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엘레나 님이요?”
“사실, 이것도 극비입니다. 하지만 캐서린 님이 저에게 비밀이 없으셨듯 저도 캐서린 님께 다 말씀드리는 거예요. 어차피 우리 둘만 알고 있으면 문제가 없을 테니까요.”
캐서린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나 님을 미워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요하스 자작이 주도를 했고, 그로 인해 큰 부상을 당하셨어요.”
“어떻게 해……. 엘레나 님은 괜찮으신가요?”
“다행히 지금은 회복 중이십니다. 빠르게 회복된 것으로 보아 치유력도 찾으신 거 같고요. 시간이 지나면 엘레나 님이 여기로 오실 거예요. 그러니 너무 걱정 마세요.”
“휴, 다행이에요.”
희소식을 들은 덕인지 캐서린의 얼굴이 눈에 띄게 편안해졌다.
“진작 말씀드릴 걸 그랬어요.”
“아니에요. 지금이라도 이야기해줘서 고마워요.”
“앞으로도 황궁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뭐든지 말씀드릴게요.”
“저도, 그럴게요.”
캐서린은 결심했다.
이토록 진중한 이가 섣불리 말을 전할 리가 없었다.
거기에 자신을 위해 황궁의 비밀까지 말해주지 않았는가.
캐서린은 무한한 신뢰의 눈빛을 르엘에게 보냈다.
* * *
르엘의 말대로, 다음날 엘레나가 카트리전에 방문했다.
“황녀님!”
엘레나를 본 캐서린은 반가움에 소리쳤다.
“너무 오랜만에 왔지요?”
“네, 괜찮으신 거예요?”
캐서린은 자신도 모르게 엘레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캐서린의 우려와 달리 엘레나의 모습은 빛이 나기까지 했다.
원래도 아름다웠지만, 지금은 마치 꽃이 활짝 핀 느낌이었다.
순백색의 살결은 생기를 머금은 듯 빛났고, 은빛 머리카락은 반짝거렸다.
“걱정 많이 했어요?”
“네, 연락이 통 없으셔서요.”
“미안해요. 사정이 있었어요.”
“네, 황녀님.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그런데 오늘따라 더 아름다우신 것 같아요.”
“고마워요. 그런데 캐서린이야말로 건강은 괜찮아요?”
이번엔 엘레나가 캐서린을 살폈다.
처음에 봤을 때 건강미 넘치던 모습과 달리 캐서린의 얼굴은 야위어 있었다.
“괜찮습니다, 황녀님. 염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옆의 분은 누구신가요?”
“아.”
엘레나는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엘레나 옆에는 우락부락한 체격의 커다란 기사가 서 있었다.
“제랄드예요. 내 호위 기사예요.”
“네…….”
제랄드가 몸을 굽혀 캐서린에게 인사했다.
“제랄드, 여기서 기다려. 캐서린하고 할 이야기가 있으니.”
“죄송합니다, 엘레나 님. 엘레나 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말라는 명령을 받아서요.”
엘레나는 답답했다.
고지식해 보이는 제랄드는 좀처럼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제랄드가 옆에 있는 한, 대신녀와의 소통은 무리였다.
“황녀님, 차를 좀 드릴게요.”
캐서린이 일어서려 하자, 대기하고 있던 하녀가 차와 다과를 내왔다.
“캐서린, 많이 말랐어요.”
“요새 기운이 떨어져서요. 으.”
캐서린이 몸이 안 좋은지 신음을 내며 웅크렸다. 대신녀가 또다시 연락을 해 온 것이다.
“들어가서 누울래요?”
“그……게, 좋겠어요.”
캐서린이 일어나자, 엘레나도 같이 일어섰다.
그리고 저 멀리 지켜보던 제랄드도 엘레나를 따랐다.
“제랄드, 침실 안까지 들어올 필요는 없어.”
“엘레나 님, 제 역할입니다.”
“여인들의 방이야. 캐서린이 옷도 갈아입을 텐데 그 모습까지 볼 셈인가?”
엘레나가 위엄있는 목소리를 말하자, 제랄드는 멈칫했다.
“그럼,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한시도 눈을 떼지 말고, 다만 보호하되, 감시당한다는 생각을 갖게 하지 마. 안전하게만 지키면 돼.」
황제의 당부를 기억한 제랄드는 예의를 갖춰 인사하고, 뒤로 물러섰다.
엘레나는 방문을 닫았다.
“캐서린, 괜찮아요?”
“네, 제랄드 님이 안 들어오셔서 다행이에요. 이리 오세요. 마침 대신녀님이 연락을 해오셨어요.”
캐서린이 엘레나를 끌었다.
방 안으로 들어간 캐서린은 기를 모았다.
배 속의 뜨거운 열기가 모아들자, 오른손 위로 거울이 나타났다.
-황녀님!
대신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신녀님. 걱정 많으셨죠?”
-네, 무사하십니까?
“네, 염려마세요.”
-신변이 위태로우셨지요?
대신녀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검은 구름이 몰려왔습니다. 황녀님의 별이 빛을 잃었고요.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다행히, 잘 회복되었습니다.”
-누구의 짓인지 밝혀졌습니까?
“이곳에서 저를 싫어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다행히 해결된 일입니다. 치유력도 되찾았고요.”
-정말 다행입니다.
대신녀가 한숨 돌렸다.
-치유력은 어떻게 되찾으셨나요?
“제가 다쳤을 때, 이곳 황제가 저에게 피를 내어주었습니다.”
