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 그녀는 누구인가?(1)
* * *
“이걸 진짜 다 준비해올 줄은 몰랐는데.”
“하면 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니었네.”
고생 끝에 어찌어찌 비품들은 다 준비하는 데 성공하긴 했다.
이제 남은 건 이 동아리가 잘 굴러가느냐, 그대로 망하느냐지.
“‘문제는 사람들을 얼마나 모을 수 있는가?’ 아니겠나.”
“트아카 앱에 홍보글을 작성해놓긴 했어.”
“나도 그거 봤어. 담백한 소개라서 어그로를 끌기엔 좀 모자라 보이긴 했지만, 괜히 뇌절하는 것보단 낫겠더라.”
나도 색다른 시도를 안 해본 것은 아니다.
초안에는 유행하는 농담도 몇 개 넣어 놨었고, 색깔도 눈에 띄라고 알록달록하게 칠해놨었다.
최종안에선 다 빼버렸지만.
그 이유는 신뢰의 문제였다.
이런 건 결국 얼마나 자세히 조사해서, 어떻게 잘 해결하느냐가 관건이니까.
지나치게 많은 의뢰를 받았다간 해결하지 못하는 건수만 늘어나고, 그러면 우리 동아리의 위신만 떨어지게 될 것 아닌가.
뭐든 처리할 수 있는 선 내에서 해결하는 게 최고였다.
“근데, 만약 사람이 너무 안 오면 어떻게 하려고?”
“그럼 우리가 직접 조사하는 수밖에 없지, 뭐…”
“제발 그런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네.”
“그럴 땐 빤쓰런하면 돼.”
동아리의 명운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가 오가던 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첫 손님이었다.
“들어오세요.”
“안녕하세요. 여기가 새롭게 창설된 도시 전설 동아리죠?”
처음 보는 얼굴이네.
아마 S클래스나 U클래스와는 거리가 제법 있는 곳의 클래스 출신인 모양이었다.
별 상관은 없었지만.
애초에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주겠다고 홍보문에 내걸었으니까.
“맞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하러 오셨나요? 아, 말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응, 별 건 아니야. 요즘 도는 소문이 있는데, 내가 그 이야기에 정확하게 해당하더라고.”
첫날부터 대박인데?
이런 건 이야기의 스케일이 작아도 상관없다.
어쨌거나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는 소리니까.
괜히 복잡하고 어려운 소재 위주로 선정해서 골머리를 앓는 것보단 사람들의 공감을 사기 쉬운 간단한 소재 쪽이 조사하기도 쉽지.
난해한 소재는 간신히 다 조사하고 나면 이미 유행이 지나가 있거나, 너무 복잡해서 읽지도 않고 닫아버리는 경우가 대다수거든.
물론 내가 조사하고자 하는 것들은 그런 종류지만, 어디까지나 동아리라는 이름을 달고 활동하고 있는 이상 그건 부가적인 일이어야만 했다.
나중에 이 동아리가 꽤 큰 규모로 성장해서 일 대부분을 말단 동아리원들에게 위임해도 별 상관없는 정도가 되면 또 모를까.
“어떤 소문인데?”
“수리 맡겼던 필기구를 되찾으면, 그 사람에게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는 소문이야.”
“그건 너무 추상적인데. 사람들이 물건을 수리 맡기는 경우는 아주 흔하잖아. 특별한 일 정도야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거고.”
“그렇지. 하지만 여기서 관건은 그 현상이 모두에게 일어나는 건 아니라는 거야. 이 일을 겪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머큐리 만년필 수리를 맡겼던 사람들이라 하더라고. 나도 똑같이 머큐리 만년필을 수리 맡겼었고.”
“그 특별한 일이 뭔데?”
“너무 사소한 일이긴 한데… 기억 상실? 건망증? 이라고 해야 하나? 갑자기 의식이 사라질 때가 있어. 그 사이에 뭘 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고.”
머큐리 만년필.
기억 상실.
도대체 무슨 접점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
뭔가 알려고 해도 단서가 너무 빈약한데.
“기억을 잃는 기간은 얼마나 돼? 오래 잃는다면 생각보다 굉장히 심각한 문제가 되니까.”
“아주 짧아. 잠깐 넋 놓고 있는 정도의 시간 정도?”
“그게 왜 특별한 일이라고 하는 건데? 이상하다고 여길 건 없어 보이는데.”
