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망할!”
내가 그대로 침대에 뛰어들어 베개를 끌어안고 퍽퍽 치기 시작하자 내 옆으로 날아온 율렌이 나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빙의 전의 그 애가 보낸 거라면 그냥 거절하면 되는 거잖아.”
“···그렇지. 거절하면 되지.”
거절할 수야 있겠지만 입장이 난처해지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딱히 다른 결혼 상대를 찾은 것도 아니오, 그렇다고 공작의 바람대로 로베르를 이을 생각 역시 없다.
그래도 친인척이고, 공작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손을 벌릴 수 있는 곳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리엘리 역시 이곳을 벗어나고자 타티아나에게 편지를 보낸 것일 터.
그런 사람에게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단순한 변심으로 인해 말을 무르겠다 하는 건 여간 찝찝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편지를 보낼 시간적 여유가 없으니 켈레나프 대공에게 직접 말해야 한다는 거잖아.’
거절 의사를 전하긴 해야겠지만, 그저 막막할 따름이었다.
“그보다 너 늦은 거 아냐? 항상 내려가던 시간 이미 지났는데.”
“뭐?”
율렌의 지적에 시계를 확인한 나는 그대로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걸 이제 말해주면 어떡해!!”
“누가 그렇게 엎어져 있으래?!”
나는 뒤이어 들리는 율렌의 고함을 무시하고 다급히 방을 빠져나왔다.
밖에서 대기하다가 덩달아 내 뒤를 따라 나온 에바 역시 거의 뛰다시피 걸으며 나를 쫓아야 했다.
‘왜 하필 편지는 와도 이런 날에 도착해서는···!’
하고많은 날 중에 유일하게 손님이 있는 날 아침에 이럴 건 또 뭐람. 아침부터 정신이 쏙 빠졌다.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열심히 발을 움직였다.
식당 문 앞에 도착하고도 마음이 급해 에바가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직접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먼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세이린이 일어나려 하길래 손을 흔들어 그녀의 행동을 저지했다.
“아니에요. 앉아있어요. 제가 너무 늦었죠?”
애써 아무렇지 않도록 행동했지만 목소리에서 다급함이 묻어나왔다.
그러나 세이린은 늘 그렇듯 온화한 얼굴로 나를 맞아 주었다.
“괜찮습니다. 공자님과 대화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는걸요. 그렇죠?”
세이린이 아몬을 향해 넌지시 묻자 아몬 역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델 경께서 즐거운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그리고 누나가 아무리 늦으신다 해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 염려치마세요.”
나는 자리에 앉으며 아몬에게 대답했다.
“그럼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그런데 나 없는 사이 둘이 어떤 얘기를 했길래 아몬이 저리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조금 궁금해졌다.
‘우리 애기가 다른 사람이랑 금방 친해지는 편은 아닌 것 같았는데, 세이린이랑은 곧잘 지내는 모양이야.’
어제 황궁으로 출발하기 전만 해도 그랬다.
아무리 세이린이 언질을 해줬다고 하지만 그 말을 아몬이 따라 했다는 점이 참 의외였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세이린을 돌아보다 멈칫했다.
정신도 없거니와 그 자태가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바로 눈치채지 못했는데, 세이린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분명 내 옷을 내어주라 말하긴 했지만 막상 눈으로 보니 또 느낌이 새로웠다.
“세이린, 그 드레스···.”
“아침에 내어주시는 것 중 편해 보이는 것으로 골라 입었습니다. 아무래도 어제 입었던 연회복을 입자니 자리에 어울리지 않을 듯하여.”
그렇긴 했다. 그 옷이 보통 화려했어야지.
나는 대놓고 바라보는 게 실례라는 사실도 잊고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세이린이 치마를 입은 건 또 처음 보네.’
음, 돌이켜보니 세이린이 치마를 입을 만한 상황 자체가 없었던 것 같다.
그녀와 처음 마주했던 것이 산맥에 오르면서였고 그 후에는 아르반의 호위, 그리고 승마 수업의 선생님으로 마주했으니.
“드레스를 입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자신을 계속 바라보고 있자 세이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무래도 공녀님의 것이라 저한테는 조금 짧긴 하네요.”
그녀가 입고 있는 모슬린 드레스는 사실 지금의 계절과는 맞지 않는 감이 있었다.
오프숄더 형식의 드레스로 어깨는 시원하게 모두 드러나 있었고 가느다란 끈으로 리본을 매어 흘러내리지 않게 고정해준 게 전부였다.
시원한 디자인답게 색상 또한 위쪽은 짙은 남색이고 아래로 갈수록 화이트가 섞여 들어가는 그러데이션이 포인트였다.
제 모습이 잘 보이도록 내 쪽을 향해 선 세이린이 가슴에 손을 올리고 다른 한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려 보였다.
치맛자락이 들려 올라가자 드레스와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흰색 털 슬리퍼가 모습을 드러냈다.
“푸흐···.”
기실, 드레스가 조금 짧다 뿐이지 세이린이 워낙 키도 크고 늘씬해서 모델 같은 포스가 느껴졌었는데 발을 보니 너무 귀여워 웃음이 났다.
“사실 옷이야 조금 작아도 입을 수 있지만, 신발은 아니어서요.”
내 웃는 모습에 그녀 또한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아, 그렇죠. 뭐 어때요. 저희끼리 있는데. 사실 구두보다 슬리퍼가 편하고 좋잖아요.”
나는 기다란 원피스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내 발을 그녀 쪽으로 슬쩍 내보여주었다.
“하하!”
