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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105화 (105/153)

105화

*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는 나른했는데, 막상 침대에 누우니 잠이 오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날 걸 생각하니까 더 잠이 안 오는 것 같은데.’

그러나 아무리 상념을 떨치려고 해도 그 고통을 알아버린 이상 두렵지 않을 턱이 없었다.

“후우….”

“왜, 왜 또, 왜.”

내가 눈을 감고 한숨을 푹, 내쉬자 머리맡에 똬리를 틀고 있던 작은 녀석이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아침에 겪었던 일 때문에 잠이 안 와. 살면서 그렇게 아파본 건 처음이었다고.”

나는 멀뚱히 눈을 뜨고 솔직한 심정을 내뱉었다.

“흐음.”

그러자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던 녀석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얘기했다.

“아픈 것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네가 깨자마자 힐링을 사용해 줄게.”

녀석의 제안에 나는 상체를 율렌 쪽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그것보다 내가 깨어나기 전에 걸어주면 안 돼?”

애초에 안 아픈 게 최고니까.

하지만 내 은근한 기대는 곧장 바스러졌다.

“미안하지만 꿈을 건드릴 때는 다른 마법이나 신성력을 사용할 수 없어.”

자기도 못 한다고 대답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율렌의 목소리에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안 되는구나… 그래-, 안되다는 데 별수 없지… 그럼 일어나서 바로 좀 부탁할게.”

나는 다시금 느껴지는 중압감에 머리를 마구 헝클고는 천장을 보고 벌러덩 누웠다.

어릴 적 처음 치과를 갔을 때 느꼈던 고통과 충격에 두 번째 방문이 더 무섭게 느껴졌던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치과는 소름 돋는 것만 빼면 참을 만이라도 하지. 이건 진짜….’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런 생고생을 사서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갑작스러운 현타가 찾아오고, 잡생각이 늘며 점점 더 잠기운이 달아나고 있었기에 하는 수 없이 서랍을 뒤져 이전에 먹었던 수면제를 꺼내 들었다.

어차피 신성력을 사용할 예정이니 하루만 더 신세 지기로 했다.

‘평소에는 좀 덜자면 피곤하고 그만이겠지만 오늘같이 필요한 기억을 살펴봐야 할 때 수면시간이 부족하면 안 되니까.’

그러다 괜히 내일 또 이어서 이 짓을 반복하는 불상사만은 피해야 했다.

나는 자기합리화를 마치고 별사탕 모양의 수면제를 털어 넣었다.

으적으적 씹어대니 달콤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지만, 썩 달갑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

“…으.”

잠에서 깨어났음에도 곧장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혼몽한 와중, 꽃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유리 온실 중앙을 가득 메운 작약의 향기였다. 세리나 로베르가 가장 좋아하던 꽃.

그렇기에 리엘리 또한 그 꽃을 참 좋아했다.

“엘리, 괜찮아? 어지러워?”

꿈에서 깨어났음에도 여태 선연하게 느껴지는 꽃향기가 나를 감싸는 듯했다.

“…괜찮아.”

율렌의 목소리에 비로소 작게 눈을 뜬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괜찮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잠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회복되었기 때문인지 어제처럼 아프지도 않았고, 울렁증 역시 없었다.

도로 눈을 감은 나는 천천히 기억을 되돌아봤다.

그 어느 때보다 충격적인 기억을 보았지만 내 머릿속은 유독 차분하기만 했다.

마치 온몸을 가득 채운 경멸이 체온마저 앗아간 듯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리엘리 로베르가 그리 넋 나간 사람처럼 굴었던 이유.

그건 그저 기억을 들여다보기만 했던 나 또한 불쾌하게 만드는 어떠한 사건이 원인이 되어있었다.

리엘리 로베르에게 있어 그날은 도돌이표와 같이 반복되는 일상 중 하루에 불과했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갑작스레 떠오른 그녀의 어머니, 세리나 로베르에 대한 추억이 전부였다.

