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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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못 하게 가라앉은 기분을 억지로 끌어올려 아몬과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율렌에게 차근차근 설명을 더 했다.
조용히 경청하던 율렌은 내가 이야기를 마치자 고개를 쳐들며 입을 열었다.
“결론은 공작이 흑마법사 놈들과 손을 잡아 세리나 로베르의 시체로 실험을 하고 있고, 그게 부활을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고?”
“맞아.”
“그리고 흑마법사 놈들의 기색으로 미루어보아 공작과 완전한 상하 관계라 보기는 애매했다… 이게 맞아?”
“응. 직접 대화를 나눈 게 아니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런 것 같았어.”
아무리 나라님이 없는 곳에서는 못 하는 말이 없다지만 적어도 그들이 공작을 모시는 이들이라면 리엘리가 공작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그 앞에서 대놓고 불경하게 입을 놀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흐음… 그렇다면 정말 황실과 얽혀 있을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이해가 안 돼.”
“왜, 뭐가.”
“비단 황실만이 아니라 그냥 다른 세력이 공작과 손을 잡고 일을 벌이고 있다 쳐. 그들한테 그 실험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어. 공작에게만 좋은 일이잖아.”
“그렇긴 한데… 꼭 그 실험이 양측에 이득을 가져다주기 위해 실행하는 게 아닐 수도 있잖아.”
“그럼?”
“예를 들어서… 공작과 손을 잡은 다른 세력이 공작에게 바라는 다른 무언가를 요구하는 대신 제공하는 대가일 수도 있고.”
율렌의 의견은 확실히 신빙성이 높아 보였다.
‘로베르 공작가는 아군으로 나쁠 것 하나 없는 가문이니.’
그렇다면 정말 황실 측과 모종의 거래를 하고 있단 말일까.
“일단 엘리, 황실과 얽혀 있든 아니든 간에 그 문제에 대해서 네가 조사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
“…그렇지.”
비록 부족함 없이 생활하고 있다고는 하나 내 손으로 떨어지는 모든 것들은 전부 공작을 통해야 얻을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흑마법사들과 공작이 아직도 그 실험을 행하고 있는지 알아보는 건 하나 마나 한 짓이었다.
‘3년 전 기억으로 봐서는 분명 어디선가 실험은 이어지고 있을 거야.’
아마 공작 본인에게 묻는다 한들 딱히 부정하리란 생각이 들진 않았다.
하지만 그 장소와 협력하고 있는 세력에 대해 말해주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순순히 알려줄 리 없지.’
그랬다면 애초에 실험 장소를 옮기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냥 주인한테 부탁하는 게 어때? 엘리 너보다 황성에 드나들기도 쉽고, 이제 마냥 내가 힘을 되찾아 주인이 황제가 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잖아.”
나야 상관없지만 너는 아닐 테니까. 그렇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동그란 황금빛 눈동자가 제 질문에 대한 동의를 구해왔다.
글쎄, 애초에 나는 네 의견에 동의한 기억이 없다만….
‘이쯤 되니 정말 아르반이 황제가 되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드네.’
그럼 확실히 일이 수월해질 터였다.
황궁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부담 없이 흑마법사들에게 대한 조사를 부탁할 수도 있을 것이고, 아무튼 내게 나쁠 건 없었다.
하지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그 생각을 곧장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그래도, 그 사람이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인데 괜히 위험한 일에 끌어들이는 게 아닐까 싶네.”
그가 아무리 현 세계관 최강자라 한들, 그렇다고 내가 그를 위험에 빠뜨리고 귀찮게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니까.
“뭔 소리야. 주인은 여신님의 사도라고. 당연히 흑마법사 나부랭이들을 소탕할 의무가 있어.”
율렌은 주저하는 내 목소리에 어이없다는 듯이 답했다.
“성검의 선택을 받는다는 게 그냥 폼인 줄 알아? 당연히 그에 따른 의무 역시 짊어져야지.”
