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92화 (9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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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의 손이 엘레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다행히 보이는 모습은 괜찮아 보였다. 혈색도 좋고, 표정도 밝아 보였다.

하지만 모를 일이다.

엘레나는 치유력을 가지고 있으니 모진 고초를 겪어도 티가 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엘레나의 성격으로 봐서는 내색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네, 걱정 마세요.”

“정말 괜찮은 거지?”

“그럼요. 잘 지내고 있었어요. 케이타 제국에서도 줄곧 로하스관에서 머물렀고요.”

“그래? 네가 보낸 서신에서 외교 부분을 맡아서 일한다는 이야기는 보았지만……. 다행히 케이타 제국의 황제가 널 정부 취급하진 않았나 보구나.”

“그럼요, 그랬다면 제가 이렇게 올 수도 없었겠죠.”

엘리자베스는 감격해서 흐느꼈다.

귀하게 키운 딸이 정부로 끌려갔다니, 그날부터 지금까지 마음 편하게 잔 적이 없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이게 다 대신녀님 덕분이구나.”

대신녀님 덕분이라고?

엘레나는 엘리자베스의 말이 당황스러웠다.

“엘레나, 넌 신탁의 계시를 받은 아이야. 그렇게 될 리가 없지.”

엘리자베스는 엘레나의 손을 끌었다.

“어서 아바마마를 뵙도록 하자.”

“네, 어마마마.”

엘리자베스가 침실 문을 열자, 엘레나는 참담한 마음이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베리우스 황제는 너무나 쇠약해 보였다.

“아바마마.”

엘레나의 간절한 부름에도 베리우스 황제는 눈을 뜨지 못했다.

엘레나는 바싹 마른 베리우스 황제의 손을 잡았다.

베리우스 황제 옆에 있던 안다르 의원이 일어나서 엘레나에게 인사했다.

“황녀 전하, 인사드립니다.”

“안다르, 아바마마의 상태는 어떤 거지?”

“이프테리아는 독한 병입니다. 한동안 의식을 찾지 못하고 계시다가 간신히 의식이 돌아오셨습니다. 지금은 안정이 필요할 때입니다.”

“아…….”

엘레나는 참담한 심경이었다.

“우선 나가 계십시오. 폐하께서 의식을 찾으시면 부르겠습니다.”

“그래, 엘레나. 먼 길을 오느라 고생했으니, 우선 쉬거라.”

엘리자베스의 말에도 엘레나는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엘레나, 그만 나가자.”

엘리자베스의 권유로 엘레나가 침실 밖으로 나가려는데, 베리우스 황제의 눈이 떠졌다.

“으…….”

“아바마마, 정신이 드세요?”

엘레나는 베리우스 황제의 곁으로 다가갔다.

베리우스의 눈꺼풀이 떨리면서 몇 번 깜빡거렸다.

“……엘레나…….”

“아바마마.”

“……돌아왔구나.”

“네, 제가 돌아왔어요. 아바마마, 어서 빨리 일어나셔야죠.”

“널 봐서 다행이다. 안토니안은?”

“그게…….”

안토니안의 이야기를 하려면 길었다.

“안토니안을 보고 싶구나. 빨리 들어오라고 해…….”

“안토니안은 같이 오지 못했어요.”

“왜? ……죽었느냐?”

“아니에요.”

“그럼, 왜? 안토니안은 어디 있는 게냐. 안토니안에게 할 말이 있어. 쿨럭. 쿨럭. 안토니안을 불러다오.”

안다르 의원이 급하게 베리우스 황제를 잡았다.

“폐하, 지금 무리하시면 안 되십니다. 황녀 전하, 폐하께서 안정을 취하시게 잠시 나가 계셔주길 부탁드립니다.”

“알, 겠어요.”

엘레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베리우스 황제를 보다가 밖으로 나왔다.

잠시 후, 엘리자베스도 침실 밖으로 나왔다.

“좀 괜찮으신가요?”

“지금은 주무셔. 엘레나, 안토니안은 같이 오지 않은 거니?”

“사정이 있었어요.”

엘레나는 그간의 사정을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그랬구나. 역시 드하야 즙도 네가 한 일이 아니었어. 비겁한 자식 같으니라고.”

엘리자베스는 그간 짐작했던 일이 사실로 밝혀지자, 안토니안이 원망스러웠다.

생각해보면 안토니안은 쭉 비겁했다. 처음에 엘레나가 같이 전쟁에 참여하자고 했을 때도 물러섰으며, 드하야 즙 사건 때문에 엘레나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을 때도 도망친 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만약, 드하야 즙 사건을 안토니안이 단독으로 했다고 증언을 했다면 상황이 바뀔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엘레나, 진작 그때 말하지 그랬니? 그랬다면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는 안토니안과 함께 책임져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는’이라는 말에 묘한 뉘앙스를 느낀 엘리자베스가 되물었다.

“그럼,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어요.”

엘레나는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어떻게 말이냐?”

“전 안토니안과 파혼하고 싶어요.”

“뭐?”

엘리자베스는 이마에 손을 댔다.

“엘레나, 그건 불가능해. 너희들은 신탁의 계시를 받은 자들이야.”

“어마마마, 저희는 이미 같이 갈 수 없어요.”

엘레나의 입매가 고집스럽게 굳었다.

“엘레나, 이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란다. 파혼이라니. 무엇보다 신탁의 계시도 있고…….”

“붉은 태양이 꼭 안토니안이라는 법은 없어요.”

“그게 무슨 소리니?”

“……안토니안의 증거라고는 고작 붉은 머리카락 하나밖에 없는 거잖아요.”

엘리자베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엘레나, 네 생각이 그렇다면 일단 안토니안을 데려와. 너한테 안토니안의 처리를 맡겼다면, 그쯤은 할 수 있겠지?”

