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아몬.”
리엘리는 자존감이 뚝뚝 떨어진 게 확연한 아몬이 안타까워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당찮다니, 왜 그런 소리를 해. 응? 동생이 누나한테 서운할 수도 있는 거지.”
“정말로 서운하지 않아요, 누나.”
그냥 우울할 따름이다.
아직은 제게 온전히 주어진 사랑과 관심이 이내 스승님에게 양분되고, 이후 누님의 아이가 태어나면 또다시 쪼개질 게 분명했다.
그때 아주 하찮을 정도로 적게 남았을 제 몫이 눈에 선해서… 참담할 뿐이다.
“…….”
이에 리엘리는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척 보기에도 심상찮아 보이는 아몬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그녀가 제 앞에 서자 시선을 들어 올리던 아몬은 이내 작게 비명을 질렀다.
“…아!”
그녀는 예고도 없이 아몬을 번쩍 안더니 곧 아이가 앉아 있던 의자에 자리를 잡아버렸다.
그러니까, 아몬은 한순간에 리엘리를 마주한 채 그녀의 다리 위에 걸터앉게 된 것이었다.
당황한 아몬이 저도 모르게 리엘리의 가슴팍을 슬쩍 밀어 거리를 벌렸다.
이에 리엘리는 순순히 밀려나 주었지만 아이가 떨어지지 않게 양손을 깍지 껴 그의 허리께를 받쳐주었다.
“얼굴은 그게 아닌데? 서운하지 않으면… 속상했니?”
아몬은 자신을 완전 어린아이처럼 다루는 누님의 모습에 일순 자신이 왜 우울한지 망각했지만, 곧 이어진 그녀의 질문에 마음이 들쑤셔진 듯이 아파졌다.
코앞에서 일렁이는 아몬의 눈동자에 아이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게 된 리엘리는 작은 몸을 끌어당겼다.
또다시 리엘리의 품에 안기게 된 아몬은 더 이상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리엘리는 자신에게 매달리듯 파고든 동생의 작은 등을 토닥이며 속삭였다.
“우리 아몬이 많이 속상했나 보네. 누나가 잘못했다. 그렇지?”
“…누나는 잘못하신 게 없어요.”
다 제가 못난 탓이다.
“아냐. 너한테는 내가 유일한 가족인데….”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그 얼마나 무거운 말이던가.
리엘리는 새삼 가슴 깊이 박혀오는 죄책감에 눈을 내리깔았다.
자신이 낯선 세계에서 이리 멀쩡히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전부 이곳에서 새로 사귄 인연 덕일 텐데, 여태껏 고독한 인생을 살아온 아몬에게 자신은 이제야 겨우 내려진 동아줄이나 다름없었을 터였다.
‘불안해하지 않도록 신경 써주겠다 마음먹었는데, 생각만큼 잘되지 않는구나.’
“있잖아, 아몬.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서 너를 사랑하는 마음이 줄어드는 건 아냐.”
“…….”
“전에 말했지. 이 세계에서 널 가장 사랑한다고.”
그건 너를 달래기 위한 거짓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곳에 정착하고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큰 지주가 되어준 사람이 아몬이었다.
그만큼 그는 리엘리 자신에게 있어서도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이기도 했다.
“널 사랑할 몫을 떼어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닌걸. 그러니 내가 아르반을 좋아한다고 너를 등한시할 리는 없어.”
“…그렇지만 언젠가 저보다 스승님이 더 좋아지면요.”
아몬은 순간적인 감정을 참지 못하고 원망 어린 음성을 토해냈다.
아차 싶어 말을 정정하기도 전에, 리엘리가 그에 관해 대답했다.
“언제나 네가 첫 번째라고 약속하게.”
아몬은 리엘리의 목덜미에 파묻힌 얼굴을 들고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제가, 누나의 첫 번째로 남을 수 있는 건가요.”
“언제나 우리 아몬이 누나의 첫 번째인걸.”
리엘리가 확고한 어조로 맹세하자 아몬은 떨리는 눈으로 재차 질문했다.
“…스승님보다 제가 우선인가요.”
“그럼.”
“누님이 결혼하게 되더라도요?”
“음, 물론이지.”
아르반과 결혼할지는 모르겠지만.
리엘리는 씩 웃으며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언제가 아이가 생기더라도, 그때도 제가 첫 번째일 거라 말씀하실 수 있나요.”