-정말입니까?
“네, 이제 원래대로 돌아갔으니 염려하지 마세요. 그리고 앞으로는 캐서린을 통하지 않고 사신을 통해 연락을 했으면 합니다.”
황궁에서 나온 후, 엘레나는 제일 먼저 가이아 황궁에 서신을 보냈다.
자신의 안부를 누구보다 궁금해하고 있을 부모님이셨다.
엘레나의 친필로 작성된 서신을 보냈으니 곧 답신이나 사신이 올 것이다.
-사신을 통해서요?
“네, 이제부터는 저도 가이아 제국에서 오는 전언을 받을 수 있으니,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습니다.”
엘레나가 캐서린을 흘끗 보았다.
아무래도 공력이 많이 드는 영성술을 사용은 이제 그만 사용하는 것이 좋았다.
칼립소와의 관계도 회복된 지금은, 굳이 이런 영성술이 필요 없었다.
-케이타 제국의 황제와 관계가 좋아지셨군요.
“네, 대신녀님.”
-…….
한동안 침묵이 계속됐다.
-황녀님.
“말씀하세요.”
-그렇다면 지금이 기회입니다.
“네?”
-검은 구름을 제거하세요.
대신녀는 엄중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그게 무슨……!”
-저들이 방심하고 있을 때, 노려야 합니다. 검은 구름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잠시 세를 물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케이타 제국의 황제는 제 목숨을 구해주었습니다.”
-그건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제거하지 않으면 또다시 위기가 닥칠 겁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검은 구름을 제거하세요.
“……받아들이기가 힘듭니다.”
엘레나가 충격을 받은 얼굴로 답했다.
-검은 구름은 황녀님을 삼키고, 가이아 제국을 멸망시킬 것입니다. 하루빨리 제거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치지직.
캐서린의 손 위의 거울이 사라졌다.
“대신녀님! 대신녀님!”
엘레나가 다급히 외쳤지만, 거울은 사라졌다.
“캐서린.”
“죄……, 죄송해요.”
캐서린의 몸은 극도로 지쳐 보였다.
하지만 캐서린은 온 힘을 모아 다시 거울을 생성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울을 쉽게 생성되지 않았다.
“하, 악. 이게 왜…….”
쿨럭.
캐서린의 입술로 피가 울컥 나왔다.
“괜찮아요?”
“아……. 이럴 수가.”
엘레나는 황급히 탁자에 있는 수건을 건넸다.
다행히 피는 금방 멈추었지만, 캐서린의 혈색은 창백했다.
“캐서린, 이제 영성술은 더 이상 하지 말아요. 의원을 보낼 테니, 누워있어요.”
“그래도 중요한 전언일 텐데요. 한 번 더 해볼게요.”
“피를 토했잖아요. 일단 누워서, 몸부터 회복하세요.”
엘레나는 캐서린을 침대에 눕혀줬다.
캐서린이 안정을 취하는 것을 확인한 후, 엘레나는 카트리전을 나왔다.
「검은 구름을 제거하세요」
대신녀의 말이 머릿속에 뱅뱅 돌았다.
「황녀님을 삼키고, 가이아 제국을 멸망시킬 겁니다.」
말도 안 돼.
들은 귀를 씻어버리고 싶었다.
엘레나가 카트리전에서 나오자, 제랄드가 바로 따라붙었다.
엘레나는 제랄드를 흘깃 한 번 보고, 로하스관으로 돌아갔다.
* * *
가이아 제국에서는 작은 흥분이 일었다.
엘레나로부터 서신이 온 것이다.
오매불망 엘레나의 걱정뿐이었던 엘리자베스는 떨리는 손으로 서신을 읽어보았다.
[걱정이 많으셨지요? 저는 몸 편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서신을 읽어내려가던 엘리자베스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떨어져 내렸다.
‘아가, 다행이구나.’
서신에는 편안하다고 적혀있었으나, 타국 땅에서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고 있을지는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엘리자베스.”
베리우스 황제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으며 그녀를 위로했다.
[……앞으로 자주 연락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양국 간의 무역도 긴밀히 진행되고 있사오니, 향후에는 두 나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해 볼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제 몸이나 챙길 것이지, 거기서도 나라 걱정을 하는 것 봐요.”
“엘레나 성격이 워낙 그렇잖소.”
“제 몸 하나 지켜내는 것도 힘들 텐데…….”
아무리 나라의 힘이 없었다고는 하나 딸아이를 그런 식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사고 이야기는 없네요.”
엘레자베스는 서신을 꼼꼼히 다시 읽었다.
엘레나는 어릴 때부터 힘들다고 하는 법이 없었다. 아무리 힘든 일을 당하든 그 작은 몸으로 꼭꼭 삼켜 이겨냈다.
기사 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황녀라고는 하나, 여인의 몸으로 기사 생활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함부로 구는 사람도 있었고, 얕보는 사내도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을 다 이겨내고 인정받고 나서야 지나가는 소리처럼 ‘가끔 힘들긴 했어요.’라고 말하며 웃어넘기던 딸이었다.
이번에도 케이타 제국으로부터 큰 사고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 이야기는 서신에 없었다.
“그 일에 관해 안토니안은 뭐래요?”
“안토니안도 노력하다가 일을 그르친 걸 어쩌겠소. 엘레나를 데려오기 위해서 한 일인데.”
“그렇게 섣부르게 행동하지 말았어야죠.”
엘리자베스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