“꼭 그래야 할까요?”

“당사자가 와야지. 그래야 일을 제대로 해결할 수 있어.”

“…….”

“지금 상황에서는 안토니안이 스스로 물러나게 만드는 게 가장 좋아. 무엇보다 베리우스는 안토니안만 찾고 있어. 지금 안토니안이 널 구하러 케이타 제국에 갔다고 생각하시는데, 이 상태로 파혼을 허락하진 않으실 거야.”

“알……았어요.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엘레나,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일을 풀어나가자. 일단 폐하의 건강이 우선이니까.”

“네, 어마마마.”

내키지 않지만, 엘레나는 수긍했다.

엘리자베스의 말대로 베리우스 황제는 의식을 찾을 때마다 안토니안만 찾았다.

사흘 후, 안토니안은 초췌한 모습으로 가이아 제국으로 돌아왔다.

케이타 제국에서 갇혀있는 동안 안토니안의 마음속에는 엘레나에 대한 증오가 싹텄다.

‘감히 그 자식하고 편을 먹고 나를 공격해? 어차피 황제 자리에만 오르면 넌 버려질 거야.’

안토니안은 감옥에 갇혀있는 내내 엘레나를 원망했다.

그러던 중 가이아 제국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칼을 갈았다.

가이아 제국의 땅을 밟자, 안토니안의 얼굴에는 비로소 안도감이 들었다.

황궁에 도착한 안토니안은 가장 먼저 베리우스 황제를 알현했다.

베리우스 황제는 생각보다 더 위독한 상태였다.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있던 베리우스 황제는 안토니안이 왔다는 소식에 겨우 몸을 일으켰다.

“안토니안, 이제야 왔구나.”

“폐하.”

“가까이 와.”

안토니안은 천천히 베리우스 황제 곁으로 갔다.

“잘 왔다. 고생했어.”

안토니안은 고개를 떨구며 눈물을 흘렸다.

“폐하……. 하루빨리 쾌차하셔야 합니다.”

“엘레나를 데리고 와줘서 고맙네.”

“그런 말씀 마세요. 어서 일어나셔서 저희의 혼인식을 보셔야지요.”

“그래야지, 안토니안.”

베리우스 황제가 마른 손을 내밀었다.

안토니안이 손을 잡자, 잔기침을 하며 희미한 미소를 내비쳤다.

“에……, 엘레나를 잘 부탁해.”

“폐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이제 좀 쉬어야겠어.”

안다르 의원이 베리우스 황제의 상태를 살폈다.

“안토니안 님, 폐하께서는 안정이 필요하십니다.”

“알겠네. 폐하의 건강을 잘 챙겨드리게.”

슬픈 눈을 하며 침실 문을 연 안토니안의 입매는 기묘하게 올라가 있었다.

침실에서 안토니안이 나오자, 근처에서 엘레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토니안, 나랑 이야기 좀 해.”

“엘레나, 난 이제 막 도착했어. 피곤해.”

딱 잘라 거절한 안토니안은 엘레나를 뒤로 하고 황궁을 나갔다.

‘폐하의 승하하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안토니안의 입매는 춤추듯 올라갔다.

이대로 베리우스 황제가 죽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신탁의 계시’에 ‘황제의 유언’까지 덧붙이면 혼인을 추진하는 데는 더없이 좋을 테니까.

안토니안은 수도의 저택으로 가려다 발걸음을 돌렸다.

‘아니지.’

아무리 데이지가 보고 싶어도 지금 저택으로 가는 것은 위험했다.

안토니안은 슬며시 뒤로 돌았다.

느낌일지 몰라도, 가이아 제국에 도착해서는 뒤에 누군가 따라붙는 것 같았다.

그는 발걸음을 돌려 하를 공작가로 갔다.

안토니안이 도착하자, 하를 공작이 나서서 맞았다.

“아버님, 돌아왔습니다.”

“그래.”

하를 공작의 낯빛은 좋지 않았다. 그의 아들이 엘레나 황녀와 시간차를 두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를 공작 역시 눈과 귀가 있었다.

그동안 안토니안이 히르타인을 고용하는 것을 보고 우려의 시선을 던졌지만, 크게 말리지 못했다.

하지만 케이타 제국에서 감금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케이타 제국에서는 어떻게 된 일이냐?”

“좀 사정이 있었습니다.”

안토니안은 명확히 말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무슨 사정?”

“아버님, 그보다 혼인식을 서둘러야겠습니다.”

“흐음.”

하를 공작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폐하는 알현하고 오는 거냐?”

“네, 아버님. 폐하께서도 혼인식을 빨리 올리길 원하십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아버님도 함께 서둘러 주시죠.”

“그래.”

하를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혼인식이 가장 급했다.

“그런데, 그 애는 어떻게 할 셈이냐? 거기다 세바스찬이란 그 작자는 또 어쩌려고?”

하를 공작은 못마땅하듯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알아서 합니다.”

“네가 뭘 알아서 한다는 거냐?”

하를 공작은 답답한 마음에 일갈했다.

그동안 수도에서 데이지와 머무는 꼴을 보고 속이 몇 번 뒤집혔다.

그간 돌봄에 대한 은혜를 갚는다고 하여 놔두고는 있지만 불안한 마음은 여전했다.

“…….”

“이 혼인은 너만의 혼인이 아니야.”

“압니다.”

“그럼, 거긴 쳐내도록 해.”

안토니안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왜 말이 없어?”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혼인식 전까지는 여기서 지낼 생각입니다.”

“잘 생각했다. 혼인식 전까진 어떤 흠도 없어야 한다.”

“네, 아버님.”

안토니안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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