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81화 (8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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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립소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더이상 엘레나에게 처치할 것이 없다면, 나가봐.”

베르나르는 머뭇대다 말했다.

“폐하, 엘레나님은 한동안 열이 오르실 겁니다. 엘레나 님을 간호할 시녀를 부르겠습니다.”

“짐이 직접 할 테니, 물러가.”

칼립소의 말에 베르나르는 고개를 숙여 물러났다.

그날부터 칼립소는 엘레나의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꼭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베르나르조차도 들이지 않았다.

큰 고비를 넘겼으나, 문제는 열이었다.

이제부터는 엘레나의 체력과 의지의 싸움이었다.

칼립소는 열이 오르는 엘레나의 몸을 닦아주고 수건을 갈아주었다.

시중을 들 시녀들이 수백이 넘었지만, 칼립소는 모든 것을 혼자했다.

열에 시달리던 엘레나가 간간이 정신을 차릴 때, 칼립소는 자신의 피를 내어 주었다.

칼립소는 자신의 상처에 대한 어떤 처치도 거부했다.

약을 쓰지 않아도 칼립소의 상처는 여전히 빠르게 아물어 갔다.

그럴 때마다 엘레나의 치유력을 빼앗아 간 것이 느껴져, 심장이 조여들었다.

아문 상처를 칼립소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베었다.

사흘이 지나자, 엘레나의 열이 서서히 떨어졌다.

동시에 칼립소의 팔이 저절로 낫지 않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자신의 팔에 아픔이 느껴질수록, 상처가 아물지 않을수록, 그건 희망이었다.

그래서 칼립소는 고통을 반겼다.

팔의 상처가 낫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건 엘레나에게 다시 치유력이 돌아간 것일지도 몰랐다.

실제로 엘레나가 의식을 차리고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칼립소는 팔이 고통스러울 때마다 오히려 기뻤다.

“으, 읏”

엘레나가 신음을 흘리자, 칼립소는 바짝 다가갔다.

“정신이 들어?”

힘겹게 숨을 내쉬던 엘레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제법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무…… 물 좀요.”

칼립소는 서둘러 물잔을 엘레나의 입술에 축여주었다.

목이 탔는지 컵의 물을 모두 마신 엘레나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엘레나, 곧 나을 거야.”

칼립소는 다정한 손길로 엘레나의 땀을 닦아주었다. 엘레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날, 이후 엘레나의 열이 내렸다.

열이 내리자, 엘레나는 급속도로 회복했다. 열이 내린 동시에 치유력이 돌아온 것이다.

반면, 칼립소의 몸에선 치유력이 완전히 사라졌다.

* * *

엘레나를 불러들인 세력에 대한 조사는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데릭이 요하스 자작의 중심 무리에 대해 조사하고 있던 중이었다. 밀입국하는 세력들을 체포했고, 이들의 배후에는 요하스 자작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마지막까지 살려둔 요타에게는 히르타인답게 의리 따윈 조금도 없었다. 제 한 목숨을 구하기 위해 술술 요하스 자작이 한 짓에 대해 털어놓았다.

황명을 조작한 요하스 자작은 황제 모욕죄, 살인 교사죄 등을 물어 교수형에 처했다.

요하스 자작이 불러온 히르타인은 모조리 처형되거나, 히르타 섬으로 돌려보내고, 다시 케이타 제국에 발도 못 붙이게 하였다.

“폐하, 조사 과정에서 가이아 제국과의 연관성이 드러났습니다.”

데릭은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자세히 말해 봐.”

칼립소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히르타인을 통해 안토니안 측과 연락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번 사건이 있기 전 엘레나 님만 해도 안토니안 측에서 먼저 불러내려는 시도를 하였습니다. 다만 엘레나 님 쪽에서 거절한 것으로 압니다.”

“거절을 했어?”

칼립소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네…….”

엘레나의 이야기만 나오면 금세 표정이 바뀌는 칼립소를 보고 데릭이 이제 반쯤 포기상태였다.

엘레나를 칼립소에게서 떼어놓는 것은 이젠 불가능에 가까웠다.

“가이아 제국 문제는 어떻게 할까요? 안토니안은 친위대 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번 일의 책임을 물어 가이아 제국을 압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폐하, 이대로 두면 향후 분란의 씨앗이 될까 우려됩니다.”

“안토니안이 요하스 자작과 협력한 것이 확실한가?”

“히르타인을 통해 접선한 것은 확인되었습니다.”

“내용은?”

“정확한 내용은……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놔둬.”

“네?”

“엘레나가 나가지 않았잖아.”

칼립소는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노력을 헛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엘레나는 최선을 다해 자신과의 신뢰를 지키려고 했다.

그러니 자신도 최선을 다해 가이아 제국과 협력을 이어나갈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다만, 경고는 해야겠지. 우리가 이 사실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건 알려.”

“네, 폐하.”

백 번의 경고보다 한 번의 행동이 낫다는 것을 칼립소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 건을 들어 책임을 묻기에는 분명치 않았다.

무엇보다 안토니안에게는 엘레나를 죽일 명분이 없었다.

차라리 멍청한 안토니안이 더한 실수를 해 주길 지켜보는 편이 현명했다.

“안토니안 주변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계속 확인하고.”

“네, 폐하.”

“나가 봐.”

칼립소는 손을 내저었다.

“안토니안…….”

배에 검이 박히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다시는 검을 들지 못하게 팔부터 잘라줄까? 아니면 걷지도 못하게 발목을 절단 낼까?」

칼립소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것이 하찮았다.

