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내가 예상한 원망도, 떨림도, 그 어떤 감정도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였다.
“···지금까지는 너와 리셀을 신경 쓸 만큼 여유가 없었어. 변명은 하지 않을게.”
사죄해야 하는 입장에서 이리 덤덤하게 말해도 되는 건가 싶긴 했다.
하지만 뭐랄까, 나는 이 자리에 리엘리의 대변인으로 참석한 듯한 기분이었다.
리엘리가 그 당시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토대로 내 나름의 의견을 더해 아마도 그러했을 것이라 대신 입을 여는.
분명 클레어에게는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존재했다. 심히 유감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런 내 감상은 어디까지나 이 사건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선 제삼자의 시선에 불과했다.
그러니 본래 리엘리가 느끼던 죄책감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었으나 진심에서 우러난 사과를 할 수도 없었다.
난 그때의 리엘리 본인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이 몸을 차지하고 있는 건 나였다.
리엘리로서 살아가고 있으니 단물만 빨아먹을 수 있나.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내 몫이었다.
그러니 클레어가 어떤 원망을 토해낸다 해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클레어는 나를 원망하는 대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오빠와 만나는 건 좀 더 고민해 볼게요.”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클로에가 자리에서 일어나기에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잠깐만. 이제 와서 말하는 거긴 하지만 그 눈, 내가 반드시 고쳐줄게.”
말하고 난 다음, 곧장 아차 했다.
너무 성급히 얘기를 꺼냈나 싶어서.
아니나 다를까, 제 눈에 대해 언급하자 그대로 몸을 굳힌 클레어가 허리를 일으키며 답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아가씨. 하지만 가망 없는 것에 희망을 품고 싶지 않아요. 더 무너지면 정말 버티기 힘들 것 같거든요.”
그 대답에서는 여태 흔적도 찾을 수 없던 작은 원망이 새어 나왔다.
내 말을 그저 상투적인 위로라 여기는구나.
“아냐.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그래!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할게. 당장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반드시 고쳐줄 거야.”
이에 클레어는 그저 입술을 꼭 깨물고 내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나는 길게 숨을 토하며 이마를 짚었다.
너무 근거 없는 이야기라 믿지 않는 걸까.
차라리 눈을 고쳐줄 수 있게 되었을 때 운을 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
다음 날도 아침 식사를 마친 나는 리셀과 마주 앉았다.
그렇게 사라진 클레어가 신경 쓰여 계속 그녀와의 대화를 곱씹고 있는데, 리셀이 입을 열어왔다.
“그리고 보니 어제 클레어와 닮은 아이를 봤습니다.”
나는 흠칫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리셀을 바라봤다.
역시 클레어를 보긴 봤던 거구나.
“백발에 긴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던 시녀였는데, 멀리서 봤을 때 그 아이와 닮아 저도 모르게 클레어라고 불러버렸습니다.”
리셀은 작은 미소를 머금은 채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작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멀리서도 들렸던 모양이더군요. 클레어라고 부르니 놀라 그대로 달아나버렸습니다.”
나는 어제 클레어의 반응을 떠올렸다.
그리고 보니 눈이 보이지 않아서인지 청각이 매우 예민한 편인 성싶었다.
“눈이 안 보이니 소리에 민감할 텐데 놀라게 해서 미안하더군요.”
“제 담당 시녀예요. 그 애가 당신 말처럼 소리에 민감한 애라 처음 듣는 사람의 목소리에 놀란 것 같네요. 그보다 지내는 데 불편한 건 없나요?”
나는 혹여라도 그가 클레어에 대해 더 궁금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다행히 그는 별다른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듯 대답했다.
“예, 딱히.”
그 뒤로 날씨와 그림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나가다가 침묵을 유지했다.
*
오후에는 그냥 방에서 마법 연습하며 시간을 보냈다.
생각을 떨치기에는 마법만 한 것이 또 없었다.
더럽게 어렵고, 더럽게 힘들고, 더럽게 안 되고, 더럽게 집중해야 하니까.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나는 기다리던 저녁 시간이 되자 곧장 문을 박차고 나갔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손님이 있었다.
“어서 와요. 세이린, 로즈니. 바쁠 텐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리.”
“없던 시간이라도 당연히 내서 와야죠. 어머! 엘리, 그 원피스 정말 사랑스럽네요.”
나는 로즈니의 감탄에 내 옷을 내려다봤다.
오늘 내가 입은 원피스는 편안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단출한 디자인이었다.
그 때문에 사랑스… 럽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연분홍빛이라 그런가 보다 했다.
두 사람을 이끌고 식당으로 가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마침 아몬이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가장 늦었네요.”
“늦기는요, 일찍 오셨는데요.”
로즈니가 살포시 웃자 세이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저희가 좀 서둘렀습니다.”
“아무렴 엘리가 저희 세 사람에게 긴히 할 말이 있다는데, 궁금증을 참을 수가 있어야죠.”
로즈니는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바라봤다.
식사를 먼저 들고 나중에 천천히 얘기를 꺼낼 심상이었는데, 아무래도 그른 것 같다.
세이린 역시 로즈니와 별다를 것 없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아몬만이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표정이었다.
‘내가 이상한 말이라도 꺼낼 것 같나.’
