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16화 (16/100)

16

생각지도 못한 말에 좌중은 얼어붙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를 공작은 안토니안의 아버지였고 선대부터 개국공신인 그의 집안은 그 위세가 황족 못지않았다.

그래서 신탁의 내용에 맞는 엘레나의 정혼자로 안토니안이 후보로 거론되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혼인 후 안토니안은 베리우스 황제가 서거하게 된다면 황제로 즉위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를 공작의 위세는 더욱 커질 것이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자리에 그를 지목하자, 대신들조차 당황한 것이다.

“폐하, 하를 공작보다 다른 이가 적합할 듯합니다.”

대신들이 서둘러 반대의 의견을 내비쳤지만, 베리우스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이번 협상은 매우 중요한 자리요. 하를 공작. 난 그대보다 믿을 수 있는 자가 떠오르지 않소. 처음 화친 이야기를 꺼낸 만큼 누구보다 책임감 있게 처리할 거라고 믿소.”

베리우스의 날카로운 시선이 하를 대공에게 향했다.

하를 공작은 국경수비대를 관할하고 있었다. 이전에 케이타 제국에 대해 논의할 때에도 이 정도는 문제없다고 큰소리를 늘어놓았다.

허나 가장 먼저 무너진 곳이 바로 국경이었다.

더구나 엘레나가 전쟁터에 나가 있는 상황에 가장 먼저 화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것이 마뜩잖았다.

베리우스의 질책하는 시선에 하를 대공은 고개를 숙였다.

“신, 폐하의 명을 기꺼이 받들겠습니다.”

그러자 만족한 듯 베리우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아 제국의 운명이 그대 손에 달렸소. 정중하게 화친을 요구하되, 비굴하게 굴지는 마시오.”

“알겠습니다. 폐하.”

하를 공작은 정중히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대전을 나오는 순간 그의 얼굴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완전히 굳었다.

화친 협약으로 가닥이 잡히자, 성안에는 기묘한 흥분마저 감돌았다.

이제 곧 전쟁이 끝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성안 사람들도 안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많은 사람의 바람을 안고 하를 공작 일행은 대열을 갖춰 출발했다.

사신단의 깃발을 들어 올리자, 케이타족 진영에서도 진입을 허가했다.

“인사드립니다.”

하를 공작이 준비한 선물을 바치며 칼립소에게 예를 표했다.

그러자 데릭이 칼립소의 옆으로 가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를 공작이라고 합니다. 가이아 제국의 국경수비대를 관할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칼립소의 입술이 비웃듯이 올라갔다. 예상한 것보다 더 국경수비대는 허술했다.

하지만 바로 뒤를 이은 데릭의 말에 칼립소의 얼굴은 차갑게 굳었다.

“안토니안의 아버지입니다.”

칼립소는 흥미로운 눈초리로 하를 공작을 바라봤다.

“무슨 용건인지 말해 보지.”

칼립소의 붉은 눈이 하를 공작에게 향했다.

“우선 저희 폐하께서는 케이타 제국과 화친을 원하십니다.”

“화친이라. 이전과는 태도가 다르군.”

뻣뻣하게 청혼선물도 모조리 되돌려 보낸 지난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하를 공작은 꿀꺽 침을 삼켰다.

“이전의 무례도 사과하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칼립소가 턱을 문질렀다.

“사과라.”

칼립소가 고개를 들어 하를 공작을 바라봤다.

“본디 진심이 담긴 사과는 직접 해야 되지 않나?”

그 말에 하를 공작은 당황한 마음을 숨기고 침착하게 말했다.

“폐하께서도 직접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화친조약을 맺고 양국 간의 교류가 활발해지면 회담 날짜를 잡겠습니다.”

“나는 성미가 급해서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까 자신이 없는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신도 그 자리에서 목을 베는 성미라.”

생각지 못한 거친 말에 하를 공작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 * *

엘레나는 황폐해진 마을을 돌아보았다.

케이타족이 지나간 곳은 자비가 없었다.

“황녀님, 가이아 제국은 어찌 되는 겁니까?”

“황녀님, 두려워요.”

“황녀님, 구해주세요.”

백성들은 엘레나가 지나가자 무릎을 꿇고 외쳤다.

그녀만이 희망이라는 듯이 부르짖었지만, 엘레나가 해줄 말은 없었다.

지난 전투에서는 승리했다지만, 이미 판을 뒤집기는 어려워 보였다.

자신의 생각보다, 케이타족은 더 강했다.

‘너무 안이했어.’

그동안 평화가 너무 길었다.

평화가 길었던 만큼 문화는 찬란하게 꽃피웠지만, 병력은 더 약화되었다.

‘이대로 계속 전쟁이 진행된다면…….’

엘레나는 끔찍한 상상에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면 천년 역사의 가이아 제국이 송두리째 케이타 제국으로 넘어가게 생겼다.

엘레나는 케이타 부대가 부순 평화의 여신 조각상 앞에 섰다.

박물관의 그림은 찢기거나 불탔고, 말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각종 예술품들이 뒹굴고 있었다.

‘모든 게 망가지겠군.’

엘레나는 절망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지 몰라 몇 년 전부터 아버님께 군사훈련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그녀의 말은 귓등에 스치지조차 못했다.

