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내가 갑자기 조가비처럼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하자 율렌이 눈을 샐쭉하게 떴다.
“뭐야, 엘리 너도 나처럼 미래를 볼 수 있게 되기라도 했어? 아니면 원래 있던 세계에서 미래를 보는 힘이 있었나? 이건 고작 마력 좀 흡수했다고 가질 수 있는 종류의 힘이 아닌데….”
율렌이 거하게 헛다리를 짚었지만 나는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런 내 모습이 어지간히 답답했는지, 율렌은 내 상체에 축 늘어져 몸을 치대며 보채기 시작했다.
“뭔데. 말해봐. 네가 죽는 날까지 비밀로 하겠다고 약속했잖아. 응?”
이제는 작은 앞발로 내 몸을 꾹꾹 눌러대기까지 하는 녀석을 피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율렌은 끈질기게 달라붙어 왔다.
“에이…! 그럼 지금부터 말하는 건 내가 죽는 날까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그러니까 빨리 말해 봐. 나 속 터지기 전에!”
계속되는 율렌의 독촉에 말하기를 망설이던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냥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했다.
‘어차피 저 녀석한테 말하더라도 크게 달라질 건 없으니까 상관없겠지.’
더구나 저리 조를 정도면 정말 어지간히 궁금해하는 것 같고, 만약 내가 말해주지 않는다면 나중에까지 달라붙어서 틈만 나면 호시탐탐 질문해댈 터였다.
‘그런 경험은 산맥에서 한 것만으로 충분해.’
왜 애 엄마들이 아이들의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해 주는지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미래를 볼 수 있는 힘 같은 건 없어. 난 그냥 소설을 읽었을 뿐이야. 이곳은 내가 전에 살던 세계에서 읽었던 소설을 바탕으로 존재하는 세계고….”
말문을 트자 이야기는 끝을 모르고 줄줄 이어졌다.
처음 아몬을 만나 이곳이 소설 속 세계임을 알았으며, 아르반을 보고 그가 팔을 잃게 되는 사건 또한 떠올렸다는 것.
그리고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율렌이라는 존재를 만나게 되었던 것까지 얘기한 나는 머리맡에 구비되어 있는 병에서 물을 따라 마셨다.
말을 많이 했더니 목이 말랐다. 그대로 한 잔을 더 따르는데, 여태 내 얘기를 듣고만 있던 율렌이 턱을 치켜들며 의기양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역시 네 덕에 내가 살 수 있었던 게 맞잖아. 그쪽 세계에도 나와 같이 미래를 볼 수 있는 존재가 있었나 보네. 자신이 사는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의 미래를 볼 수 있는 자가.”
“…이 말을 다 믿는 거야?”
이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내가 차원을 넘어왔다는 문제야 율렌의 입장에서는 증거를 발견한 것과 다름이 없으니 납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이 내가 읽었던 소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세계라는 말까지 단번에 믿는다 말할 줄은 몰랐다.
율렌은 내 물음에 무엇이 문제냐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믿겠다고 했잖아. 나 못 믿어?”
“…….”
녀석이 가볍게 던진 질문은 내게 너무도 무거운 것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율렌은 그런 내 모습에도 개의치 않고 일관된 태도를 유지했다.
“그 소설이란 것도 결국은 누군가가 나처럼 미래를 내다보고 적은 예언서와 같은 것이었을 뿐이야.”
율렌의 설명을 따르자면 그럴 터였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믿는다 말하는 녀석에게 나 또한 너를 믿는다고 말할 수 없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내 생각이 얼굴에도 드러난 모양이다.
“같이 생활하다 보면 너도 나를 믿을 수 있게 될 거야. 시간은 많으니까 내가 기다리지 뭐. 그보다 엘리, 네가 그 몸에 빙의하게 된 이유 말인데.”
율렌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 다시 본론으로 화제를 돌렸다. 마치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응….”
답지 않은 녀석의 배려에 한층 더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냥 믿는다고 대답할 걸 그랬나.’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를 믿는다고 말하는 저 순순한 눈망울을 마주하고 나도 너를 온전히 믿는다는 거짓말을 어떻게 입에 올릴 수 있을까.
언젠가는 율렌을 그만큼 믿을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그 몸은 확실하게 죽어있었을 거야. 무슨 수를 쓰더라도 살아있는 인간의 몸에 다른 인간의 영혼을 빙의시키는 건 불가능해.”
녀석이 꺼낸 이야기는 내 정신을 감정을 늪에서 끌어올리기 충분한 것이었다.
“그럼….”