“그러니까, 음, 뭐라고 설명하면 좋지? 나도 모르게 시간이 지나갔다는 느낌이 아니라, 의식이 암전됐다는 기분이 들어. 잠깐 기절했던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아이나가 나한테 정신 지배를 사용했을 때랑 굉장히 비슷한 느낌인데.
물론 아이나를 의심하는 건 아니다.
그녀는 이런 쓸데없는 짓에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게다가, 그놈의 머큐린지 지랄인지 하는 만년필을 수리 맡긴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하고.
“혹시 너희들은 머큐리란 회사에 관해서 뭔가 아는 게 좀 있냐? 내가 머큐리에 대해선 아는 게 거의 없어서.”
“말했다시피 유명한 펜 회사야. 그것 이외에는 별로 특별한 게 없어.”
“아니, 필기도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머큐리를 펜 회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잉크로 더 잘 알고 있을 회사지.”
“잉크?”
“머큐리 사의 잉크는 질이 매우 좋기로 유명하지. 펜은 다른 회사의 제품을 쓰더라도 잉크만큼은 머큐리 사의 것을 쓰는 경우도 흔하니까.”
어쨌거나 문구용품 제조 회사라는 건데.
설명을 계속 들어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투성이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일단은 돌려보내고 천천히 더 조사를 해봐야 할 문제 같은데, 이건.
“음, 제보 고마워. 일단은 당장 답변을 줄 수는 없는 일인 거 같으니, 조사해보고 동아리 활동 보고서에 제출하도록 할게. 200크레딧 정도면 되겠어?”
“응, 그 정도면 충분해. 별것 아닌 이야기였지만 경청해줘서 고마워.”
“그러려고 만든 동아리인데, 뭘.”
“다음에 또 재밌는 소식이 있으면 가져올게!”
“아, 혹시 네 머큐리 만년필을 좀 빌려 가도 될까? 단서를 모으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괜찮아. 마침 그러려고 가져오기도 했고.”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큰 문제라고 여기진 않는 모양이었다.
200크레딧 이야기에 바로 눈이 돌아가는 게 보였으니까.
뭐, 차라리 그게 낫긴 하다.
오히려 괜히 불안해하고 심각하게 여기면 우리도 신경 쓰이거든.
그래도 혹시 모르니 꼼꼼하게 조사해보긴 해야지.
* * *
“그래서,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해?”
“일의 스케일은 사소한데, 따지고 들려니 너무 복잡해지는 일이네. 뭔가를 추측하기엔 단서가 너무 적어.”
“방금 해당 소문에 관한 자료를 조금 수집해보니, 공통점이 하나 있더군.”
“뭐였는데?”
“지금까지 비슷한 증상으로 피해를 호소한 사람 중에 머큐리 사의 잉크를 사용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거지.”
“그러니까, 머큐리 만년필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같은 증상을 겪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이 머큐리 잉크를 썼다?”
“그렇지. 머큐리 만년필을 수리 맡겼던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머큐리 잉크를 쓸 테고.”
그렇다면 이번 사건은 그 머큐리라는 회사랑 연루가 되어있다는 게 기정사실이네.
명품이라곤 하지만, 문구용품이나 만드는 회사가 대체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저건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걸까.
“자료는 어떻게 조사한 거야?”
“단기 기억 상실, 건망증 등의 키워드로 인터넷을 뒤져봤지. 해당 증상을 겪고 있다는 글을 작성한 사람의 아이디를 모아놨다가, 해당 아이디들을 전부 검색해보았다. 그리고, 같은 아이디를 한 SNS 계정을 들어가서 올려놓은 사진들을 확인해 보았지.”
“엄청 귀찮은 작업이었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끝낸 거야?”
“생각보다 무척이나 간단하더군. 캘리그래피 등의 미술이나, 필기 등을 전문으로 하는 예술가라면 홍보용 SNS 계정을 만들어두는 게 보통이고, 명품 등을 수집하는 인간이라면 새로운 명품을 샀다고 자랑하는 게 일상이니까. 그들이 올린 사진 대부분에서 머큐리 사의 잉크를 확인할 수 있었지.”
카타리나에게 이런 면모가 있었다니.
조금 두려워졌다.
보통 이런 애들이 커뮤니티에서 신상 파내고 저격하는 일 같은 걸 하던데.