그저 언제 단정한 황녀로 돌아올 거냐며 농담 섞인 답밖에 듣지 못했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엘레나는 참담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안토니안이 급하게 그녀 옆으로 다가왔다.

“엘레나, 본궁에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

그 말에 엘레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본궁에서 파발이 도착했어. 속히 돌아오라고.”

“이대로 본궁으로 돌아가면 무슨 수가 있다는 거야?”

엘레나는 실소했다.

“그게 엘레나, 폐하께서 케이타 제국에 화친을 요청하셨대.”

“뭐?”

‘화친이라고?’ 엘레나의 표정이 굳었다.

사력을 다해 싸워보지도 않고 화친이라니.

엘레나의 성미와는 맞지 않는 일이지만, 눈 앞에 놓인 전쟁의 상처를 보니 마음이 아파 왔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준비되지 않은 전쟁은 패배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백성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이런 상황에서 화친은 어쩌면 현명한 선택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이 순순히 화친에 응할까?’

엘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잠깐이지만 그녀가 겪은 칼립소는 냉혹한 자였다.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으면 모르되, 일단 전쟁을 시작한 이상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엘레나의 얼굴이 혼란에 빠졌다.

“그쪽에서 요구가 만만치 않을 텐데.”

“걱정 마. 아버님께서 협상 대표로 가셨으니까.”

“하를 공작님이?”

“그래.”

안토니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일단 돌아가자.”

“알았어. 가자.”

엘레나는 서둘러 방향을 틀었다.

화친 협약이 진행된다면 더 이상의 전쟁이 무의미했다.

그쪽에서 어떤 요구 조건을 말할지는 모르지만 일단 들어보고 판단해야 했다.

「잡히지 마시오.」

엘레나는 갑자기 그 말이 생각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왜 호랑이굴로 들어가는 것 같지?’

엘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케이타 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가이아 제국 본성으로 가는 것이다.

화친 협약이 잘 이루어진다면 평화가 찾아올 것이고, 자신은 안토니안과 혼인식을 올리고 황녀의 의무를 행하면 된다.

그리고 나서는 가이아 제국의 군사들을 훈련시키며, 국력을 보강하면 된다.

어차피 협약이야 하를 공작이 맡았으니, 자신이 상관할 일도 아니지 않는가.

엘레나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본성을 향해 힘껏 말을 몰았다.

* * *

협상 자리에 앉아있던 하를 공작은 간신히 정신을 수습했다.

베리우스가 직접 와서 사과를 하라니.

이것은 항복선언을 받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화친을 제안하러 왔다 하나 지금은 전시 중입니다.”

하를 공작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전시 중에 저희 황제 폐하께서 직접 찾아올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가?”

수긍하는 듯한 칼립소의 반응에 하를 공작은 겨우 숨을 돌렸다.

“가이아 제국 황제께서 그리 담이 약하다면.”

칼리소가 잠시 말을 멈췄다.

“짐이 직접 찾아가면 되겠군.”

칼립소의 말에 하를 공작은 물론 케이타 제국 진영 쪽 사람들도 같이 얼어붙었다.

한참 동안의 침묵을 깬 것은 데릭이었다.

데릭은 조심스럽게 칼립소에게 나아가 말했다.

“폐하, 아무리 그래도 가이아 본성으로 들어가신다는 것은 재고해 주십시오.”

“왜 그러지? 설마 화친을 요청하러 가이아 제국이, 짐의 목에 칼이라도 들이댈까 염려인가?”

칼립소는 사나운 눈빛으로 데릭을 봤다.

그러자 데릭이 쩔쩔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칼립소의 질문에 하를 공작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저, 저희야 오신다면 언제든지 환영이지만, 그보다는 화친 조건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됩니다.”

“그런가? 그러면 짐의 요구 조건을 말하면 되겠는가?”

“네. 말씀해 주소서.”

“그러니까, 짐이 요구 조건을 내밀면, 그대가…… 참, 이름이 뭐라고?”

이름조차 잊어버렸다는 듯이 칼립소가 말하자, 하를 공작은 다시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를 공작입니다.”

“그래, 하를.”

작위는 바로 제하고 이름으로 부르는 통에 하를 공작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그다음 말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경악스러웠다.

“그대가 내 요구를 들어줄 수는 있고?”

“저에게 그런 권한은 없습니다. 다만 요구 조건을 말씀하시면 듣고, 본궁으로 돌아가 다시 논의를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너무 걸리잖아.”

칼립소가 짜증 난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 오고 가고 시간 끌며 논의할 바에야, 전쟁을 계속하는 게 빠를 것 같은데?”

하를 공작은 칼립소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

전쟁을 계속하면 누가 손해인지 명백히 깨닫고, 자신의 요구 조건은 무조건 다 수용하라는 뜻이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최대한 수용토록 폐하께 전달하겠습니다.”

“아니, 틀렸어.”

칼립소가 고개를 저었다.

“방금 당신 입으로 그런 권한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나.”

하를 공작이 당황해하는 사이 칼립소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제가 최대한 설득을…….”

“아니, 그냥 지금 같이 가지.”

“네?”

“가서 성문이나 여시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까 말했잖아. 짐이 직접 가겠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