“네 말대로라면 아직 죽을 때가 아니었는데 이미 사망해 있었다는 거지. 이유는 대충 두 가지 정도로 예상할 수 있어.”
“뭔데?”
“일단 가장 유력한 사망 원인은 차원의 균열로 던져넣은 내 마력을 흡수하려다가 실패했을 경우야.”
율렌은 잠시 관찰하듯 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엘리, 네 몸은 마력을 흡수하기 쉬운 체질을 타고났어. 비록 아무런 훈련도 받지 못해 제 의지로 흡수하려던 건 아닐 테지만 내 마력이 워낙 강대하니 자연스레 이끌렸겠지.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녀석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 정도로 마력을 흡수할 수 있는 육체인데 왜 마법을 가르치지 않은 거지.”
아깝다, 아까워. 이런 재능도 아무나 타고나는 게 아닌데.
갑자기 본론에서 벗어나 한탄을 시작하는 녀석을 내려다보다 내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몬의 누나라서 그래도 타고난 재능이 있었나 보네.’
하긴 미래에 아르반보다 강해지는 아몬의 친누나인데, 따지고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재능이 있음에도 가르치지 않은 건 아마도 공작의 의지였을 테지.’
정확한 이유는 알 길이 없으나 딸이 힘을 얻어 더 이상 제 손에서 통제할 수 없어지는 상황을 원치 않았을지도.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리엘리는 제가 마력에 재능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었을까.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율렌 또한 정신을 차렸는지 내 허벅지를 살살 두드려 시선을 끌었다.
“흠흠. 하여튼, 인간의 육체로는 내 방대한 마력을 단번에 흡수할 수 없어. 그러니 그 충격으로 영혼이 튕겨 나왔을 때 네가 들어갔을 확률이 아주 높지.”
“…마력에 치여서 죽었다는 말이야?”
나는 작게 입을 벌렸다. 무슨 교통사고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지만 일단은? 균열이 소멸하며 갈 곳 잃은 내 마력은 마력을 받아들이기 쉬운 네 육체로 흘러 들어갔을 것이고, 그걸 감당하지 못한 리엘리 로베르는 죽어버린 거지.”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 논하는 율렌의 목소리가 너무도 맑고 깨끗하기만 해서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죽어버린 육체에는 마력을 담아둘 수 없으니 또다시 길을 잃은 내 마력은 옆에 있던 네 영혼에 흡수됐을 거고, 비어버린 육체가 있으니 네 영혼은 자연스레 그 몸에 안착했던 거겠지.”
제 추리가 제법 그럴싸하다고 여겨지는지 율렌은 작은 머리를 연신 끄덕거렸다.
“또 다른 추측으로는 이미 리엘리 로베르는 죽어있거나 잠깐이지만 영혼이 빠져나갈 만큼의 충격을 받은 상태였고, 그 사이에 마찬가지로 네 영혼이 안착했을 수도 있어.”
“잠깐만. 어떤 경우라도 일단 리엘리가 죽었거나 그에 준하는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는 거잖아.”
“응, 그렇지. 말했지만 죽은 인간의 영혼은 살아있는 인간에게 그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가 없어. 그리고 이렇게 마력을 잘 흡수하는 육체가 있는데 네 영혼이 먼저 마력을 흡수할 수 있었을 리도 없고.”
율렌의 설명에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니까, 그 말의 뜻은….
“그러니 네가 직접적으로 리엘리 로베르에게 해를 끼쳤을 가능성은, 애초부터 존재할 수가 없다는 거야.”
나는 쥐고 있던 유리잔을 내려다보며 손에 힘을 주었다.
약간 남아있던 물에 일그러진 내 얼굴이 비쳤다.
그나마도 내가 손에 힘을 주자 떨림으로 형체를 알아보기조차 힘들게 되어버렸다.
“…그래도, 이 몸이 다시 살아날 가능성도 있었을 거 아냐. 그럼 결국 되살아날 수도 있던 리엘리 로베르의 가능성마저 내가 빙의함으로써 막혀버린 거고.”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더라도 잠시 숨이 멎는 경우도 있다.
만약 그사이에 내가 이 몸에 들어앉아 버린 거라면 불쌍한 리엘리 로베르의 인생을 어찌 보상할 수 있을까.
“그렇게까지 생각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흠, 엘리.”
“…….”
“너는 리엘리 로베르의 영혼이 되살아나는 것을 막고 네가 대신 그 육체를 차지해 버렸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봐서는 그게 아냐.”
“…그게 아니면 뭔데?”
“정말 만약에 네 말처럼 본래 그 몸 주인의 영혼이 잠시 육체이탈을 했던 것이라고 치더라도 본디 영혼이란 육체에 오랜 기간 머물며 그 육체와 동화되기 마련이야.”
