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나는 최근에 로즈니가 선물해준 연보랏빛 엠파이어 드레스를 입고 보송보송한 털로 만든 숄을 위에 걸쳤다.
“가자.”
“네, 아가씨.”
우리는 대기 중인 마차로 향했다.
그리고 마차에 거의 다다라 가자 앞에 서 있던 기사가 마차 문을 열고 나를 에스코트할 준비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멈추지 않고 걷음을 옮기며 기사에게 말했다.
“에스코트는 됐어.”
그리고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려 치맛자락이 아래에 끌리지 않게 하며 발판을 밟고 마차에 올랐다.
내가 먼저 안쪽에 자리를 잡자 뒤따라오던 세바니가 기사를 힐끔, 그리고 나를 힐끔 보고는 무언가 결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제 치맛자락을 들어 올려 혼자 씩씩하게 마차에 올랐다.
“아니, 세바니. 나는 그냥 이게 편해서 그런 것뿐이야. 내 눈치 보면서 너까지 그럴 필요는 없어.”
내 말에 살짝 웃어 보인 세바니가 대답했다.
“아니에요, 아가씨. 이렇게 혼자 마차에 오르니 편하고 좋네요.”
“뭐, 그럼 다행이고···.”
그때 배웅을 나왔던 에바가 붕붕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해왔다.
“잘 다녀오세요, 아가씨! 세바니!”
오늘도 기운 넘치는 에바에게 살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와 세바니는 도란도란 얘기하며 멜라니스 백작가로 향하는 동안 시간을 보냈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마부가 도착을 알라는 소리에 세바니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기사가 다가오기도 전에 도도도 내려선 세바니가 나를 돌아봤다.
내게 잘했냐는 듯이 묻는 듯한 시선이 귀여워 절로 미소가 배어 나왔다.
우리 집 애들은 어쩜 이리 한결같이 귀여운지 모르겠다.
그런 나를 보고 세바니 역시 환하게 미소 지었다.
“어서 오십시오, 로베르 공녀님. 안내를 도와드리겠습니다.”
내가 마차에서 내려서자 전에 봤던 노집사가 나를 맞아 주었다.
나와 세바니는 그의 안내를 받아 백작저 내의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도련님, 로베르 공녀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안쪽으로 모시게.”
“예.”
노집사가 열어주는 문안 쪽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루페르가 벌떡 일어나며 인사를 건네왔다.
“어서 오십시오, 공녀님.”
“다시 뵈니 반갑네요, 멜라니스 경.”
내가 가볍게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자 루페르 역시 내 맞은편에 착석했다.
그는 전과 같이 웃고 있었다.
다과가 준비되는 동안 조용히 자리만 지키고 있던 루페르는 사용인들이 물러가자 말문을 열었다.
“그날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본래 과음은 하지 않는 편인데···.”
말끝을 조금 흐리며 곤란한 듯 미소 짓는 얼굴은 멀끔했지만 조금 난감한 기색이 묻어났다.
“공녀님께 이루 말할 수 없는 폐를 끼쳐 뭐라 사과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는 정중히 사과하며 작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더욱이 제가 직접 찾아뵙지 못하고 이리 직접 걸음하시게 만들어 면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생각지 못한 정중하고 무거운 사과에 조금 당황했다.
물론 그가 미안해하는 마음에 편지를 보냈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사과해올 줄이야.
‘애초에 그 정도로 잘못하지도 않았고.’
그가 나한테 잘못한 것이라고 해봐야 술에 취해 잠들어버렸던 정도뿐이었다.
‘그마저도 사실 삯 마차를 불러 백작저로 보내버렸어도 됐을 일이었지.’
다만 그때는 내가 삯 마차의 존재를 몰랐기에 굳이 백작저까지 그를 실어 날랐을 뿐이었다.
다른 이들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내가 오지랖을 부린 것처럼 느낄 수도 있는 상황이다.
“저는 사실 경께 사과를 받아야 할 입장은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드는데, 그만 고개는 들어주셨으면 좋겠네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명백히 제 과실로 공녀님께 폐를 끼쳤는걸요.”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또 할 말은 없지만···.
“그럼 사과는 받아들일게요.”
이쪽이 그를 납득시키는 것보다 빨라 보였다.