중요한 것은, 엘레나가 살아서 자신의 곁에 있다는 것, 그거 하나였다.

침실 문을 열자, 엘레나가 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만으로도 혼란스러운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다.

칼립소는 누워있는 그녀 옆에 앉았다.

‘엘레나…….’

은빛 머리카락을 머리를 살짝 올려주니, 섬세하고 조그만 얼굴이 보였다.

그녀 곁에 누워 그녀를 살포시 안았다.

품 안에 쏙 들어오는 몸과 달콤한 냄새. 마음 속 공허했던 허전함이 채워졌다.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으음…….”

기척을 느낀 듯, 엘레나가 눈을 뜨려 했다.

치유력을 회복한 이후, 그녀는 사흘 내내 잠을 잤다. 그게 몸을 회복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칼립소는 알았다.

긴 잠을 잔 끝에 상처는 이제 거의 다 아물었다.

베르나르 의원이 몇 가지 연고와 약을 주었으나, 필요하지 않았다.

사흘이 지난 후에는 점차 잠이 줄어들었으나, 아직까지는 회복 기간이었다.

토닥토닥.

칼립소가 등을 몇 번 두드려주자, 엘레나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엘레나가 편히 더 잘 수 있게 칼립소가 천천히 일어나려 하자, 엘레나의 손이 그를 잡았다.

“어디…… 가요?”

“나 때문에 깬 거야?”

엘레나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게?”

“너무 오래 잤어요.”

“그럼, 뭐 좀 먹고 또 자.”

“내가 돼지예요?”

“어?”

돼지만큼 엘레나와 어울리지 않는 말이 어디 있을까.

말간 웃음을 보이며, 엘레나가 이어 말했다.

“먹고 자고, 먹고 자고 하라니까 하는 말이에요.”

“그건……. 회복중이니까.”

“이제 거의 나았어요.”

“그래도, 더 쉬어야 해. 보통 사람 같았으면…….”

‘죽었을 거야.’ 서둘러 말을 삼켰다.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싫었다.

“그럼, 같이 누워요.”

엘레나가 칼립소의 팔을 잡아당겼다.

“당신이랑 자면 잠이 잘 와요.”

칼립소가 못 이기는 척 다시 엘레나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어서 자. 재워줄게.”

토닥토닥.

칼립소의 커다란 품에 안기니, 따뜻한 기운이 전해졌다.

엘레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한 순간, 가장 먼저 생각났던 건 칼립소였다.

자신을 안고 울부짖는 그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했다.

열이 오르는 내내, 자신보다 더 아픈 얼굴로 함께 있었던 것도.

간간이 피를 넘겨주던 것도.

열이 오르는 몸을 닦아주는 것도.

모두 생생했다.

‘역시 피가 문제였어.’

「가장 밝은 달로 태어나 붉은 태양을 만나 제국의 번영을 이룰 것이니.

검은 구름의 방해를 이기고, 언약의 피를 나눌 반려를 맞아, 위대한 제국을 건설하리.」

‘언약의 피를 나눌’이라는 계시를 좀 더 주의 깊게 생각 했어야 했다.

가이아의 왕가의 혼인 예식에서는 피의 의식이 있었다.

마지막 예식절차로 포도주잔을 서로 나눠 마신다.

백포도주에는 신부의 피 한 방울을, 적포도주에는 신랑의 피 한 방울을 넣어 바꿔 마시는 것으로 예식이 끝난다.

언약의 피를 올바른 방법으로 나누지 않아 생긴 부작용 같은 것이리라.

‘이제 다 돌아온 건가.’

한 번씩 주고받았으니, 계산은 끝낸 셈이다.

그럼 이제 같이 밤을 보내지 않아도 되는 건가.

마음이 왠지 허전해졌다.

그래서 엘레나는 칼립소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아까보다 따뜻한 기운에 잠이 다시 스르르 왔다.

‘오늘은 칼립소와 대화를 좀 해보려고 했는데…….’

하지만 무거운 눈꺼풀이 들 힘도 없이 내려앉는다.

‘조금만 더 자고, 나중에 하자.’

엘레나는 칼립소의 품에 꼭 안겨 잠이 들었다.

* * *

오전 늦게 다시 일어난 엘레나는 정무를 끝낸 칼립소와 늦은 점심을 먹었다.

푸짐한 식사 후, 나란히 정원을 거닐었다.

황궁의 정원은 아름다웠다.

“정원이 아름다워요.”

“최근에 정원을 새로 꾸미라고 했지.”

가만히 걷다 보던 엘레나는 문득 뭔가를 깨달았다.

열 개의 테마로 이루어진 공원이 뭔가를 연상시켰다.

“혹시 가이아의 정원에서 영감을 얻은 거예요?”

“맞아.”

그때의 경험이 좋았으니까.

“이 정원은 테마는 뭐예요?”

“여긴 ‘후회’지.”

“‘후회’요?”

독특한 테마였다.

“‘후회’를 테마로 삼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다운데요?”

“그러니까.”

칼립소가 씁쓸하게 정원을 바라봤다.

‘후회’라는 테마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하얀 색깔의 꽃들이 사방으로 펼쳐져 있었다.

열 개의 테마 중 가장 화려한 정원이 ‘후회’라니.

“다음 정원은 뭐가 있어요?”

“신뢰, 아름다움, 후회, 생명, 평화, 정열, 용기, 고귀함, 존경, 그리고 사랑이 있지.”

“‘사랑’을 테마로 한 곳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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