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첫 수업은 대부분 오리엔테이션처럼 무엇을 배우는지만 가르쳐줬기에 중간중간 시간도 많이 비는 편이었다.
그리하여 1주차 마지막 강의였던 '경제학'이 종료되고, 나는 다른 학생들이 밖으로 나가는 동안에도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생각할 거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미친. 고등학교의 단점을 모두 다 퍼부었네.'
여기는 전생의 대학교처럼 3개월 동안 강의를 듣고, 또 3개월의 긴 방학을 거쳐 다음 학기로 넘어가는 방식이 아니다. 무려 4~5개월 동안 수업을 듣고 방학 기간은 고작 두 달 내지 한 달이다.
게다가 전공의 수는 총 18과목이며 한 과목당 최고 점수는 100점인데, 여기서 도합 900점을 넘겨야 유급을 면할 수 있다. 도합 점수가 1200점 이상이라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지만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한다.
당장 한 과목을 100점 맞는 것도 어려운데 1200점이라니, 범인에 불과한 나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이다.
'일단 철학이랑, 인문학, 생물학, 역사학, 신학은 필수로 하고... 나머지가 문제네. 문과인줄만 알았는데 수학은 왜 있는 거야?'
내심 툴툴거렸지만 이 세상에서 수학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마법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보니 자연스레 수학도 발달됐다.
왜, 옛날 판타지 소설 보면 마법을 연산할 때 수학 공식을 쓰는 경우가 있지 않나. 중고등학교 때 배운 공식을 그대로 담습하여 주인공을 마법 천재로 만드는 클리셰다.
근데 여기서도 유용하게 쓰더라. 대신 소설처럼 학창 시절 때 배운 수학이 아니다. 새로운 마법을 발명하면 그 마법에 관한 수를 논리적으로 써서 좀 더 쉽게 사용하기 위함이다.
'마법이 수학과 물리학이라니. 이 무슨 끔찍한 혼종인가.'
어쩐지 마법과 관련된 책이 더럽게 어렵더라. 수학자나 물리학자나 쓸 법한 단어를 넣어놨으니 문과인 내가 이해할 수 있을리가 만무하다.
더군다나 여기는 '마나'라는 에너지를 불덩이나 얼음덩어리로 구현시키니 수학과 물리학이 미친듯이 진보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마법사는 머릿속에 컴퓨터가 떡하니 탑재된 존재라고 보면 편하다.
전생의 뉴턴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고 보면 된다.
이러한 이유로 수학은 깔끔히 포기했다. 그건 진짜배기 천재들만 배울 수 있는 전공이다.
전생에서 수포자로 지냈던 경험 때문에 한 번 수학을 배워볼까 했지만 첫 수업을 듣자마자 깔끔히 마음을 접었다.
"...작 씨?"
"... ..."
"아이작 씨?"
"응?"
내가 앞으로의 계획을 노트에다 기록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나를 불렀다. 매력적인 미성이 귀를 간지럽혔다.
이에 나는 고개를 돌려 내 이름을 부른 사람을 확인했고, 약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가 피처럼 붉은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나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세실리 님?"
"집중하고 계셨다면 죄송해요. 지금 강의실에 아이작 님밖에 없어서요."
"아."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말처럼 강의실에는 아무도 없이 텅 비어있었다.
이 놈의 집중력 때문에 사람들이 다 떠나가도 전혀 몰랐던 모양이다.
"...리나 님이랑 마리는요?"
"아이작 씨가 집중하는 거 보고 먼저 가셨어요. 저는 계속 남아있다가 아이작 씨가 도통 나갈 생각을 안 하셔서 부른 거고요."
"하하하..."
나는 머쓱함에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마터면 밤까지 강의실에 있을 뻔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시간 낭비를 하지 않게 됐네요."
"아니에요. 아이작 씨는 평소에도 이러시나요?"
"음... 네. 자주 이러는 편이죠."
"장점이긴한데 지금 보면 은근 위험한 것 같기도 하네요."
세실리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녀의 살인적인 미소에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
처음에는 만화 캐릭터 같아서 이질감이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점점 익숙해졌다. 익숙해지면 좋은 게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익숙해져서 그녀의 미모가 더욱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내가 시선을 돌린거고.
"아이작 씨는 이 시간 이후로 바쁘시나요?"