“어… 그래. 조사해줘서 고맙다.”
“별것 아니다.”
근육뇌라고만 여겼던 카타리나에게 이런 의외의 면모가 있을 줄은.
하긴, 비슷한 근육뇌인 세레나도 그랬었지.
가정적이라는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양반이 집안일에 소질이 있을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대충 정리해보면, 최근 머큐리 잉크를 구매한 사람들에게서 단기 기억 상실 증상이 나타난다?”
“그렇다. 머큐리 잉크와 기억 상실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그러면 우선 펜에서 잉크를 분리해봐야겠네.”
혹시 분리하는 과정이 복잡하면 어쩌나 했는데, 그렇게 어렵진 않았다.
동영상 같은 것만 보고도 쉽게 따라 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자, 이게 그 잉크의 정체군.”
“겉보기엔 그냥 평범한 잉크인데 말이지.”
“잠깐.”
제일 먼저 나선 것은 천현우였다.
동아리실 구석에서 게임만 하던 녀석이 갑자기 무슨 일이지?
“알겠다. 뭔지.”
“뭘 알겠다는 건데?”
“잘 봐.”
천현우는 희석된 잉크가 담긴 컵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러자,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한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그 일렁임이 완전히 잦아들 무렵, 붉은색의 작은 방울 하나가 수면 위로 떠 올랐다.
“…피?”
“어떻게 안 거야?”
“내 사상력이 피를 다루는 능력인데, 피를 감지하지 못할 리가 없잖아.”
“하지만, 조금 이상하지 않아? 이렇게 적은 양의 피가 잉크에 섞였는데, 어떻게 아직도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수 있지?”
“그건 나도 몰라. 확실한 건, 이건 피라는 거야.”
…진조다.
확실해.
이런 성질을 띠는 혈액을 가진 녀석은 내가 아는 바로는 진조 뿐이다.
게다가, 진조의 능력 중 하나는 자신의 피와 접촉한 대상을 지배하는 능력이니까, 이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대체 이 머큐리라는 회사와 진조가 무슨 관계냐는 건데….
“성진이는 벌써 감 잡은 모양인데?”
“뭐?”
“그냥, 네가 보통 그런 자세로 생각하고 있을 때면 금방 답을 내놓더라고.”
“대충 상황 정리는 끝났는데, 이건 우리 선에서 해결하기엔 너무 규모가 큰 사건인 것 같다.”
어떻게 첫 의뢰가 이런 일일 수가 있는 걸까.
우연도 참 기가 막힌 우연이다.
“무슨 일인데?”
“아마도, 진조랑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동아리실이 얼어붙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야, 전세계에서 가장 주목하고 있는 신예 빌런이랑 관련 있다는 말인데, 긴장을 안 하려 해도 안 할 수가 없지.
“그럼, 우리는 이 일에서 손을 때야하나?”
“그래야 하지 않을까.”
“규모 있는 기업이랑 적대한다는 건 큰 부담이 되는 일이야, 거기에 빌런까지 연루된 사건이라면 우리 같은 코흘리개들이 끼어들긴 힘들지.”
“하지만, 이대로 묻어버리기엔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해. 피해자는 점점 늘 텐데?”
“…이사장님의 손을 빌리는 건?”
“그 정도는 고려해볼 만하지. 이사장님이 바쁘다면 무위로 돌아가겠지만.”
여러 가지 의견이 오가긴 했지만, 사건의 스케일이 보통 수준이 아니었던 지라,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뚜렷하게 좋다고 할 아이디어는 나오지 않았다.
“후, 이 이상 이야기하는 건 무의미한 것 같다. 일단은 이사장님한테만 넌지시 말해보는 걸로 하고, 그 외의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는 걸로 해.”
“그래야겠네.”
“내일 보자.”
사실, 클로에한테 말한다고 해서 근본적인 해결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녀는 히어로 직에서 은퇴했으니까.
물론 다른 유명한 히어로들에게 연락을 취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히어로들이 바로 진조를 격퇴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고.
어렵구만, 어려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잠깐, 이제야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것 같다.
* * *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했었죠?”
“그러게요. 세실리아씨는 이미 알고 있었나 봅니다.”
“비록 통화긴 하지만요. 저는 실제로 만나보고 싶었는데, 뭐 그건 차차 알아가는 걸로 하고… 그럼,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면 될까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