“…….”
“그러니 결국 영혼이 튕겨 나간 상태에서 다른 영혼이 그 몸에 들어간다고 해도 본래의 영혼이 살아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제 육체에 기어들어 간 다른 영혼을 쳐내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리 말하는 율렌은 어딘지 모르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결국 네가 그 육체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원래의 리엘리 로베르라는 영혼이 살아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란 거야.”
“…대체, 왜?”
“거기까진 나도 모르지.”
리엘리 로베르가 마냥 행복하게 살아온 아가씨가 아니라는 사실은 나도 안다.
하지만 그게 삶을 포기할 정도였다고?
“아.”
그리고 보니 조금 전 주치의를 만나고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아까 받았던 약병을 꺼냈다. 그러자 율렌이 바로 관심을 보였다.
“그게 뭐야? 사탕?”
“네가 보기에도 사탕으로 보이지?”
“사탕이 아니면 뭔데? 약?”
“응. 약이야. 리엘리 로베르가 먹었던 수면제.”
사실 이 약은 꿈속에서 몇 번인가 본 기억이 있었다.
리엘리가 자기 전에 몇 알씩 입에 넣고 씹어먹었는데 약이라고 하기에는 그저 달콤한 맛만 나서 전혀 약이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단지 별사탕을 좋아하는 줄 알았지….
“내가 봤던 기억 속의 리엘리 로베르가 항상 먹던 수면제야. 그냥 사탕인 줄 알았는데, 오늘 주치의를 만나고 나서야 이게 약인 줄 알았어.”
“사탕인 줄 알았다고? 꿈속에서 봤다면서. 근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내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여겨졌는지 율렌의 꼬리가 부산스레 움직였다.
“꿈속에서 리엘리가 과거에 느꼈던 감정은 고스란히 공유되지만 생각까지는 알 수 없어. 그러니 약에 대해서도 알 길이 없었고.”
“…이상한데. 네가 꿈속에서 생각을 읽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적은 있는 거야?”
“아니.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상황으로 알 수 있는 게 많기도 하고… 남의 생각까지 낱낱이 알고 싶지는 않았어.”
내 대답에 꼬리를 탁 소리 나게 내려친 율렌이 유레카를 외치듯 말했다.
“그거 때문이네! 너 자신이 리엘리 로베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전혀 없으니 꿈이 네 의지를 받아들인 거야.”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이 꼬리를 둥글게 말아 접은 율렌이 내 가슴께를 톡톡 두드렸다.
“근데 아마 네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 해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네 영혼과 육체가 동화되어 가면서 서서히.”
나는 율렌을 달랑 들어서 내 옆에 내려놓고 옆으로 누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율렌은 여전히 재잘거렸다.
“잠들기 전에 강하게 생각해봐. 네가 보고 싶은 그 몸의 과거나 생각들에 대해서.”
“그게 내 마음대로 이루어져?”
“어느 정도는. 일단 동화도 잘 되어 가는 것 같고, 네 영혼에 흡수된 마력도 육체에 서서히 스며들고 있으니까 가능할 거라고 봐.”
어쩐지 신이 난 듯한 녀석은 갑자기 뭐가 그리 좋은지 꼬리까지 붕붕 흔들어댔다.
“아직은 체감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 몸이 적응하기 시작하면 마력 흡수도 가속화될 거야. 그럼 너도 마력이 늘어난다는 게 어떤 건지 알 수 있겠지.”
녀석의 말처럼 지금은 느껴지는 바가 없었다. 그렇기에 솔직히 관심이 가지도 않았고.
나중 일은 나중에 가서 생각하도록 하고, 지금 당장은 리엘리 로베르의 과거가 더 신경 쓰였다.
“…그럼 내가 원한다면 리엘리 로베르가 왜 살고자 하는 마음을 포기했는지도, 알 수 있을까.”
“아마도? 네가 자는 동안 나도 옆에서 도와줄게. 꿈속에서 네가 보다 많은 기억을 한 번에 습득할 수 있도록.”
꼭 한 번에 많은 기억을 찾아야만 하는 걸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내게 스며들 기억들이라면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알아야 할 기억들이라면 빨리 확인하는 편이 여러모로 좋을 것이다.
남의 기억을 받아들이는 게 유쾌하지 않은 일이란 걸 뼈저리게 통감해버린 지는 오래였지만, 매도 빨리 맞는 게 차라리 낫다.
‘지금 내게 혼란을 주는 모든 일들 역시 정리되겠지.’
나는 단단히 마음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