아몬은 마치 그녀를 시험하기라도 하는 양 시선을 마주한 채 사뭇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하하, 너무 멀리까지 간 거 아냐? 그래,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도 언제나 네가 첫 번째야.”
아몬은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 불안해하더니 또 이리 예쁘게 웃고.
리엘리는 그런 아몬을 보며 확실히 아이는 아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
어찌어찌 아몬을 달래고 이튿날, 나는 공작저를 방문한 아르반과 함께 온실로 향했다.
아르반에게 도움을 요청한 만큼 하루라도 빠르게 흑마법과 관련된 정보를 공유함이 옳았기 때문이었다.
“이 분수예요.”
나는 분수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아르반에게 말했다.
이곳에 함께 방문하기 위해 이른 시간에 걸음 해준 아르반이 고마운 한편,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바쁜 와중에도 일부러 시간을 내어줬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사실 여기 정도는 율렌이랑 둘이 와도 문제 될 건 없는데.’
이곳은 인적이 끊긴 지 꽤 되었을 터였기에 크게 위험할 것도 없었다.
쌍둥이에게 온실 앞뒷문 망을 보게 시켰지만, 다시 주위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한 나는 바구니를 열었다.
그러자 휙, 튀어나온 율렌이 곧장 내 어깨에 자리 잡았다.
전처럼 곧장 아르반에게 달려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얌전하다.
내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던 율렌과 눈이 마주쳤다.
“왜?”
“아냐, 아무것도. 아르반, 바로 열어도 될까요?”
얘가 그래도 상황에 따라 자제하긴 하는구나 싶어 좀 신기하긴 했지만 놀러 온 게 아니었기에 곧장 그에게 물었다.
“알려주시면 제가 하겠습니다.”
“음, 그래요.”
그는 내가 짚어주는 대로 비밀 통로를 열었다.
나는 꿈속에서 보았을 때와 달리 소복이 먼저가 쌓인 계단을 보며 혀를 찼다.
‘역시 건질만 한 단서는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들어가 보긴 해야겠지.
“엘리, 당신은 여기서 기다리는 게 좋을 듯합니다만….”
아르반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다 말끝을 흐렸다.
나를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과보호다.
“내려가요.”
어차피 위험할 상황도 없을뿐더러, 내 눈으로 확인해야 마음이 놓일 터였다.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내게 당부했다.
“제 뒤에 꼭 붙어서 따라오십시오.”
“당연한 말을.”
그가 앞장서서 아래로 향하고 내가 그 뒤를 따랐다.
천천히 내려가는데, 아까부터 불만스럽게 살랑이던 율렌의 꼬리가 기어이 내 머리를 때렸다.
“…율렌, 내가 네 기분 모르는 거 아닌데 진짜 그 꼬리는 좀 어떻게 해줘라.”
“아, 미안. 이게 내 마음대로 잘 안돼서….”
“이번만 나한테 안겨 가자.”
나는 따로 자아라도 있는지 멋대로 움직이는 율렌의 꼬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율렌 역시 내가 참고 있음을 알았는지 순순히 품에 안겼다.
아래로 갈수록 점점 더 짙어지는 검은 마력의 농도로 인해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러니 녀석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 그냥 못 이기는 척 율렌이랑 아르반만 내려보낼 걸 그랬나.’
순간 그런 후회까지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남한테 떠넘기기만 하면 쓰나.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발을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을 기어 다녀 입을 떼고 싶지 않았다.
항상 말이 많던 율렌까지 침묵을 유지하니 사위를 울리는 건 나와 아르반이 계단을 내딛는 작은 발소리뿐이었다.
그렇게 묵묵히 아래로 내려가자 리엘리가 리셀을 발견했던 곳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시체가 넘쳐났던 그곳은 이제 핏자국만이 남아 그날의 기억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할 뿐, 더는 아무것도 존재치 않았다.
여태 방치해 뒀다면 분수의 통로를 열었을 때 썩은 내가 진동했겠지. 예상했던 바였다.
나는 오른쪽에 위치한 검은 문을 바라봤다.
저곳이 세리나 로베르의 시체로 실험을 자행했던 장소다.
내 시선이 고정되자 아르반이 잠시 나를 힐끔거리며 눈길을 따라가더니 그대로 문 앞으로 가 섰다.
“…….”
그가 나를 돌아봤다.
열어도 되겠냐는 눈빛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아무것도 없을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상하게 목이 탔다.
