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이만 자자. 말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늦어졌어.”
“그래. 빨리 자. 그래야 내가 도와주지.”
그리고 보니 꿈속에서 기억을 찾는 일을 도와주는 건 마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건가, 의문이 들었다.
“그건 마력이 필요하지 않은 일이야?”
“꿈을 다루는 건 내 고유의 힘이라 마력과는 관계없어.”
“그럼 부탁할게.”
“그래. 그리고 한 가지만 충고하자면 이전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빠르게 기억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게 왜?”
“워낙 많은 양의 기억이다 보니 중구난방으로 받아들이면 네가 혼란스러울 수도 있어.”
그 정도쯤이야 애초에 남의 기억인데 당연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율렌이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양 말을 이었다.
“어쩌면 단순한 혼란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고. 나도 이런 일을 하는 건 처음이고 인간들은 언제나 내 상상 이상으로 약하더라. 궁금한 기억이 따로 있더라도 가능하면 차근차근, 가장 어릴 적의 기억부터 받아들이도록 해”
“…알았어.”
아까 보았던 공작부인의 기일과 함께 리엘리가 어째서 삶의 의지를 놓아버릴 정도로 망가졌는지에 대해 빨리 알고 싶단 생각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율렌이 저리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보니 참아야 할 듯했다.
“대답만 하지 말고 빨리 누워.”
“응.”
심드렁한 율렌의 답을 마지막으로 나는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잠들 만큼의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왜 이렇게 잠을 못 자. 신경 쓰여서 그래?”
몇 번 뒤척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름 얌전히 누워있었는데 율렌은 내가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말을 걸어왔다.
어둠 속에서 황금빛 두 눈동자만 번뜩이는 모습이 마치 맹금류와 같아 보였다.
“응. 잠이 안 오네.”
가뜩이나 평소 자던 시간보다 한참을 넘겼는데 더 늦게 잠들면 내일 생활에 지장이 갈 것이 분명했다.
“원래 그 몸의 주인이 먹었던 약이라도 한 번 먹어 보던가.”
“수면제 많이 먹으면 몸에 안 좋아.”
내 말에 율렌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푸핫! 그거 신성력을 사용할 수 없는 인간들이나 할 법한 말이네.”
“아, 신성력을 사용하면 상관없나.”
“당연하지. 별걱정을 다 하네. 먹어.”
율렌의 대수롭지 않아 하는 태도에 힘입어 몸을 일으켰다.
“뭐, 애초에 신성력을 사용하면 며칠 정도 잠을 안 자도 크게 상관은 없는데, 그래도 한계란 게 있어.”
잠자코 율렌의 설명을 듣던 나는 약간 질린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네 전주인이 그랬어?”
“응. 사흘에 한 번만 잠을 잤지. 근데 장기적으로 이어지니 확실히 좋지 않더라고.”
인간의 연약한 육체로는 한계가 있는 거지. 그리 말하는 율렌에게 경악하는 대신 아까 물을 마셨던 컵 옆에 놓아둔 약병에서 한 알만을 꺼내 입에 넣었다.
‘그 비정상적인 분의 행적을 따라 밟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꿈속의 리엘리는 항상 대여섯 개씩을 먹었지만 나는 불면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졸린 기운만 돌면 잘 수 있을 것 같아서 많이 먹지는 않았다.
생긴 것과 마찬가지로 별사탕과 같이 달콤한 약의 맛이 입안에 남았기에 물을 한잔 마시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자 잠시 뒤, 깊은 수마의 늪에 빠져들 수 있었다.
***
“아가씨, 아가씨! 아이참…. 오늘따라 이상하게 안 일어나시네.”
귓가를 맴도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약하게 내 정신을 건드려왔다.
하지만 평소처럼 곧장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어지러웠다.
“아가씨!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 식은땀이….”
“아냐…. 괜찮아. 괜찮으니까 물 한 잔만 좀 떠다 줄래? 냉수로. 창문도 활짝 열어주고.”
