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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지는 몹시 초조했다.
안토니안이 가이아 제국에 들어 온 지 열흘째, 그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반면 가이아 제국에서는 곧 황녀님과 안토니안이 혼인식을 올릴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별 일 없을 거야, 어차피 혼인은 올릴 거였잖아.’
데이지는 애써 불안한 마음을 다잡았다.
“데이지, 안토니안에게서는 아직도 연락이 없냐?”
세바스찬이 수척해진 얼굴로 데이지에게 물었다.
“기다리라고 했어요.”
“언제?”
“가이아 제국으로 떠날 때요.”
“그 이후에는?”
“아직은……. 아무 연락도 없어요.”
“쯧쯧. 어디 귀족놈들을 믿을 수 있어야지.”
세바스찬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히르타인들의 배신 이후 곤란해진 것은 세바스찬이었다.
믿음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히르타인들은 완전히 케이타 제국의 편이 되었다.
“거래가 완전히 끊어졌어.”
세바스찬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안토니안이 케이타 제국으로 간 이후, 세바스찬의 사업에도 위기가 닥쳤다.
현재 가이아 제국의 상업은 케이타 제국의 무역에 의존하여 발전하고 있었다.
세바스찬도 케이타 제국으로 많은 수출을 하고 있었으나, 히르타인이 돌아선 이후, 모든 계약이 어그러진 것이다.
“그 녀석은 하를 공작가로 가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내 사업에 무슨 조치를 취해 주지도 않고.”
“…….”
데이지는 고개를 더욱 푹 수그렸다.
데이지 역시 불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데이지는 약지에 있는 반지를 만지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히르타인들은 모두 내보냈어. 너 혼자 여기 덩그러니 있는 게 괜찮은 거야?”
“그래도, 여기 있고 싶어요.”
“이곳도 조만간 비워줘야 해.”
무리해서 얻은 수도의 저택이었다.
안토니안의 환심을 얻기 위해 그동안 자금을 끌어썼으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자금줄 또한 막혔다.
하루하루 돌아오는 어음이 상상을 초월했다.
“여기를 비워주다니요? 왜요?”
“사업이 어려워.”
“여기에서 나가면 어떻게 안토니안이 연락하겠어요?”
세바스찬은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이대로 안토니안이 만약 데이지마저 버린다면 자신들은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럼 그 핑계로 그 녀석과 연락을 해봐.”
“지금 어떻게요? 조금만 더 기다려봐요.”
“그 자식 믿을 수는 있는 거야?”
“아버지, 안토니안은 저희를 배신 못 해요.”
데이지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가 ‘그’ 비밀을 알고 있잖아요.”
“하긴…….”
“그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한 건 안토니안 쪽이에요.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알았다.”
세바스찬이 가고, 데이지는 방 안에 홀로 앉았다.
데이지라고 왜 초조하지 않겠는가. 기약 없이 막연히 기다리는 일보다 힘든 일이 어디 있다고.
‘토니, 제발 연락을 줘. 내가 버틸 수 있게.’
데이지는 초조한 얼굴로 반지만 매만졌다.
* * *
어둠이 짙은 밤.
칼립소는 새벽이 가까이 와서야 대련장에서 나왔다. 땀에 젖은 근육은 번질번질 달빛에 빛나고 있었다.
몇 시간 째, 대련을 했으나 날뛰는 피는 진정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혈관을 도는 피는 더 뜨거워졌다.
이걸 해결해 줄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다.
보름달이 뜬 밤.
오늘 같은 밤에는 유난히 더 엘레나가 생각났다.
‘무심하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던 그녀의 뒷모습이 지금도 생생했다.
터벅터벅.
갈길 모르고 헤매던 발걸음은 어느새 로하스관을 향했다.
어차피 이곳에도 엘레나는 없었다.
하지만 엘레나의 흔적을 쫓듯 칼립소는 그녀와 함께 걸었던 곳을 천천히 걸었다.
엘레나가 없는 로하스관에는 적막이 흘렀다. 언제든지 엘레나가 돌아올 때, 불편함이 없으라고 기존의 상주 인원들은 철수시키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 사람이 없으니, 텅 빈 것 같았다.