리엘리 로베르는 세리나의 생전 모습을 회상하며 유리 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 년 만의 방문이었다.

온실 내부에는 여러 종류의 꽃들이 자라나고 있었지만, 중앙에 위치한 분수대를 중심으로는 작약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있었다.

죽은 세리나 로베르가 아끼던 꽃.

리엘리 로베르는 오랜만에 분수대로 다가가 그 겉 장식을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이곳은 그녀에게 있어 어머니와의 추억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그렇기에 자주 방문하지 않았다.

이 백화난만한 공간에 들어설 때면 그리운 향기에 질식해 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녀는 무의식중에 손끝을 움직여 예전 어머니가 일러주셨던 문양을 따라 분수대에 박힌 보석을 차례대로 눌렀다.

다른 뜻이 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불현듯, 오래전 어머니가 알려주셨던 비밀의 공간이 떠올라 궁금해졌을 뿐이었다.

그녀가 뒤로 한발 물러서자 분수대는 시계방향으로 부드럽게 회전하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마침내 움직임을 멈췄을 때.

그 아래 숨겨져 있던 비밀 통로가 드러났다.

일련의 과정은 아무런 소음도 발생하지 않은 채 조용히 이루어졌다.

그에 리엘리 로베르는 조금 의아해졌다.

‘어머니가 분명 로베르의 직계만이 알고 있는 비밀 통로라고 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자신도 방문하지 않아 오랜 시간 열리지 않았으니 그만큼 녹이 슬어 마찰음이 들려야 했다.

그녀는 문뜩 의문이 들어 계단에 한발을 디디며 발끝을 살짝 문질러보았다.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처음 이 계단을 밟았을 때는 분명 먼지가 풀풀 날려 심하게 재채기를 한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한 발짝 나아간 계단은 누군가가 잘 관리를 해놓은 양, 멀끔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잠시 의문을 품었던 리엘리 로베르는 이내 누군가가 관리하고 있나 보라고 가볍게 결론 지으며 겁도 없이 아래로 향했다.

“하아… 바보야, 그걸 이상하게 생각했어야지. 그대로 돌아서 나왔더라면….”

나는 양손으로 눈을 꾹꾹 누르며 탄식했다.

‘네가 무슨 공포 영화 주인공이라도 돼? 그러다가 제일 먼저 죽는 거라고.’

이미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니 내가 이제 와서 이런 소리를 해봐야 입만 아프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안 하면 답답한 속을 달랠 수가 없었다.

당연하지만 그녀는 죽지 않았다. 그랬다면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존재할 수도 없었겠지.

다만 어쩌면, 그만큼이나 끔찍할지 모를 것을 마주했을 뿐이다.

“엘리, 엘리?”

“아….”

“왜 그래. 내가 신성력도 써줬는데 왜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고 있어.”

율렌은 내가 혼잣말을 하며 넋이 나가 있자 불안해졌는지 꼬리를 둥글게 만 채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그런 녀석을 안심시키기 위해 가볍게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아냐. 정말 괜찮아. 그냥 좀… 답답해서 나도 모르게.”

“그래서, 이번에는 제대로 확인한 거 맞아? 생각보다 일찍 깨어났는데.”

반사적으로 창밖을 내다보자 새벽을 막 벗어나 어슴푸레한 아침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게….”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치는 않았다.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 알 수 없어 넓은 범위를 살펴본 것일 뿐, 상황 자체를 살피는 데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으니까.

“이번에는 전부 확인할 수 있었어.”

나는 율렌에게 속삭이며 살짝 눈을 감았다.

몸은 멀쩡해졌지만, 아까의 잔상이 남아 속이 울렁거리는 듯한 착각이 인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 왜 그러는 건데? 그 리셀이라는 인간이 리엘리한테 해코지라도 했어? 표정이 왜 그래? 응?”

허벅지를 꾹꾹 눌러오며 자신에게도 꿈의 내용을 말해달라는 양 행동하는 녀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들어서 유쾌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어.”