내가 뜨거워진 얼굴을 간신히 식히고 있을 때, 세실리가 내게 물었다. 나는 달아오른 얼굴을 가까스로 달래며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가 무슨 이유로 저런 질문을 한 건지 모르겠다만 일단 대답은 해야겠지. 숙소로 돌아가서 책을 읽거나 원고를 작성하는 것 빼고는 딱히 할 일이 없기도 하다.
"아뇨. 딱히 없어요."
"그럼 이 기회에 서로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게 어때요?"
"... ..."
세실리의 제안에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가 이런 호의를 보이는 건 어색하지 않다. 메그너 교수 사건 이후로 나에게 급격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으니.
나는 입을 열기 직전, 이정도는 괜찮다 싶어 장난을 곁들인 대답을 꺼냈다.
"혹시 그거 데이트 신청인가요?"
"당연하죠."
"... ..."
도리어 내가 반격당했다. 나는 생글생글 웃는 세실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얼굴이 실시간으로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저 얼굴에 저 미소라면 어떤 남자가 와도 못 막는다.
그동안 세실리는 내 반응을 보고 미약한 웃음을 흘리더니 장난스러운 투로 말했다.
"아이작 씨? 머리색이랑 얼굴색이 똑같아지셨는데요?"
"...장난이 짖궂으십니다."
"장난은 아이작 씨가 먼저 치셨죠."
"...죄송합니다."
어차피 들킨 거,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진 상태로 대화를 잇기로 결정했다. 다 들킨 마당에 부끄러움은 사치다.
"...아무튼 간에 딱히 할 일은 없습니다. 숙소로 돌아가도 책만 읽을테고."
"그럼 자리부터 옮길까요?"
"생각해둔 곳이 있습니까?"
"간단하게 식사나 하면서 이야기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요."
나는 그녀의 제안을 듣고 시계를 확인했다. 강의가 끝난 시간이 정확히 4시 반이었는데 지금은 5시다.
저녁을 먹기에는 약간 이르지만 그렇다고 너무 빠르지도 않은 시간이다. 밤에 배가 고프다면 냉장고에 미리 넣었던 야식을 먹으면 괜찮을 듯했다.
"좋아요. 그런데 전 식당을 잘 모릅니다만..."
"학식을 먹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알겠습니다."
헤일로 아카데미에는 흔히 맛집이라 불리는 식당이 많지만, 그렇다고 아카데미 측에서 무료로 지원해주는 학식이 맛없는 건 아니다
돈이 궁한 평민을 위한 공간이긴 해도 뷔페 형식이라 다양한 먹거리가 존재한다.
이것도 다 돈을 쏟아부어서 가능한 것이며 타국에 있는 아카데미보다 헤일로 아카데미가 평판이 좋은 이유다. 계급을 막론하고 학생들을 위한 복지가 대단한 수준이다.
그리하여 나는 노트를 한 손에 끼고 펜은 교복 앞주머니에 꽂아넣었다. 세실리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궁금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작 씨는 평소에도 노트랑 만년필을 들고 다니시나요?"
"아뇨. 노트는 강의 때만 준비하는 편입니다."
평소에는 수첩을 들고 다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보나마나 왜 수첩을 항상 갖고 다니는지 물어볼 게 뻔하다.
세실리는 내 앞주머니에 걸린 마법필과 손에 든 노트를 번갈아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나도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라 그녀에게 질문했다.
"세실리 님은 필기를 안 하세요?"
"전 마족이라 한 번 들은 건 다 웬만해서 기억해요. 당장 10년 전 새해에 먹은 음식도 기억하는걸요?"
"와..."
장수하는 종족이라 그럴까. 기억력이 장난 아니다.
책에서도 수명이 긴 종족일 수록 기억력이 높다는데 사실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장수의 대표격인 엘프는 얼마나 기억력이 좋을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기억력이 좋다는 건 결코 '장점'이 될 수 없다.
"장점으로 보여도 많이 힘드시겠네요."
"네?"
"안 좋은 것도 다 기억한다는 거잖아요."
망각의 축복이라는 말이 있다. 안 좋은 기억은 되도록 빨리 잊어버려야 좋지만 그게 불가능하면 평생 짊어져야 할 상처가 된다.
세실리는 내가 안쓰럽다는 투로 말하자 멍해진 얼굴이다. 허나 그 표정은 이윽고 진한 미소로 변했다.
"처음부터 생각했지만 아이작 씨는 생각이 깊으시군요. 기억력이 좋다는 건 누구나 장점으로 생각할텐데."
