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피가 튄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칼립소는 미소까지 띠고 말했다.
하지만 칼립소를 아는 자면 누구라도 알고 있었다. 지금 그가 매우 분노한 상태라는 것을.
만면에 띤 미소가 그러했고, 한층 가벼워진 몸동작과 유려한 손놀림이 그러했다.
칼립소는 화가 날수록 미소가 짙어지고, 잔인해지니까.
“변명을 해봐.”
칼립소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뭘 말이지?”
엘레나는 고운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당신이 이 옷을 입고 있는 이유, 말해보라는 거야.”
칼립소가 경고하듯 차갑게 말했다.
“난 지금 기회를 주는 거야.”
“이 옷을 입는데 혼인 말고 다른 이유가 있나?”
“난 또, 예쁘게 입고 날 기다리나 했지.”
“…….”
“정말 이 녀석하고 혼인을 올릴 작정이었나?”
“그는 내 정혼자야.”
그 말에 칼립소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졌다.
“다시 잡히면 얌전히 황후가 된다며?”
엘레나의 눈이 번뜩였다.
“그거야 내가 잡혔을 때 이야기지.”
그 말과 동시에 엘레나가 드레스를 올려잡고 튀어 나갔다.
펄쩍 뛴 엘레나가 손짓을 하자, 예식 후에 날려 보낼 수많은 비둘기들이 갑자기 신전 안으로 들어왔다.
갑자기 날아든 하얀 비둘기 떼에 칼립소의 군사들이 당황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엘레나는 병사에게 검을 받았다.
검을 쥔 엘레나는 제일 먼저 걸리적거리는 드레스를 허벅지 길이까지 잘라버렸다.
“안토니안, 아바마마를 모셔줘.”
안토니안이 서둘러 베리우스와 엘리자베스를 신전 뒤로 안내했다.
“엘레나! 너도 어서 와.”
“난 여기서 막을게.”
엘레나의 검이 빛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하얀 웨딩드레스가 붉게 물들도록 그녀의 검이 춤을 추었다. 어느새 반짝이는 하얀 빛은 그녀의 머리카락밖에 남지 않았다.
칼립소는 잠자코 그녀의 독무대를 지켜봤다.
그는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그 숨 가쁜 순간에도 제자리를 지키며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엘레나, 빨리! 어서 와.”
신전 뒤로 두꺼운 벽이 열리자, 안토니안이 다급히 소리쳤다.
엘레나가 날쌔게 몸을 날리는 순간, 문이 아슬아슬하게 닫혔다.
“비밀통로가 있었군.”
칼립소가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어차피 이곳까지 온 이상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었다.
「그거야 잡혔을 때 이야기지.」
칼립소가 뭔가 생각하는 듯이 손을 들어 턱을 문질렀다.
아직도 엘레나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했다.
「그는 내 정혼자야.」
‘감히, 날 능멸해?’ 칼립소의 눈이 사납게 번뜩였다.
이곳까지 밀고 들어오면서 ‘은빛 여우’가 나타나지 않았는지 온갖 촉각을 곤두세웠다.
혹시라도 자신이 모르는 전장에서 상할까 봐 어디서든 제일 먼저 보고부터 하라 지시해 두었다.
한동안 나타나지 않길래 케이타 제국에서 무사히 넘어간 것은 맞을까, 혹시라도 다치지는 않았을까 걱정까지 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쓸데없는 짓이었다니.
‘혼인을 해?’
풀어줬으니 당연히 전쟁을 준비하고 맞서 싸우리라 예상했다. 승부를 그토록 원하니, 기회를 준 것뿐이다.
보내줬고, 잡으러 가면 그뿐이었다.
그런데 승부보다 안토니안이란 자와의 혼인이 급했단 말인가.
「내 정혼자야.」
다시금 떠올린 그녀의 말에 칼립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본성부터 치러 간다. 분명 그쪽과 연결되어 있을 테니.”
“네, 폐하.”
칼립소의 군대는 신전을 지나 가이아 제국의 중심부로 향했다.
* * *
본성에서는 죽음과 같은 적막이 흘렀다.
이토록 빠르게, 그리고 처참하게 당할 줄을 몰랐다.
케이타 제국의 군대는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
“국경수비대는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이냐!”
겨우 피신 온 베리우스가 고함을 지르자, 대신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게…… 말을 타고 오는 병사들이 어찌나 번개 같던지…….”
“송구합니다.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개 숙인 대신들을 향해 베리우스가 분노를 터뜨렸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그깟 야만족에게 이리 무너지다니!”
베리우스는 암담한 표정으로 외쳤다.
다른 날도 아니고 딸의 혼인날에 급습을 당해 도망치다니! 베리우스는 자존심에 단단히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상처 난 자존심을 회복하기도 전에 받은 대신들의 보고는 분노를 넘어 참담함까지 불러일으켰다.
케이타 제국에게 침략당한 상황은 위급했다.
게다가 이미 본성도 포위된 상태였다. 이대로면 굴욕적인 항복을 선택해야 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아바마마, 저를 보내주세요.”
엘레나는 피로 물든 실크드레스를 입은 채 무릎 꿇고 애원했다.
베리우스의 고민이 깊어졌다.
‘진작 딸의 말에 귀를 기울일걸.’
그녀가 탈출해왔을 때 바로 선공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지금 와서는 뒤늦은 후회일 뿐이었다.