그제야 고개를 든 루페르의 눈꼬리가 미려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이렇게 보니 로즈니와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는 않는 성싶었다.
문득 궁금해진 나는 그에게 물었다.
“경은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다소 뜬금없는 내 질문에 루페르는 조금 의아한 듯했지만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스물여섯입니다.”
딱 예상한 대로의 나이였다.
“제 사과를 받아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실은 사죄의 의미로 작은 선물을 준비해뒀습니다.”
뭘 또 선물까지.
그리 생각하면서도 내심 기대가 되긴 했다. 아무래도 선물이라는 단어가 주는 기대감이랄까.
루페르가 사용인 호출 벨을 누르자 잠시 뒤, 노집사가 들어왔다.
노집사는 말없이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품에 들고 있던 함을 내려놓았다.
나는 예쁘게 선물 포장까지 되어있는 함에 시선을 고정하며 루페르에게 물었다.
“이거, 뭔가요.”
“별건 아니지만 그날의 결례를 사과하는 의미에서 준비한 선물입니다.”
그건 나도 안다. 그러니까 뭘 준비했냐고.
포장만 봐서는 액세서리류가 들어있을 것 같은 생김새였지만 설마 그런 걸 준비했을 리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겨우 이런 일에 액세서리는 아닐 테고··· 대체 뭐지.’
온갖 추측을 해보던 나는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함을 집어 들었다.
“열어봐도 되나요?”
“예, 물론.”
그의 허락에 리본을 풀어냈다.
안에는 척 보기에도 상당히 비싸 보이는 보석 세트가 들어있었다.
“······.”
겨우 이런 일에 사과랍시고 내민 게 보석 세트라고?
‘세상에, 돈이 많은 거야 아니면 여기서는 다 이 정도 가지고 이렇게 부담스러운 선물을 주고받는 거야.’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동시에 절대 이걸 받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담스러워 미치겠네···.
“죄송하지만 멜라니스 경, 제가 이런 건 좋아하지 않아서요. 사과만으로도 충분해요.”
“마음에 차지 않으신다면 더 좋은 물건을 준비해보겠습니다.”
나는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마음에 차지 않느냐니, 대체 날 뭐로 보는 거야.
“그런 뜻이 아니라 부담스럽다는 말이었어요.”
돌려 거절하기가 통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직설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루페르가 잠시 멈칫했다.
“···아, 그러셨습니까.”
그는 정말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제가 준비한 선물을 바라봤다.
고작 이런 것이? 라는 듯한 시선에 순간 내 경제 관념이 이상한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똑똑-
루페르가 막 입을 떼려는데 밖에서 갑작스레 들려온 노크 소리가 그의 말을 잘랐다.
나와 루페르의 고개가 자연스레 문으로 돌아갔다.
곧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공녀님, 저 로즈니예요. 들어가도 될까요?”
“로즈니? 네. 물론이죠.”
내 대답에 루페르가 집사에게 명령했다.
“파벨, 열어줘.”
“예, 도련님.”
노집사가 문을 열자 왜인지 모르게 얼굴이 굳은 로즈니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공녀님께서 찾아오신다는 말은 전해 듣지 못했는데, 오라버니와 독대를 하고 계신다 해서 와봤어요.”
내게 묵례를 한 로즈니가 자연스레 제 오빠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는 곧장 눈썹을 늘어트리더니, 이내 시무룩한 목소리로 사과해왔다.
“연회 날은 정말 죄송했어요. 저 때문에 공녀님과 아델 경까지 연회를 즐기지 못하셔서 마음이 불편했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요. 그리고 애초에 각하의 생신을 축하하는 것으로 연회에 참여한 목적은 다했었는걸요. 그보다 몸은 괜찮아요?”
겉보기에는 혈색도 돌아왔고, 컨디션도 나쁘지 않아 보였지만 그래도 신경 쓰여 물었다.
로즈니는 내 걱정이 기꺼웠는지 활짝 핀 얼굴로 미소 짓다가 또 금세 울상이 되었다.
“네, 이제 멀쩡하답니다. 그래도 모처럼 아름답게 치장하시고 처음 참석하셨던 연회였는데··· 속상해서요.”