“폐하, 오셨어요?”
비비안이 저 멀리서 총총걸음으로 달려 나왔다.
“들어가. 둘러보고 좀 있다 돌아갈 테니.”
“네, 폐하.”
비비안이 물러가자, 정원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등을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보름달이 환하게 비치고 있었다.
엘레나와 함께했던 순간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그리고 문득 처음 전쟁터에서 그녀를 만난 순간이 떠올랐다.
「날 죽여라.」
첫 만남부터 쉽지 않은 여인이었다.
그래서 더 갖고 싶었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온몸의 피는 더욱 날뛰었다.
신비로운 보랏빛 눈동자.
달빛보다 빛나던 머리카락.
눈보다 하얀 살결.
「칼……. 제발.」
열락의 시간에 함께했던 순간이 생각났다.
‘좋다’라는 말로는 표현하기 부족한 강렬했던 감각. 완전해지는 충족감.
칼립소는 손바닥을 내려봤다.
지금 시간이 믿어지지 않는 듯 주먹을 쥐었다, 다시 풀었다.
가끔, 엘레나와의 시간이 꿈같았다.
너무 좋아서 현실성이 없는 한여름 밤의 꿈.
깨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 한없이 허탈한 꿈.
바스락.
칼립소는 어디선가 들려온 작은 기척에 몸을 잔뜩 긴장시켰다.
‘사라타?’
살짝 보이는 은빛 털은 사라타가 분명했다.
엘레나가 놓아줬던 꼬리가 세 개 달린 사라타가 살짝 모습을 보였다.
“하아.”
칼립소는 소리 없이 픽 웃었다.
야생동물인 사라타가 다시 찾아오다니.
‘제 목숨을 구해준 것을 아는 건가?’
칼립소는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자 사라타는 조금 뒤로 물러섰다. 그러면서도 달아나진 않았다.
칼립소가 한 걸음 더 다가가자, 사라타는 또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뭐지?’
칼립소가 두 걸음 앞으로 다가가자, 사라타는 다시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둘의 대치 관계가 한동안 계속됐다.
칼립소가 움직이지 않자, 이번에는 다시 사라타가 칼립소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칼립소가 움직이자, 다시 뒤로 물러선다.
“따라오라는 거야?”
칼립소의 말을 들은 것처럼 사라타가 다시 뛰어갔다.
칼립소는 사라타의 뒤를 쫓아갔다.
적당히 거리를 벌려 달아나는 폼이 마치 길 안내자 같았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전에 사라타를 잡은 곳이었다.
사라타는 재빠른 동작으로 절벽 밑 동굴로 들어갔다.
칼립소가 가만히 보고만 있자, 사라타는 동굴 앞 주변을 뱅뱅 돌았다.
칼립소가 천천히 동굴 입구를 들어갔다. 예전보다 더 깊이 사라타가 들어갔다.
동굴 끝으로 가자, 또 다른 공간이 나왔다. 축축한 동굴 입구와 달리 상쾌한 느낌마저 주는 공간이었다.
안으로 들어선 칼립소의 입에선 감탄의 소리가 나왔다.
‘하아…….’
동굴 깊숙한 곳에는 사라타의 새끼가 세 마리 있었다. 모두 꼬리가 세 개 달린 귀여운 아기 사라타였다.
“새끼를 가졌던 거야?”
그래서 더 예민했구나.
먹이도 먹지 않고.
몸집이 날렵하고 재빠른 사라타는 임신을 하여도 크게 티가 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보금자리가 아니면 새끼를 낳지 않는 습성이 있었다.
“귀엽군.”
아기 사라타들은 모두 색색 잠들어 있었다.
엄마를 닮아 모두 은색 빛깔의 어여쁜 털을 가지고 있었다.
사라타는 새끼들 주변을 빙빙 돌더니 칼립소 앞에 엎드렸다.
툭툭.
칼립소는 사라타의 머릿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고맙다고 인사하러 온 거야?”
