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86화 (8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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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안은 뭔가 불안해요. 저번 드하야 즙 사건도 그렇고…….”

“그건, 엘레나도 같이 한 일이잖소.”

“……그리고 히르타인을 데려온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요.”

“아직은 우리 힘이 약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오.”

“왜 이렇게 안토니안 편을 드는 거예요?”

“그야, 신탁의 계시가 있으니 그러는 거지 않소. 쿨럭, 쿨럭.”

베리우스 황제가 기침을 삼켰다.

“괜……찮아요?”

“……쿨럭.”

“의원은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거예요?”

“감기가 들어서 그런 거니 너무 염려 말아요.”

“기침이 벌써 몇 달째잖아요.”

“아무튼 엘리자베스, 안토니안은 충분히 노력하고 있어. 히르타인을 데려온 것도 그 노력의 일환이고.”

“……알겠어요.”

엘리자베스는 의혹이 완전히 풀어지지는 않았으나, 논쟁을 삼갔다.

“의원에게 보약을 지으라고 해야겠어요.”

“됐어. 그보다 이번 사신에 안토니안을 보내면 어떨 것 같소?”

“안토니안을요?”

베리우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토니안의 말대로 사신으로 가서 엘레나도 직접 살피고,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서 데려올 수 있는 방안을 철저히 모색하는 것이 필요했다.

“안토니안이 잘 해낼 수 있을까요? 성급하게 일을 그르치지 않을까 걱정돼요. 안토니안 보다는 필립이 어때요?”

엘레나의 빈 자리를 아리엘과 그녀의 정혼자 필립이 대신하고 있었다. 필립은 조용한 성격에 진중한 태도로 귀족들에게 신임이 높았다.

“정혼자를 놔두고 필립을 보낼 수는 없지.”

“……그런가요.”

정혼자라는 말에 엘리자베스는 할 말이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섣부르게 안토니안을 오해하는 줄도 모른다.

드하야 즙 사건도 엘레나가 확실하게 말한 것이 아니니까.

“그럼, 안토니안에게 단단히 이르세요. 성급히 행동하지 말고, 엘레나를 잘 살피고 돌아오라고요. 엘레나의 귀환은 우리가 천천히 노력해야 할 거예요.”

“그래야지. 그래도 안토니안이 엘레나의 귀환에 대해 가장 열심이야. 믿고 맡기자고.”

그 말에는 엘리자베스도 동의했다.

최근 케이타 제국과의 무역이 활성화되고, 관계가 편안해지면서 엘레나의 일은 잊혀갔다.

모두들 평화를 원했고, 분쟁을 피했다.

이런 정세에서 적극적으로 나설 이는 안토니안밖에 없었다.

“알았어요. 그럼, 사신 문제는 안토니안에게 맡기고 당신은 건강을 살피세요.”

“쿨럭, 그래.”

베리우스는 지친 기색으로 답했다,

“이만, 들어가세요. 안색이 좋지 않아요.”

“그……러지.”

하지만 베리우스는 힘없이 일어서다 주저앉고 말았다.

“쿨럭. 쿨럭.”

다시 앉아 격하게 기침을 하던 베리우스가 허리를 꺾더니, 주저앉고 말았다.

“베리우스? 베리우스!.”

엘리자베스의 간절한 부름에도 베리우스는 일어서지 못했다.

“괜찮아요? 대답 좀 해봐요.”

하지만 그의 눈은 떠지지 않았다.

“뭣들 하고 있느냐! 당장 의원을 불러.”

엘리자베스의 말에 시종들은 황급히 움직였다.

“베리우스! 정신 차려요.”

엘리자베스는 재빨리 그의 호흡을 살폈다.

“황후 폐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뒤늦게 달려온 안다르 의원이 황급히 베리우스를 살폈다.

“어서 빨리 침상으로 옮겨야 합니다.”

시종이 베리우스를 침상으로 옮기자, 안다르는 약을 가져와 베리우스의 입술에 흘려 넣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약이 입으로 흘러 들어가고, 한참이 지나자 베리우스의 숨이 돌아왔다.

하지만 베리우스의 의식은 좀처럼 돌아오지 못했다.

“안다르, 폐하는 어떠신가?”

초조한 기색으로 지켜보던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황후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안다르의 무거운 어조에 엘리자베스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먼저 주위를 물러 주소서.”

엘리자베스가 손짓하자, 시종과 시녀들이 물러갔다.

“황후 폐하, 폐하께서는 이프테리아 병을 앓고 계십니다.”

“뭐라고?”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프테리아는 무서운 폐병이었다.

기침으로 시작되어 폐를 좀먹고, 나아가서는 전신을 좀먹는 병이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지?”

“폐하께서 함구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엘리자베스의 손이 저절로 떨렸다.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유난히도 잦아진 기침과 부쩍 피로해진 모습들이 스쳐 갔다.

그저 과중한 나랏일로 피로한 줄 알았다.

“……상태는 어떠시냐?”

“꽤 진행되셨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두면……. 장담을 못 합니다.”

“진작 말했어야지! 아무리 폐하께서 함구하라고 해도 내게는 말했어야지!”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안다르 의원은 납작 엎드렸다.

“알겠다. 우선 폐하께서 회복하는데 만전을 기하도록 하여라.”

“네, 황후 폐하.”

베리우스는 사흘을 꼬박 앓고 겨우 정신을 차렸다.