그건 누가 정한 건데. 너희 여신님?
‘근데 그럼 아르반이 억울하지 않을까….’
나는 힐끔 율렌을 내려다봤다.
아르반이 세계관 최강이란 사실은 율렌이나 성검이 있든 없든 간에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르반은 굳이 의무를 짊어지는 것보다 성검과 율렌이 존재치 않는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뭐야, 그럼 내가 괜히 성검 찾으러 가자고 해서 아르반을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한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어쩐지 조금 충격적이었다.
‘…아냐. 그래도 내가 이 세계로 흘러들어온 덕에 율렌의 폭주를 막을 수 있었던 거잖아.’
그 덕에 아르반의 팔도 멀쩡할 수 있었던 거고.
“여태까지는 급할 것 없으니 주인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상황이 달라졌잖아. 네가 못 말하겠으면 내가 대신 얘기하고.”
“뭐? 아니….”
나는 당장이라도 아르반에게 날아가 얘기할 듯한 기색의 율렌을 보고 놀랐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이전에는 흑마법사들이 어디에 주둔해 있고,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알지 못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그들의 실험에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
더 이상 희생양을 늘리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리엘리의 기억 속에 보았던 시체의 수만 해도 어림잡아 수백이다.
그게 3년 전의 일이었으니 그 실험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면 더 큰 희생이 뒤따랐을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러다 문득, 녀석이 말한 의무란 것이 어느 정도의 무게를 지녔는지 궁금해졌다.
“근데 만약 아르반이 그 의무를 저버리면 어떤 불이익이 있어?”
“그런 거 없는데?”
뭘 당연한 걸 묻고 그러냐는 듯한 율렌의 대답에 순간 얼이 나간 나는 눈만 깜빡였다.
“아무런 불이익도 없어.”
“그럼 만약에 아르반이 그 의무를 행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상관없다는 거야?”
“아니, 그럴 일이 없다는 거야.”
녀석의 동그란 눈동자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수많은 인간 중 여신님의 선택을 받은 게 바로 주인이야. 여신님의 선택이 옳지 않았을 리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인은 의무를 행할 거야.”
그게 자의든 타의든.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지.
율렌이 작게 덧붙인 말은 안타깝게도 내 귀까지 닿지 못했다.
너무 작은 소리기도 했고, 그 앞부분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작게 입을 벌렸다.
너무도 근거 없는 확신에 차 있는 율렌이 다소 놀랍기까지 했다.
그리고 솔직히 미안하지만, 나는 율렌과 달리 약간 회의적이었다.
과연 아무런 이득도 되지 않는 일에 아르반이 순순히 움직여 줄까?
‘아르반이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다면 나서줄 거라 생각하지만….’
선택은 어디까지나 그 본인의 몫일 터였다.
“그러니까 주인이 황제가 되어야 한단 말이야. 가장 높은 위치에 서야 모든 일이 수월해질 테니. 그리고 여신의 선택을 받은 주인이 다른 인간들 아래에 있는 게 말이 돼?”
내가 녀석의 투덜거림을 흘려듣자 그걸 눈치챘는지, 율렌이 꼬리를 불만스레 탁탁 내리쳐 시선을 끌었다.
“일단 주인에게 가서 말해.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잖아.”
“…그래, 그래야겠지.”
아, 그리고 보니 꼭 아르반에게 부탁하는 게 아니더라도 신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도 존재했다.
다만 그렇게 될 경우, 최소한 흑마법사를 발견했다는 정황적 증거를 얘기해야 할 텐데….
‘그건 또 내가 곤란하고.’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검은 마력의 기운을 감지할 수 없으니 황궁에서 검은 마력이 느껴진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말한다 한들 믿어줄 사람도 없을 테고.
그렇다면 결국 공작이 벌이고 있는 세리나 부활 계획에 대해 털어놔야 한다는 건데….