“네에. 잠시만요, 금방 가져다드릴게요.”
세바니는 내 말에 방안의 모든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빠르게 자리를 떴다.
홀로 남겨진, 아니, 율렌과 둘이 남겨진 나는 식은땀에 젖은 몸이 서늘한 바람으로 차갑게 식어감을 느꼈다.
손끝에서부터 온기를 앗아가는 시린 공기에 몸이 미약하게 떨려왔다.
나는 손을 들어 걸리적거리는 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는 마른세수를 했다.
“왜 그래, 엘리. 너무 많은 기억을 받아들여서 힘들어? 아니면 약 때문인가.”
“모르겠어. 꿈을 꿀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일어나니까 머리도 아프고 어지럽네.”
“흠, 잠이 들면 마력에 섞여든 신성력도 평소보다 다량으로 육체에 흡수되는 것 같던데 이 정도면… 좋지 않은데.”
내 말에 앞발을 들어 올린 율렌이 힘없이 이불 위에 올려진 내 손에 제 발을 겹쳤다.
그리고는 제법 익숙하게 느껴지는 신성력을 사용했다.
그나저나….
“내가 잠이 들면 네 마력에 들어 있는 신성력이 나한테 흘러들었어?”
“알고 있는 것 아니었어? 충분히 체감할 수 있을 만큼 많이 흘러 들어가던데.”
율렌은 내 질문에 질문으로 답을 해왔다.
“비록 내가 사용하는 만큼 완벽하게 회복되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분명 느껴질 만큼은 됐을 텐데.”
녀석이 말하는 와중, 순식간에 몸의 피로가 가시고 두통과 어지럼증이 사라졌다.
벌써 수십 번도 넘게 경험한 일이지만 매 순간순간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힘이었다.
“고마워. 으…! 덕분에 개운해졌다. 느끼는 바는 있었는데, 그런 이유 때문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
나는 가뿐해진 몸으로 기지개를 켰다.
“사실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뭐라 말하기 그렇지만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하던 참이야.”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네 몸에 어떻게 신성력이 스며들 수 있는지. 내 마력을 다량으로 흡수한 영향인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넌 정말 흥미로운 인간이야.
율렌은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날개를 작게 파닥이기까지 했다.
“네 말대로 가장 어렸을 때의 기억부터 최대한 많이 보고 싶다 생각했어.”
“그래서 어느 정도의 기억을 봤는데?”
“리엘리가 태어났을 때부터 2주 정도.”
덕분에 아몬과 처음 마주했던 날을 제외하고는 나온 적 없던 공작부인의 얼굴을 다시 한번 마주할 수 있었다.
리엘리와 같은 기다랗고 약간 굽이치는 금발 머리에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여자, 세리나 로베르.
리엘리를 보고 미소 짓는 세리나의 옆에는 공작, 루퍼스 로베르 또한 존재했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정하고 온화해 보이는 젊은 공작은 제 아내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 과거의 편린을 통해 지금까지 내 앞에서 웃어 보이던 공작의 미소가 모두 인위적인 표정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진심으로 웃는 모습을 눈에 담고서야.
“첫 시도에 2주 정도의 기억을 보았으면 앞으로는 점점 더 늘어날 거야. 그래도 혼란스럽거나 불편하지는 않지?”
잠시 다른 쪽으로 빠졌던 생각이 율렌의 질문으로 본래의 방향을 되찾았다.
“좀 혼란스럽긴 한데 나름 괜찮아. 전에는 리엘리의 몸에 갇혀 있는 것처럼 꼼짝없이 기억의 흐름에 따라 움직여야 했는데, 이제는 그냥 영화를 보는 것 같고.”
“영화가 뭔데?”
“아, 내가 있던 세계에서 뮤지컬이나 연극 같은 것을 영상에 담아두고 사람들한테 보여주던 것을 말해.”