베리우스가 앓는 모습을 보고, 엘리자베스는 결심했다. 아마 그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루빨리 엘레나를 데려와 안토니안과 혼인을 시켜야겠다고.

이 나라의 후계를 하루빨리 준비해야 했다.

* * *

안토니안이 사신으로 선발되고, 케이타 제국으로 가는 출발날짜가 내일로 다가오자, 데이지는 불안해졌다.

‘황녀님과 만나면 마음이 변하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쪽는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럴 때면, 안토니안이 준 반지를 만지작거리곤 했다.

인장이 새겨진 반지는 하를 가문의 안주인만이 가질 수 있다고 했다.

“토니.”

안토니안이 집으로 돌아오자, 데이지가 달려 나와 맞았다.

“아직 잠들지 않았어?”

“토니가 오지 않았잖아요.”

“그냥 자지 그랬어.”

“그럴 수 있나요.”

데이지는 불안한 마음에 손톱을 뜯었다.

친위대 대장을 맞으며 일이 늘어나서인지 요새 안토니안은 예전과 달랐다.

예전에는 보기만 해도 안달이 난 듯 입을 맞추고 자신을 원했는데, 지금은 뭔가 열정이 식은 느낌이었다.

거기다 요즘은 계속 늦었다.

“토니, 내일 떠나면 한동안 못 보잖아요.”

데이지는 안토니안의 팔을 끌었다.

“데이지.”

안토니안은 다정하게 데이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걱정하지 말고, 먼저 자.”

“토니는요?”

“아직 좀 챙겨야 할 게 있어.”

“그럼, 기다릴게요.”

데이지는 초조한 기색으로 안토니안을 쫓았다.

서재에서 안토니안이 서류를 챙기는 동안, 책상 근처를 빙빙 맴돌았다.

“왜 그래?”

“아, 아니에요.”

“내가 내일 떠나서 그래?”

“그게……. 엘레나 황녀님을 오랜만에 만나는 거잖아요.”

안토니안이 작게 웃었다.

“지금, 질투하는 거야?”

“아, 아니에요.”

하지만 데이지는 뺨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귀엽긴.”

안토니안이 데이지를 안았다.

“베리우스 황제께서 위독하셔. 오늘 늦은 것도 그거 때문이야.”

“정말요?”

데이지의 눈에 희열이 감돌았다.

“그래, 우리가 함께할 날이 얼마 안 남았어. 이제 엘레나를 데려와서 혼인만 하면 돼.”

안토니안은 데이지의 손을 잡았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 건, 당신과 함께할 미래를 위해서야.”

안토니안은 데이지의 손가락에 있는 반지에 입을 맞추었다.

“내가 이걸 괜히 줬겠어?”

“토니.”

“걱정 말고 나를 믿어.”

“미……안해요.”

“미안하긴, 질투하니까 더 귀여운걸?”

데이지가 얼굴을 푹 숙였다.

그런 데이지를 안토니안이 번쩍 안았다.

“오늘은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데이지가 안토니안의 품에 얼굴을 폭 파묻었다.

“그럼, 섭섭해서 안 돼요.”

데이지는 오늘 주피터 열매를 먹지 않았다.

그동안은 매번 밤을 보내기 전 주피터 열매를 챙겨 먹었다.

정식으로 혼인을 하기 전까지는 비밀을 유지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바보 같이 생각됐다.

‘아이가 있어야 해.’

그것만큼 확실한 증표가 어디 있겠는가.

데이지는 안토니안의 품을 더 파고들었다.

* * *

카토 공작은 하루하루 살얼음을 걷는 것 같았다.

겨우 처형은 면했다고는 하지만, 폐하의 명이 있기까지 자택에서 근신하고 있었다.

그나마 공작 작위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선대의 공적 때문이었다.

‘이게 다 그 망할 여우년 때문이야.’

카토 공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련한 요하스 자작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맡겼으니 다행인가.

철두철미하게 행적을 숨기고 요하스 자작을 전면에 내세웠기에 그나마 이번 일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칼립소 황제의 눈밖에 난 것은 언제 해소될지 몰랐다.

이대로 가문이 몰락하게 놔둘 수 없었다. 게다가 요하스 자작 쪽으로 들어간 자금도 상당했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어.’

장부로 태어나서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하지 않겠는가.

엘레나가 회복한 이후, 칼립소는 가이아 제국과 케이타 제국 간의 교역을 더욱 돈독하게 했다.

거리에는 가이아 물품들이 넘쳐났고, 빠르게 변화를 받아들인 귀족들은 부를 움켜쥐었다.

그 가운데 카토 공작가는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카토 공작은 참을 수 없이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공작 전하.”

“무슨 일이지?”

레이먼 집사가 들어왔다.

“안토니안에게서 전언이 왔습니다.”

카토 공작은 손을 내밀었다.

전언을 보던 카토 공작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래? 안토니안이 사신으로 온다는 거지?”

“네, 그때 엘레나 님과 자리를 만들어 본다고 했습니다.”

“그게 마지막 기회겠군. 이번엔 실수해서는 안 돼.”

“알겠습니다.”

레이먼 집사가 고개를 숙이고, 나가자 카토 공작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 *

로하스관으로 돌아온 엘레나는 집무실에서 통 집중을 못 했다. 일을 하려고 해도 대신녀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검은 구름을 제거하세요.」

‘검은 구름’은 칼립소 황제를 뜻했다.

「황녀님을 삼키고, 가이아 제국을 멸망시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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