음, 생각해보니 대뜸 셋을 불러놓고 할 말이 있노라 했으니 각자 궁금증이 부풀었을 만도 했다.
나는 그들의 답답한 마음을 해소해주고자 즉각 입을 뗐다.
“다름이 아니라, 세 사람 모두에게 알려줄 사실이 있는데 한 명씩 전달하는 것보다 이편이 좋을 것 같아서 자리를 마련했어요.”
진짜 속마음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얼굴을 마주하고 말하기 민망해서지만….
나는 조용히 내가 꺼낼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 셋을 쓱 쳐다보고는 작게 심호흡한 뒤 덧붙였다.
“제가 이번에 아르반 카넬로웰 대공과 그… 교, 교제하게 돼서, 세 사람한테는 미리 말해두고 싶었어요.”
막상 내 연애사를 알리자니 아르반에게 고백할 때보다 배는 더 떨리는 것 같았다.
‘괜히 다 불러모았나.’
무슨 중대 발표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이렇게 미리 말하지 않고 나중에 가서 알게 된다면 셋 다 굉장히 서운할 터였다.
그렇다고 편지로 얘기를 하자니 다들 궁금할 게 많을 것 같았고.
나는 가장 신경 쓰이는 아몬을 슬쩍 쳐다봤다.
아이는 화등잔만큼 커진 눈으로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충격이 커 보여서 괜찮으냐 물어보려는데, 옆에서 로즈니의 새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쩜!! 세상에, 엘리! 너무너무 축하드려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로즈니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주먹 쥔 두 손을 연신 흔들어댔다.
세이린 역시 상기된 표정이었지만 로즈니가 너무 격한 반응을 보이자 도리어 조금 당황한 듯했다.
그러나 곧 익숙하게 본래의 페이스로 돌아온 세이린이 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엘리. 어쩐지 각하께서 기분이 좋아 보이신다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군요.”
“두 사람 다 고마워요.”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둘의 모습에 기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다.
“…축하드립니다, 누님.”
나는 조금 늦게 입을 연 아몬을 바라봤다.
아까 많이 충격받은 듯해 보였는데, 지금은 또 밝게 미소 짓고 있었다.
“축하해줘서 고마워, 아몬.”
나는 대답하며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평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
살짝 달아오른 눈가.
그리고 꾹 다물린 채 입꼬리만 끌어올려 지어낸 미소.
그 모든 것이 마음에 걸렸다.
‘저렇게 웃는 거로 봐서는 진심이 아닌 것 같은데.’
분명 억지로 그려낸 미소였다.
“어떻게 교제하게 되신 건가요?”
나는 그런 아몬이 못내 신경 쓰였지만 내게 계속 말을 붙여오는 로즈니로 인해 뭐라 물어볼 수 없었다.
로즈니의 물음에 답하며, 아몬을 힐긋 바라봤다.
아몬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세이린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식탁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의 작은 떨림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아무래도 식사가 끝나고 얘기를 나눠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세이린과 로즈니를 배웅한 리엘리는 아몬을 돌아봤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미소 짓는 아이의 모습에 슬쩍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리엘리의 표정이 좋지 않자 그녀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귀신같이 반응하는 아몬 역시 긴장해 온몸이 뻣뻣했다.
“아몬, 우리 올라가서 둘이 얘기 좀 할까?”
리엘리는 여느 때와 같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안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반사적으로 맞잡았지만, 아몬은 위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분명 제 의지로 걷고 있음에도 억지로 끌려가는 양, 도망치고 싶었다.
아몬은 우울하기만 했다.
결국… 우려했던 일이 발생하고 말았으니까.
‘스승님이라니, 그럴 만도 하지.’
다른 놈팡이가 아니라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모르겠다.
최대한 먼 미래에 일어났으면 했던 일이 너무도 빨리 발생해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딘가에 머리를 세게 부딪히기라도 한 듯이 멍했다.
아몬은 앞서 걷는 누님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감정에 집어 삼켜진 이성이 잘 돌아가지 않았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명확히 인식할 수 있었다.
‘누님의 심기가 불편하셔.’
대체 무엇 때문일까.
분명 평소같이 행동했던 것 같은데, 제 무엇이 누님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아몬은 입술을 깨물었다.
초조함에 빠르게 박동하는 심장마저 거슬려 미칠 것 같았다.
리엘리는 그런 아몬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마주 앉아 아이의 표정을 살폈다.
‘역시 어딘가 불편해 보여.’
그녀는 안타까운 마음에 눈썹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아몬, 누나가 연애한다니까 서운하니?”
서운하다니.
아몬은 그녀의 질문에 순간적으로 울컥 치미는 감정을 삼켰다.
단순히 서운하다는 단어로 정의할 수 없을 만큼 암담한 심정이었다.
‘누님을 믿지 못하는 건 아냐. 무슨 일이 있어도 날 사랑해주신다고 하셨으니 말씀을 지키시겠지.’
이성은 분명 그리 말하고 있었지만, 불안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아몬의 귓가에 끊임없이 속삭였다.
‘널 사랑하실지언정 그 사랑은 점점 뒤로 밀려 언젠가는 이리 신경 써 주시지도 않을 거야.’
온몸이 차갑게 식어간다.
아몬은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떼어냈다.
“…서운하다니, 당치도 않아요.”
제 주제에 어떻게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