영상이 뭔지는 알까 싶은 생각을 하던 찰나, 율렌이 재빨리 대답했다.
“흥, 영상구 같은 거구나.”
잘 알겠다는 듯이 콧김을 뿜으며 말하는 율렌의 모습에 작게 웃었다.
그때 마침 세바니가 물을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나는 곧장 시원하게 들이키고는 욕실로 향했다.
***
“공녀님, 공녀님!”
“어? 네, 네.”
“말 위에서 다른 생각을 하시는 건 위험합니다. 집중하기 어려우시면 잠시 내려오셔서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도록 하죠.”
“미안해요. 이제 집중할게요.”
나는 세이린의 부드러운 지적에 멋쩍게 사과했다.
그리고는 머리를 비우기 위해 오직 말과 달리는 행동에만 신경을 기울이려 노력했다.
하지만 노력과 별개로 생각은 자꾸만 엉뚱한 곳으로 튀었고, 결국 오늘은 일찍 수업을 마치는 쪽으로 세이린과 합의를 봤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일은 무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피곤해서 그런가 봐요.”
나는 세이린의 걱정스러운 얼굴에 시선을 피하며 변명했다.
사실 요즘 리엘리의 유년 시절 기억을 알게 되면서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하지만 세이린에게 이런 상황을 설명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내 어설픈 표정 연기가 많이 티가 난 모양이다.
세이린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나를 살폈다. 그러나 나는 어색한 침묵을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계속 시선을 회피하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희미하게 웃어 보인 세이린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녀님의 개인적인 일이신 듯하니 더 묻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마음을 털어놓고 싶어지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아델 경….”
세이린의 신뢰감 가득 담긴 목소리와 듬직한 모습에 잠깐 흔들릴 뻔했다.
나는 다시 굳게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말만으로도 정말 고마워요. 고민이 생기면 꼭 아델 경에게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이번 일만 제외하고요. 뒷말을 삼키며 세이린에게 웃어 보였다.
그녀는 다정한 미소를 내게 돌려주었다.
나는 그 얼굴에 더욱 마음이 불편해졌다.
‘솔직히 말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지….’
최근 들어 아빠에 대한 기억을 다시 떠올려 찜찜해진 데 더해서 리엘리의 과거를 통해 알게 된 공작의 모습이 뇌리에 남아 문득문득 떠오르곤 했다.
“아! 그보다 빨리 들어가 봐야겠어요. 레이디 로즈니가 도착하기 전에 먼저 씻어야 하는데….”
전에 로즈니와 세이린이 안면을 튼 이후로 우리 셋은 꽤 친밀한 관계를 유지 중이다.
본래 오늘은 세이린이 쉬는 날이라고 해서 셋이 티타임을 갖기로 했었다.
승마 수업 대신 로즈니와 세이린과 함께 말을 타고 가벼운 나들이를 가보려고 했는데, 로즈니의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바람에 가벼운 티타임으로 변경되었다.
재미있게도 이런 상황에 가장 큰 불만을 토해낸 사람 역시 로즈니였다.
편지로 타티임만 가능할 것 같다 전달해온 그녀의 글씨체에서부터 그 불만이 가득 묻어났다.
얼마나 꾹꾹 눌러서 썼는지, 그녀의 이력서에 적혀 있던 글씨체와 비교했을 때 두 배는 굵어 보였다.
그리고 나들이 일정이 펑크가 났기 때문에 시간이 다소 널널해진 세이린이 그냥 수업을 진행하고 후에 타티임을 갖자고 먼저 말을 꺼내왔었다.
배우는 초반에는 빠지는 날 없이 꾸준히 규칙적으로 익혀가는 게 중요하다나?
아무튼, 소중한 쉬는 날에 시간을 내어 수업해주는 데 집중을 못 해서 미안한 마음만 한가득이었다.
‘그런데도 나를 꾸짖는 대신 저렇게 다정하게 지적하다니….’
내가 어찌 그녀를 좋아하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