"트라우마라는 단어가 괜히 있는 게 아니죠."
전생의 기억이 존재하는 나에게도 트라우마는 있다. 그건 바로 전생의 가족이 예기지 못한 사고로 떠나갔을 때다.
그때의 기억은 정말이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당연히 내 옆에 있을 거라 여겼던 것이 예고도 없이 사라지니 아무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래도 덕분에 가족의 소중함을 뒤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현생의 내 가족도 좋은 사람들밖에 없어서 매우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내가 속으로 그 생각을 하는 동안 세실리는 신기하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끔씩 아이작 씨랑 대화하다보면 저보다 나이가 더 많은 어르신이랑 얘기하는 것 같아요. 아이작 씨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순간 가슴이 뜨끔거렸지만 태연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이제 17살 입니다. 세실리 씨는요?"
"105살이요."
"아, 그러... 네?"
105살?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 세실리를 바라봤다.
그에 세실리는 뭐가 문제라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이내 아, 하며 깨달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마족에게 100살은 인간으로 치면 이제 막 성인기에 진입했다고 보시면 돼요. 100살까지 악마가 되고 진정 인간으로 살아갔다는 풍습이죠. 물론 인간으로 환산해도 제가 아이작 씨보다 나이가 많지만요."
"아... 그러시구나."
나는 그리 중얼거리면서 그녀의 머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가 마족이라는 걸 증명해주듯 두 개의 뿔이 솟아나있었다.
간혹 세실리가 마족이라는 걸 잊고 지낸다. 평소 행실을 보면 악마가 아니라 평범하디 평범한 사람이다. 이렇게 예쁘고 장난기 많은 여자를 누가 악마라고 생각하겠나.
그럼에도 종종 위화감이 생기는 건 그녀에게 이런 생활은 처음이기 때문이겠지.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대충 납득이 간다.
'그럼 이때까지 헬리움에서만 지냈던 건가?'
아마 그럴 가능성이 높다. 헬리움에서 거주하는 마족들은 평생을 거기서 산다고 했으니.
애시당초 마족이 다른 나라와 인연을 맺기 위해 바깥으로 나온 경우는 최근 100년 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세실리가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한다고 신문에 대서특필된 거고.
"흐응."
그러는 동안 내 시선이 자기 뿔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걸까.
세실리가 야릇한 비음을 흘리더니 눈매를 예쁘게 접었다. 그리고는 은근하면서도 기대가 담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어때요? 이렇게만 보면 정말로 평범한 인간 같죠?"
"네."
"...응? 그게 끝이에요?"
칼같은 내 대답에 도리어 세실리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반응에 이해할 수 없는 건 오히려 나였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가 그녀에게 역으로 질문했다.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예요?"
"그... 마족답지 않다던가, 인간처럼 살아가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다던가..."
말을 꺼내면 꺼낼수록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갔다. 나는 의아함도 잠시, 마족으로서 그녀가 살아온 길을 떠올렸다.
제논 일대기가 출간되기 전까지는 마족이라고 천대받고, 또 악마라고 멸시받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기억력도 좋으니 안 좋은 기억들은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혔을 터.
나는 여기서 딱히 더 해줄 말이 생각나지 않아 뒷목을 어루만졌다. 그래도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라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글쎄요. 저도 제논 일대기를 읽었는지라 마족도 인간이라 생각하고 있거든요. 게다가 마족한테 피해를 입은 적이 없어서 선입견 자체가 없기도 하고요."
"...그래요?"
"네."
뒤이어 세실리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내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며 질문을 날렸다.
내 착각인지도 모르겠지만 표정에 긴장과 결의가 담겨있는 듯했다.
"그럼 아이작 씨는 마족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음..."
"정말로... 우리가 인간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럴 때는 어떻게 대답해야 될까. 가급적이면 좋게 좋게 말하고 싶으나 때로는 채찍도 필요한 법이다. 본래 기대를 한만큼 실망감도 커지는 법이니.
제논 일대기 덕분에 마족을 인간으로 대우해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한들, 결국 태생적인 본질은 제아무리 신이어도 바꿀 수 없는 법이다. 어쩌면 지금 이순간에도 악마화를 한 마족이 날뛰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걸음을 옮기다가 고개를 돌려 세실리를 쳐다봤다. 루비색으로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춰졌다.
하염없이 내 대답만을 기다리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뇨."
저벅-
식당을 코 앞에 두고 세실리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고.
"마족은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차가운 분위기가 우리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