“알아. 그건 네 표정만 봐도 알겠다. 그래도 알고 싶으니까 얘기해봐.”

털어놓으면 이 찝찝함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을까.

그런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3년 전, 리엘리는 끔찍한 광경을 마주했어.”

*

리엘리에게는 끔찍했고, 내게는 역겹기 그지없던 것.

그대로 계단을 따라 내려가던 리엘리는 꽤 깊숙한 지하에서 한 갈림길을 마주하게 됐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은 없고, 양쪽으로 나누어진 길.

그녀는 잠시 망설이던 왼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른 이유가 아닌, 그쪽에서 미약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쪽에 또 다른 통로가 있는 걸까…”

기억 속의 리엘리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그 광경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는 한껏 긴장한 채였다.

어쩌면 이 앞에 리엘리를 괴롭게 만들었던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니.

“……!”

‘미친….’

나는 곧 눈 앞에 펼쳐진 끔찍한 광경을 강제로 마주해야만 했다.

깜짝 놀란 리엘리가 눈을 홉뜬 채 굳어버렸기 때문에.

하지만 충분히 그럴 만하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코앞에 예고도 없이 작은 산처럼 쌓여 있는 시체 더미를 발견한다면, 누군들 놀라지 않겠는가.

‘그나마 소리는 안 질러 망정이지.’

솔직히 나였다면 놀라서 냅다 괴성을 질렀을 것 같았다.

비록 부패하지는 않았으나 시체들은 하나같이 성한 구석이 없어 보였다.

‘…남의 기억이라 그런가 생각보다 무섭지는 않네.’

이리 생생하게 느껴짐에도.

오히려 떨려오는 리엘리의 심정을 온전히 느끼고 있기에 덤덤한 걸까.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켜켜이 쌓인 사체 중 하나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아.”

그때까지 굳어있던 리엘리는 작게 탄식하며 황급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본능적으로 팔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아마 최근에 버려진 듯, 다른 시체들 틈바구니에 깔려있지 않아 그를 옮기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리셀이잖아….’

비록 내가 알고 있는 모습과 비교할 수 없이 수척해 곧 죽어도 이상치 않을 정도였지만, 분명 그가 맞았다.

대체 이 사람이 왜 이곳에 있는 걸까. 무슨 일이 있었길래….

답답하다. 하지만 이곳은 과거에 리엘 리가 겪었던 기억 속 공간이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이렇게 머리를 굴리는 정도뿐이었다.

내가 고민에 휩싸인 와중에도 리엘리의 기억은 막힘없이 흘러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낑낑대며 남자를 그곳에서 끌어낸 리엘리가 거친 숨을 토해냈다.

“우욱…!”

그리고 뒤늦게 헛구역질을 해대는 와중 넝마와도 같은 몰골의 리셀이 정신을 차린 듯, 신음을 흘렸다.

“으….”

조용한 지하를 울리는 다른 사람의 침음에 숨을 몰아쉬던 리엘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곧 그녀의 시야에 가까스로 땅을 짚고 몸을 일으키는 리셀이 들어왔다.

“괘, 괜찮은….”

“…….”

리셀은 조금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균형을 잡고는 말없이 리엘리를 등진 채 발을 옮겼다.

“그, 그쪽 말고 여기로.”

리엘리는 극도의 긴장 상태가 되었음에도 바람이 불어오는 통로를 향해 나아가는 리셀을 붙잡았다.

어쩐지 그 방향으로 향하게 놔둬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출구는 이쪽이야.”

그의 노란 눈동자에 리엘리가 비쳤다.

나와 마주했던 리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총기가 흐려진 눈.

리셀은 의외로 순순히 리엘리의 부축을 받아 유리 온실로 올라왔다.

그녀는 리셀을 치료하고 보내주고 싶었지만, 공작의 존재가 마음에 걸려 그러지 못했다.

리엘리가 그를 이끌고 제가 알고 있는 비상탈출로를 향해 나아가는데, 리셀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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