“지금 병력 상황이 어떤가?”
“궁 안에 친위대가 있습니다. 황녀님이 나와 주신다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궁 안의 수비를 맡고 있던 아들라스 공이 반기며 말했다.
평소라면 어림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워낙 급박했다. 게다가 엘레나보다 뛰어난 장수는 현재 가이아 제국에서 찾기 힘들었다.
아들라스 공의 제안에 베리우스 황제의 표정에서 갈등이 엿보였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엘레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폐하, 간청드립니다.”
“…….”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베리우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하고 출병토록 하라.”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엘레나가 서둘러 일어나, 준비하러 자리를 옮겼다.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엘레나는 갑옷으로 갈아입었다.
엘레나는 심장의 피가 온몸을 돌아 날뛰는 것을 여실히 느꼈다. 엘레나가 준비를 마치자, 그 뒤를 안토니안이 따라왔다.
“엘레나, 이야기 좀 해.”
“안토니안, 시간이 없어. 같이 출병하자.”
“그럼, 우리 혼인은?”
뭔가 불안하다는 듯이 안토니안이 중얼거렸다.
엘레나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 상황에 혼인 걱정이라니.
“안토니안, 정신 차려. 지금 우리한테는 전쟁이 우선이야.”
“하지만…….”
“전쟁이 마무리되면, 다시 화려하게 혼인식을 올리자. 걱정 마. 내 정혼자는 너뿐인걸.”
그 말에 비로소 안토니안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전쟁에서 승리해야겠지?”
“그래.”
“그럼, 출발하자.”
엘레나는 호위대를 끌고 성문을 나섰다.
* * *
엘레나가 떠나자, 황궁에서는 작은 소란이 계속되었다.
뒤늦게라도 화친을 맺어야 한다는 대신들의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하를 대공이 있었다.
대신들의 추대에 의해 의견을 모은 하를 대공은 베리우스 황제 앞으로 나와 입을 열었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베리우스 황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위에 오른 후 처음으로 겪는 전쟁 소식에 베리우스의 정신은 반쯤 나가 있었다.
그는 본래 전쟁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동맹국들이 그토록 원조 요청을 해도, 엘레나가 그토록 애원해도 모른 척한 것이다.
“폐하, 케이타 제국에서 공격을 한 것은 우리가 그들의 청혼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어느새 케이타족은 야만족에서 제국으로 격상되어 있었다.
하를 대공의 말에 황실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누구도 먼저 꺼내지 못한 이야기인 탓이었다. 하를 대공은 긴장된 분위기를 의식했지만 차분히 말을 이었다.
“우리가 먼저 예의를 갖춰 그들에게 사과하고, 부드럽게 달래며 화친을 맺는 것이 옳다고 여겨집니다.”
“화친?”
“예, 폐하. 지금이라도 손을 내밀면 그들은 감격할 겁니다.”
그러자 평소 거친 성미를 지닌 아들라스 공이 반대하며 나섰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야만족과 화친이라니요? 게다가 지금은 황녀님께서도 출병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이런 상태에서 화친을 제의한다는 것은, 우리더러 항복을 하자는 거와 같은 거 아닙니까?”
“항복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자존심을 먼저 세워주자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청혼을 한다면 받아들이기라도 하라는 겁니까? 아니면 우리의 황녀님을 야만족에게 넘기겠다는 겁니까? 다른 이도 아니고 어찌 하를 공작께서 그런 말을 입에 담으십니까?”
그 말에 하를 대공이 미간을 찌푸렸다.
“한 번 거부당한 청혼을 다시 하지는 않을 겁니다. 폐하, 이대로라면 가이아 제국은 쑥대밭이 됩니다. 벌써부터 케이타족의 약탈 소식이 끊임없이 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깟 야만족 하나 못 이긴단 말입니까?”
아들라스 공의 말에 대신들은 쥐 죽은 듯이 침묵했다.
그들도 예전에는 아들라스 공처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전쟁을 겪어보니 케이타 제국의 위력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폐하,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실제로 본성이 포위된 이후 원활한 물자교류도 어려워진 상황이었다.
지금이야 자급자족이 된다고는 하지만 귀족들 외에 평민들은 벌써부터 이만저만 불편을 겪는 것이 아니었다.
“폐하, 화친을 맺으소서.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면 저들도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베리우스의 고민이 깊어졌다.
“좀 더 시간을 두고 결정하도록 하지.”
하지만 베리우스의 고민하는 며칠 동안 상황은 점점 악화될 뿐이었다.
다행히 엘레나가 이끈 부대는 승전하였으나, 나머지 부대들은 모조리 패했다.
때문에 서둘러 화친을 맺어야 한다는 대신들의 주장은 더욱 거세졌다.
하지만 베리우스 황제는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야만족과의 화친은 처음이었으며, 그들이 어떤 요구를 할지 몰랐다.
“폐하, 결단을 내리소서. 이대로라면 가이아 제국은 무너집니다.”
이미 대신들의 분위기는 화친 쪽으로 기울었다.
“폐하, 화친을 맺어주십시오.”
베리우스 황제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누가 협상가로 나서겠는가?”
그 말에 목소리를 높이던 대신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지금 시점에 적진으로 간다는 것은 목을 내놓는 거나 다름없었다.
“하를 공작.”
베리우스 황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가 협상가로 나서주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