내 발을 확인한 세이린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급하게 내려오느라 방 안에서 신는 슬리퍼를 그대로 신고 내려온 탓에 내 발에도 세이린의 발에 신겨진 것과 같은 슬리퍼가 신겨져 있었다.
아침 식사는 그 어느 때 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흘러갔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즘, 포도 주스를 넘기던 나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라 두 사람에게 말했다.
“우리 다음에 같이 놀러 가는 건 어때요? 멀지 않은 곳에 은보랏빛 예쁜 호수가 있는데. 사유지라 조용하고 좋을 거예요. 응? 어때?”
사실 아몬에게 먼저 놀러 가자 제안하려 했던 곳이었는데, 다른 이야기를 하다 물어본다는 걸 깜빡했었다.
나는 세이린과 아몬을 번갈아 쳐다봤다.
본래는 아몬과 둘이 놀러 갈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어디를 갈 때는 왁자지껄한 편이 좋지 않은가.
세이린은 내 제안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시간만 맞는다면 얼마든 지요.”
“저도 당연히 좋아요.”
그에 뒤질세라 재빨리 답하는 아몬의 모습에 나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으면 말했다.
“좋아. 그럼 이왕이면 로즈니까지 다 같이 가는 거로···.”
말하다 보니 순간 르미엘의 존재가 떠올랐다.
나는 아몬을 힐끔 바라봤다.
‘르미엘이 아몬과 동갑이라고 했었지.’
또래의 아이가 있는 편이 아몬에게도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로즈니랑 로즈니의 동생까지 모두 함께 가는 건 어때요?”
내 제안에 세이린은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그 표정에서 허락의 뜻을 읽어낸 나는 아몬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몬은 어때? 로즈니의 동생이 네 또래의 아이라 같이 놀면 분명 재밌을 거야.”
“저도 괜찮아요.”
아몬이 방긋 웃었다. 어쩐지 아이가 조금 떨떠름해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내 착각인 듯했다.
암울한 과거 탓인지 사람을 꺼리는 아몬이지만 그래도 처음 제 또래 친구를 만난다는 데 조금이라도 기대가 될 터였다.
‘저리 밝게 웃다니, 분명 설레는 거겠지.’
그 생각을 하니 또 마음 한편이 먹먹해져, 눈을 몇 번 깜빡이며 감정을 삭였다.
“그럼 나중에 로즈니를 만나면 이야기를 꺼내 볼게요.”
그 말을 끝으로 식사 자리는 파하게 되었다.
나는 세이린을 배웅해주고 방으로 돌아왔다.
이제 좀 쉬려는 찰나, 이번에는 에바가 편지 한 장을 들이 밀어왔다.
“···이건 또 뭐야.”
“멜라니스 경께서 직접 시종을 통해 보내신 편지에요.”
“멜라니스 경이?”
루페르가 대체 내게 편지를 쓸 일이 뭐가 있다고. 로즈니라면 모를까.
대체 그가 내게 무슨 할 말이 있어 시종을 통해 급히 전달할 만한 편지를 썼을지 궁금해 당장 편지를 뜯어보았다.
‘존경하는 리엘리 로베르 공녀님께’를 시작으로 너무 많은 인사치레와 비비 꼬인 문장들을 대충 솎아내며 읽어내렸다.
한 장을 빽빽이 채운 편지의 내용은 단순했다.
‘그냥 술 먹고 못난 꼴 보여 면목 없다, 사과하러 찾아오고 싶다는 말을 참 장황하게도 하네.’
또한, 추신으로는 로즈니가 몸을 회복하였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적혀 있었기에, 나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리엘리의 이모인 솔렘의 왕도 그렇고, 여기 귀족들은 편지를 보낼 때 다 이런 식인가.
어딘가에 편지를 보낼 때 이런 식으로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아야 한다면 나는 반드시 대필해줄 사람을 구해야 할 것 같았다.
“그 시종, 돌아갔어?”
“아뇨. 아가씨의 답장을 기다리고 있어요.”
“흠.”
이걸 어쩐다···.
사실 아르반이 아닌 다른 남자를 이 저택에 들인다는 게 나로서는 상당히 꺼려지는 일이었다.
이곳에서 돌아가는 모든 사항은 공작의 귀에 들어가게 되어있다.
아르반이야 그 전부터 워낙 엮일 일이 많았던 데다 아몬의 검술 스승을 맡고 있으니 공작에게 더는 태클이 들어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다른 남자는 또 다를 수도 있지.’
그럼 또다시 공작과 대면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그렇다 치더라도 구태여 귀찮은 상황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도 충분히 피곤해···.
“가서 시종한테 내가 가까운 시일 내에 한 번 들리려고 하는데, 멜라니스 경께서 언제 시간이 괜찮은지 여쭤봐 줄래?”
“네, 아가씨.”
내가 방문할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고 언질을 줬는지 총총거리며 사라졌던 에바는 금방 돌아왔다.
“멜라니스 경께서는 언제라도 시간을 맞추시겠다 말씀하셨다네요.”
“그럼 내일 오후에 방문하겠다고, 나 대신 답신 좀 부탁할게.”
“네, 그럴게요.”
에바가 사라지고 율렌과 둘만 남은 방 안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괜히 요즘 들어 바빠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정식으로는 처음 방문하는 친구의 집이었다.
실상은 루페르를 만나러 가는 거지만 그래도 로즈니의 집이기도 하니까. 그래서인지 마음이 조금 붕 떴다.
‘로즈니가 집에 있으면 좋겠는데.’
안부도 물어볼 겸 수다나 떨고 오면 좋을 것 같았다.
워낙에 바쁜 그녀다 보니 집에 있을지가 미지수였다.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루페르만 보고 와야지 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 했지만 옷매무새에 신경을 쓰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