나는 눈꺼풀을 내리깔며 울적하게 말하는 로즈니를 보고 다시 한번 입술을 뗐다.
“정말 괜찮으니까 자책하지 마요. 연회에 두 번 다시 참석 못 하는 것도 아니고, 로즈니가 의기소침하니까 저까지 기운이 안 나는걸요.”
내가 그리 말하자 로즈니가 감동했다는 듯 수줍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더는 언급하지 않을게요. 그보다, 오늘 제가 아니라 오라버니를 만나러 오신 것 같은데···.”
그녀는 나를 따뜻한 눈으로 마주하다가 옆의 루페르를 힐끔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두 분이 연회 날··· 많이 친해지신 모양이에요. 무슨 얘기를 나누고 계셨는지 저도 알 수 있을까요?”
나는 본능적으로 루페르를 바라봤다. 그러자 루페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공녀님께 폐를 끼쳐 그에 대한 사과를 드리고 있었다.”
“···오라버니께서요?”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에서 루페르를 향한 로즈니의 깊은 신뢰를 읽어낼 수 있었다.
“그래. 과음하는 바람에 공녀님께 큰 결례를 범했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털어놓는 덤덤한 말투.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얼굴과 매치가 되지 않는 고백이었다.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가 사뭇 당당하다 못해 뻔뻔해 보일 지경이다.
‘아니, 근데 그렇게 말하니까 당신이 나한테 정말 큰 실수라도 저지른 것처럼 느껴지잖아.’
비단 나만이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닌지 로즈니의 얼굴에서 빠르게 핏기가 가시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입만 뻐끔거리다 겨우 한마디를 뱉어냈다.
“대체, 어떤 실수를···.”
“부끄럽지만 만취해서···.”
“잠시만요. 제가 설명할게요.”
나는 전혀 부끄럽지 않아 보이는 얼굴로 입을 여는 루페르의 말을 단칼에 끊어냈다.
어쩐지 그에게 설명을 맡기면 없던 잘못도 부풀려서 생겨날 것만 같았다.
“사실 별것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이어지는 내 설명에 로즈니의 안색이 다시 본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로즈니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루페르를 째려보며 살벌하게 읊조렸다.
“오라버니··· 제가 장황하게 분위기 잡는 버릇 좀 고치라고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장황하다니. 나는 있는 그대로를 설명하려 했을 뿐이란다.”
“하아··· 네에. 그러시겠죠.”
로즈니는 차갑게 식었을 루페르의 찻잔을 집어 들어 들이켰다. 속이 타는 모양이었다.
그런 로즈니의 모습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작게 미소 지은 루페르는 직접 티포트를 들어 차를 더 따라주었다.
뭐랄까, 그가 마시던 차를 냉큼 들이켜는 로즈니를 보고 타박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 밖의 행동이었다.
하지만 내가 의외라는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루페르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로즈니, 잘 알고 있겠지만 이런 행동은 우리끼리 있을 때만···.”
“네, 네. 알고 있답니다.”
로즈니는 이런 일이 익숙한지 건성으로 대답했다.
저 ‘우리’에 나도 포함해주는 모양이네. 어쩐지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리필된 차를 몇 모금 더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럼 다 해결이 된 건가요. 오라버니께서 사과하셨고, 공녀님이 받아드리셨다니.”
“아니. 공녀님께 사죄의 선물을 전해드리지 못했다.”
그놈의 선물.
나는 테이블 끝자락으로 밀어버린 보석함을 힐끔 바라봤다.
그래, 로즈니도 저걸 보면 제 오라비가 얼마나 어이없는 행동을 했는지 알게 되고 말리려 들 것이다.
나는 다시 선물함을 앞으로 끌고 와서 그녀에게 들이밀었다.
“그게 아니에요. 이것 좀 보세요 로즈니.”
“어머, 이건···.”
그녀는 작은 물방울 다이아몬드가 박혀있는 보석 세트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제 오라비를 향해 핀잔을 줬다.
“세상에, 오라버니···! 아무리 여성분께 선물을 안 해보셨다지만 이게 뭔가요.”
음? 내가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다른 방향이었지만 그래도 잠자코 듣고 있었다.
하지만 두 남매의 대화는 내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