, 옆의 리나는 미묘한 얼굴이었다.
마지막으로 잭슨 쪽을 바라보니 그는 짜증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본의 아니게 엿을 먹여서 기분이 통쾌했다.
"주말동안 뭐 하고 지냈어?"
"너는?"
"난 오빠랑 같이 여기저기 돌아다녔지. 신기한 게 많더라. 너는 뭐 했어?"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지. 재미있는 책들이 많더라고. 그리고 누나를 따라 대련장에 가서 구경도 좀 했고."
"누나가 있었어?"
"누나 뿐만 아니라 형도 있어."
"너도 막내였구나? 이제 알았네."
수업 전까지 마리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확실히 다른 사람보다는 마리와 얘기하는 게 훨씬 편했다. 권위주의와는 거리가 먼데다가 성격도 시원털털했으니 마음편히 말할 수 있었다.
오히려 마리처럼 특색이 강한 미녀와 대화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할 정도다. 또한 운이 좋게도 대화 코드 또한 잘 맞았다.
"아이작은 제논 일대기를 5권까지 읽었다고 했지? 내가 빌려줄 수도 있는데."
가끔씩 식겁할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그나마 다행히 예상했던 질문이었는지라 무난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마리와 떠들다보니 어느새 교수가 강의실로 들어왔다. 당연하지만 인문학 교수인 비루스였다.
"안녕하십니까, 자랑스러운 학생 여러분. 그럼 오늘부터 본격적인 수업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강의가 시작되자 강의실은 지난 주처럼 학생들의 박수 소리가 가득 채워졌다.
그로부터 잠시 후, 비루스 교수는 박수 소리가 잦아들자 헛기침을 하더니 특유의 잔잔한 목소리로 수업을 시작했다.
"지난 주는 '지식'에 관한 걸 설명해드렸죠. 그럼 지금 수업에서는 무엇을 배우느냐. 간단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책을 통해, 아니면 어떤 경험을 통해 어떤 지식을 얻었는지 말씀하시면 됩니다. 너무 갑작스러우시다고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간은 충분히 드릴테니까요."
교수는 시간 제한을 정확히 40분으로 두었다. 실로 짧은 시간에 학생들이 볼멘 소리를 내었으나 비루스 교수는 깔끔히 묵살했다.
"아, 그리고 제논 일대기가 아닌 다른 책이나 경험을 연관지어 발표한다면 가산점을 드리겠습니다. 물론 제논 일대기와 연관되어도 발표 내용이 훌륭하다면 가산점을 드리겠습니다. 단, 어떤 지식을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말해주세요. 그럼 이제..."
시작! 이라는 교수의 외침과 동시에 학생들은 혼란도 잠시, 본인이 준비한 노트에 생각을 정리하거나 작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미리 준비해온 노트에다가 머릿속에 든 생각을 적어내렸다. 지금까지 읽은 책과 그걸 토대로 얻은 지식이 많았기에 자신있었다.
"저... 아이작?"
"음?"
그때 마리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나는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내가 바라보자 마리는 약간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머쓱한 웃음을 흘리며 부탁했다.
"...노트 한 장만 빌려줄 수 있어? 마법필만 갖고 와서..."
"그런 거라면야."
나는 기꺼이 노트 한 장을 찢어주어 그녀에게 전달했다. 마리는 내가 선뜻 종이를 주자 환한 표정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렇게 마리의 감사 인사를 받고 다시 노트에 집중할 즈음이었다.
"응? 야. 이건 뭐야?"
"네?"
마리는 내가 전달해준 종이의 뒷편을 보여줬다. 나는 그녀가 보여준 그림을 보자마자 속으로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마리는 궁금증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나에게 물었다.
"이거 혹시 네가 그린거야?"
페이지 뒷편에는 어제 내가 연습용으로 대충 그렸던 증기 기관차가 그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