말을 알아들은 양, 사라타는 칼립소의 손에 온전히 자신을 맡겼다.
“고생했네.”
칼립소는 사라타의 등을 쓱쓱 만져주었다.
사라타는 잠시 칼립소에게 몸을 물리더니 아기 사라타의 곁에 있는 붉은 열매를 하나 집어 왔다.
대부분이 노란색인 라인멜로 중 간혹 붉은 빛깔이 띤 품종이 있었다. 붉은빛을 띤 라인멜로는 귀한 열매였다.
“이걸 준다고? 사라타, 이건 아기들 줘야지.”
크응…….
사라타의 권유에 칼립소는 라인멜로를 잡았다.
달콤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잘 살아. 앞으로도 안 잡을 테니.”
칼립소는 사라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동굴 밖으로 나갔다.
사라타를 보니 유난히 엘레나의 생각이 더 났다.
칼립소는 눈을 감고 사라타에게 받은 라인멜로의 향을 맡았다.
엘레나처럼 달달하고 향기로운 냄새였다.
사라타는 엘레나를 닮았다.
잡으려면 도망가고, 기다리면 가까이 온다.
보내주었더니, 오늘은 자신의 보금자리까지 안내해주지 않았는가.
칼립소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케이타 제국의 정부로 계속 살 수는 없어요.」
「난 가이아의 황녀예요.」
붙잡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사라타처럼 말라죽었을 테니까.
칼립소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엘레나, 그럼 이제 날 안내해 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봤다.
둥근 보름달은 오늘따라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 * *
엘레나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요 며칠 얼굴을 볼 수 없었던 안토니안과 겨우 이야기할 시간이 났다.
“안토니안. 이야기 좀 해.”
“잠깐만 기다려. 여기저기 급한 일이 많이 생겨서.”
안토니안은 베리우스 황제에게 알현을 마친 후, 바쁘게 이곳저곳 불려 다녔다.
엘레나와의 만남은 일부러 갖지 않은 채였다.
한 시간이 지나서야, 안토니안은 엘레나가 기다리는 방으로 돌아왔다.
“엘레나, 너도 바쁘지? 혼인식 준비는 잘 되어가?”
“안토니안, 혼인식은 없어.”
“그게 무슨 소리야!”
안토니안이 벌컥 성을 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이 당황스러워. 케이타 제국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너와 혼인한다고 생각한 거야?”
“그런 일? 어떤 일?”
“날 또다시 위험에 빠뜨리려고 했잖아. 드하야 즙 사건 때랑 똑같이!”
“엘레나, 널 위했던 일이야.”
“그랬다면 나와 미리 상의를 했겠지.”
“그래서 어쩌자고?”
“지금이라도, 파혼해.”
안토니안은 기묘하게 웃었다.
“내가 왜?”
“안토니안, 널 케이타 제국에서 빼낸 것이 내 마지막 호의야.”
“엘레나, 지금 호의를 베풀고 있는 쪽은 나야. 적국의 황제에게 빠져 나라를 팔아먹을지도 모르는 타락한 황녀를, 기꺼이 내 신부로 맞으려 하니까.”
엘레나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뭐라고?”
“맞는 말이잖아. 설마 진짜로 칼립소 황제를 사랑하기라도 하는 거야?”
안토니안이 픽 웃었다.
“이렇게 쉬운 여자인 줄 몰랐네. 그러면서 나한테만 철벽을 세운 거였어? 그런 무식한 야만인이 취향인 줄 몰랐잖아.”
“닥쳐.”
“네가 뭐라든 파혼은 안 돼. 넌 신탁의 계시를 받은 제1황녀야. 설마 조국을 버리고 케이타 제국으로 갈 건 아니지?”
안토니안이 비아냥거렸다.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은 채로, 케이타 제국이나 마음껏 들락거리게?”
엘레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걱정 마. 엘레나. 혼인식만 올리면, 넌 자유롭게 케이타 제국에 돌아가도 돼. 내가 그 정도 아량은 베풀 수 있거든.”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아니면 신탁의 계시이자, 베리우스 황제 폐하의 명을 어길 생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