내가 마른 침을 삼키는 사이, 아르반이 문에 열었다.
그 직후, 그 안에 있는 무언가를 인식한 아르반은 순식간에 뒤로 물러나 내 앞을 막아섰다.
나는 갑자기 시야를 가로막는 아르반을 피해 고개만 옆으로 빼 그의 앞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존재를 발견한 나는 눈을 홉떴다.
‘저 사람…!’
금발 흑안의 흑마법사.
3년 전, 리엘리와 마주했던 흑마법사 중 하나였다.
내가 고개를 내밀자 뒤를 보지 않고도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는지, 아르반이 재차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시야가 그의 등에 가려진 찰나, 폭발하듯 검은 마력의 기운이 강해졌다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잠깐만요, 아르반. 저 사람….”
나는 답답함에 한 손으로 율렌을 안아 들고 아르반의 등을 밀었다.
그러자 어쩐 일인지 순순히 밀려나 주는 아르반으로 인해 다시 앞을 확인하게 된 나는 일순 멈칫했다.
그 잠깐 사이에 흑마법사가 사라졌다.
내가 잠시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버둥거리며 품에서 빠져나간 율렌이 방금 전까지 흑마법사가 서 있던 곳으로 날아갔다.
“엘리, 괜찮습니까?”
그런 녀석의 행동은 안중에도 없는지 아르반은 내 상태를 살피기에 바빴다.
그가 말을 붙여준 탓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얼떨떨함을 감추지 못한 채 답했다.
“아, 괘, 괜찮아요. 그보다 저희도 빨리 들어가 봐요.”
내가 그의 팔을 잡아끌자 율렌이 들어간 곳을 곁눈질로 살핀 아르반이 발을 뗐다.
검은 문 안쪽으로 들어서자 거대한 홀을 가득 채운 마법진이 시야를 메워왔다.
“…율렌, 이게 뭐야.”
“이동 마법진.”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방금 나랑 눈이 마주친 흑마법사는 이 마법진을 사용해 몸을 피한 건가.
눈살을 찌푸리며 마법진을 내려다보는데 율렌이 중얼거렸다.
“…이번 황제는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자구나.”
“…뭐?”
율렌의 입에서 튀어나왔다고는 믿기 힘든 언사였기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녀석을 향했다.
“흑마법사 나부랭이들만 설치는 줄 알았는데 황제가 손을 얹고 있다는 게 분명해졌어.”
율렌은 마법진의 중앙에 자리 잡고 주변을 둘러봤다.
“방금 여기 있던 흑마법사에게서 금술의 흔적이 느껴져. 카르세이가 금서로 지정해 황좌를 이어받은 자만이 손댈 수 있는 물건인데 그 흔적이 묻어났다는 건….”
율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말 화가 난 모양인지 작지만 날카로운 어금니가 다 드러날 만큼 오만상을 찌푸리며 으르렁거리던 녀석이 몇 번 발을 구르고는 금세 날아올랐다.
내 품으로 날아드는 녀석을 얼결에 받아들자 율렌이 꼬리로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빨리 여기서 나가자. 있어 봐야 더 알아낼 것도 없어. 마법진에 추적 방지 마법이 더해져 있으니 지금 내 마력으로 이걸 파헤치는 건 불가능해.”
“그 전에 이게 무슨 기운인지 먼저 설명해 줬으면 하는데. 그 금서라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아르반이 율렌이 자리했던 마법진의 중앙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런 아르반을 보고 잠시 멈칫하던 율렌은 이내 코를 찡긋거리며 답했다.
“다 설명해 줄 테니까 일단 밖으로 나가자. 말이 길어질 텐데 여기서 얘기하자니 너무 불쾌해.”
그 심정을 백분 이해하는 나는 녀석을 거들어주었다.
“그래요. 일단 온실로 돌아가서 얘기해요.”
“…알겠습니다.”
내 권유에 마지못해 수긍한 아르반이 미간을 좁힌 채 발을 뗐다.
나 역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마법진을 계속 흘깃거리게 되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율렌이 확신했듯 마법진에서는 익숙하고도 불쾌한 기운이 풍겼기 때문이었다.
‘황궁에서 느꼈던 기운.’
나는 문득 아르반의 생일 연회에 참석하고자 황궁에 갔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그때는 미약하게 느껴졌던, 검은 마력과 섞여 있던 또 다른 기운.
여태 공작저에서 지내며 느껴지던 기운과는 결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대체 황궁에서는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