다른 사람도 아닌 생물학적 아버지가 흑마법에 가담하여 어머니의 부활을 꾀하고 있단 말을 신전에 전한다?
잘못하다가는 내가 신전 지하에서 영원히 콩밥을 먹어야 할 수도 있는 사항이었다. 아니, 백 프로다.
“하아….”
정말이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다.
팔자에도 없던 남의 몸에 들어앉아 이전 몸 주인과 그녀의 아버지가 벌여놓은 일 때문에 골머리를 썩여야 한다니.
어쩌면 이게 몸을 차지한 대가인 건 아닐까.
‘그렇게 따지자면 또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네.’
입가로 가느다란 웃음이 샜다.
“…뭐야, 왜 그래. 엘리, 네가 들여다본 기억에 너무 과하게 몰입하지 마. 그러다 실성하면 곤란하다고.”
내가 표정을 굳혔다 한숨을 내쉬고, 종국에는 피식거리며 웃자 율렌이 불안한 듯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살폈다.
“괜찮아. 완전 멀쩡해.”
상상치도 못한 사건을 들여다본 일 탓에 기분은 쓰레기통 속에 처박힌 듯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성은 멀쩡했다.
오히려 차갑게 식어 보다 냉정해진 쪽에 가까웠다.
“네 말대로 아르반에게 부탁하는 게 최선이겠다.”
일단 현시점에서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나는 서랍에서 편지지를 꺼내 어색하게 아르반에게 보낼 편지를 써 내려갔다.
오늘 그가 방문하는 날이긴 했지만 전후 사정을 설명하려면 시간이 넉넉하게 필요할 테니, 그의 시간이 언제 괜찮은지를 확인해야 했다.
아무 연관 없는 아르반을 귀찮게 만들어 미안한 마음이 없잖아 있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희생자를 줄이는 게 급선무였다.
혹여 그가 거절하면 어떡하나 걱정스러운 마음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하기로 했다.
“에바, 이거 카넬로웰 대공 각하께 전달해 드려. 좀 급한 일이라 가능하면 빨리 부탁할게. 아, 셀리안에게 초상화 작업은 내일부터 진행하자고 말 좀 전해주고.”
“네, 아가씨!”
나는 에바를 보내고는 소파에 몸을 푹 파묻었다.
이제 아르반에게 어찌 설명하면 좋을지를 궁리할 일만 남았다.
‘너무 뜬금없고 갑작스럽게 느껴지지 않을까.’
황궁에 다녀온 이후 이상을 감지했다는 식으로 말문을 트기에는 이전까지 시간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중간에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으니까. 조금 우려가 되었다.
내가 상념에 잠겨 미동 없이 앉아만 있자 율렌이 슬금슬금 무릎을 타고 올라와 기웃거렸다.
“아직도 충격이 안 가셔?”
“…아니. 그냥 아르반에게 뭐라고 말을 꺼내면 좋을지 생각하고 있었어.”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되지.”
녀석은 참 별 걸로도 걱정을 한다는 듯이 짧은 앞발로 내 팔을 콕콕 찔렀다.
“어떻게 있는 그대로 말해. 아르반은 내가 이 몸에 빙의했다는 걸 모르는데.”
그래, 결정적인 문제는 그것이다.
아르반은 내가 진짜 리엘리 로베르가 아니라는 것을 모른다.
그러니 내가 지금에 와서 3년 전 세리나 로베르 사건에 대해 언급한다면 분명 이상하게 여기겠지.
그가 알고 있는 지금의 나와 그 당시 리엘리의 행동은 그만큼 판이하기도 하고.
또 여태 침묵하고 있던 일을 이제 와서 들춰내며 희생자를 줄여야 한다 이야기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니까.
‘…잠깐만.’
나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상체를 바로 세우며 미간을 좁혔다.
돌이켜보니 정말 이상했다.
공작이 뒤늦은 사춘기라 보기도 힘들 만큼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내 모습에 아무런 언급도 없다는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