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 재확인.
* * *
“승인해주셨어. 자유롭게 활동하라고 그러시던데.”
“감사합니다.”
“부실은 U4번 방을 이용하면 돼. 너무 개판으로 어질러 놓지만 말고. 가끔 가서 확인할 거야. 별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아무럼요.”
당연히 그리 돼야 했을 일이지만, 나는 연거푸 고개를 숙이며 세레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어쨌거나 세레나가 아니었으면 힘들어졌을 게 분명한 일이니까.
나는 얼른 교수실에서 빠져나와 다른 이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뭐라고 하시디?”
“허가해주셨어. 부실은 U4번 방을 사용하면 된다고 하셨고.”
“잘됐네. 이제 말해놨던 물건들만 채워놓으면 되겠다.”
“미친 새끼냐?”
“네가 뭘 안다고 그러는 것이냐, 지존박스는 중대 사항이거늘!”
저걸 잊고 있었네.
활동 비용이 들어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텐데.
일단은 사비로 채워 넣든가 해야겠다.
“그래, 알았다.”
“준비되면 말해라. 우리 박성진호 출항하는 모습은 꼭 봐야지.”
“침몰할 것처럼 말하지 마라. 천현우. 박성진이 망하면 우리 체면도 구기는 거다.”
“그런가?”
남 일인 양 말하는 꼴 좀 보게.
저 자식은 자기도 한 배에 탔다는 사실을 잊은 모양이다.
“뭐야, 갑자기 어디 가냐?”
“너희들이 말한 비품 사러 간다.”
“아, 그럼 빨리 꺼져.”
이젠 짜증도 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저 모습이 더 익숙했다.
남정네들끼리의 우정은 으레 저런 방법으로 표현되기 마련이니 말이다.
“같이 가.”
내 뒤를 따라붙은 것은 아이나였다.
생각해보니 최근에 얘랑 시간을 보낸 적이 거의 없긴 하네.
마침 동문에 갈 일도 생겼겠다, 모처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뭘 할지는 비품을 구매하면서 천천히 고민해 보도록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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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보는 것 같네. 걔도 여자친구가 여럿이던 시절이 있었는데.”
“옛날에는 상당히 신경 쓰였던 점이지만, 나도 요샌 무덤덤해진 부분이긴 하다. 그런 사람이 한둘이라야 말이지. 보다 보니 익숙해지더군. 이젠 괜찮다.”
* * *
“남자들은 도대체 왜 게임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너도 이런 게 좋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아이나의 시선이 나와 지존박스 사이를 오갔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이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는 표정.
공허한 눈길은 둘에게서 떨어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폭거에 굴할 내가 아니지만.
“당연하지.”
현대인 남성 중에서 게임 싫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게임을 즐기지 않는 남자도 분명히 있기야 하겠지만, 그들 중에서 게임을 확실하게 싫어한다고 할 수 있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게임을 거의 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 삶 자체가 나에겐 하나의 게임이나 다를 바 없어서 그런 거지.
소설 속에서나 볼법한 초능력자가 되었는데 굳이 그런 걸 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물론 이 삶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쯤이면 게임을 시작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직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 차라리 다행이다 싶네.”
분명 화낼 줄 알았건만, 오히려 그녀는 안심했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눈매도 아까보다 한층 부드러워졌고.
뭐지, 뜻밖의 반응인데.
“뭐가?”
“요즘 나한테 너무 소홀하길래. 딴마음이라도 품고 있나 했지. 그게 아닌 걸 알았으니까 됐어. 하긴, 이 질문에도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할 정도로 모자란 사람이 그렇게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을 리가 없지.”
하나하나 맞는 말이다 보니,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네.
쑥스러움에 입맛만 다셨다.
“미안, 이래저래 바빠서.”
“나도 알아. 그래서 지금까지 별말 않고 있었던 거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표정에는 여전히 새침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확실히 전보다 감정표현이 풍부해지긴 했네.
“먹을 거야 대충 과자 같은 걸 잔뜩 사다 놓으면 그만인데, 나머지 것들이 문제네.”
“뭐가 남았는데?”
“찻잎이랑 컴퓨터.”
찻잎은 카타리나가 주문했던 물건이다.
FOP 등급인지 뭔지 하는 거.
컴퓨터는 알프레드와 프리실라의 제안이었고.
진짜 돈 먹는 하마들만 모였네.
“차는 내가 잘 알아. 도와줄게.”
“그러면 고맙지.”
“저쪽 카페 거리에 차를 전문적으로 파는 곳이 몇 군데 있어. 그중에서 내가 자주 들리는 가게도 있고. 거기서 고르면 될 거야. 카타리나 입맛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으니까.”
나는 잠자코 그녀의 뒤를 따랐다.
다도에 관해선 아는 게 별로 없거든.
비싼 차를 마셔볼 일이 있어야 말이지.
기껏 마셔본 차라곤 은행에 있는 율무차, 둥굴레차, 녹차가 거의 전부인데, 뭘 알겠어.
“너무 비싸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네 생각만큼 안 비싸. 그나저나, 빨리 안 오고 뭐 해?”
“따라가고 있는데?”
아이나의 핀잔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거리가 벌어진다 싶으면 곧바로 나에게 성을 내기 시작했으니까.
갑자기 왜 저러는 건지 나로선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짜증만 내던 아이나가 돌연 속력을 줄이고 내 옆에 섰다.
그리고는, 조금은 어색해 보이는 팔짱을 끼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병신은 나였던 모양이다.
저렇게까지 눈치를 주고 있었는데.
나는 재빨리 아이나 쪽으로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쳤다.
“하고 싶은 말 있어?”
이 와중에도 만회할 기회를 주시다니, 그녀의 하해와 같은 은덕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곁에 있어 줘서 항상 고마워. 아이나.”
항상 고마운 일이자, 가장 감사한 일이기도 하지.
아이나가 함께 있어 준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데.
“이제 또 이걸로 입 닦으려고 그러지?”
“내가 언제 그랬다고?”
“아냐, 신경 쓰지 마. 마지막에 누가 남는지 보면 알겠지.”
이럴 때가 제일 무서운데.
혹시나 그 표정을 지으면 어쩌나 해서.
지금처럼 감정 표현이 풍부해지기 이전, 아이나가 유일하게 짓던 표정이 있었다,
바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놀랍도록 음험한 미소다.
물론 나를 보고 지은 표정은 아니었겠지만, 괜스레 나조차도 초조해지게 만들 정도로 무서웠었던 기억이 난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엔 그 표정을 짓지 않았지만.
* * *
“드디어 끝났네. 수고했어. 아이나.”
“그래, 수고는 내가 다 하긴 했지.”
사실이다.
게임기나 컴퓨터 같은 일부의 비품을 제외한 나머지 물건들은 전부 아이나의 조언을 거쳐 구매한 것이었으니까.
타인의 세세한 기호를 잘 모르는 나로서는 그녀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여러 방면에서 나보다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뿐더러, 그래 보이진 않지만, 성격 또한 아이나 쪽이 훨씬 섬세하니까.
뭐가 됐든 틀렸어도 내가 틀렸지, 아이나가 틀리는 일은 없으리라.
“미안해, 너한테 빚지는 것만 같네.”
“빚은 무슨. 내가 그런 걸 신경 쓸 사람 같아?”
“아니, 그렇지는 않지.”
“그런 걸로 미안한 마음이 들 필요는 없어. 정말로 네가 나한테 빚을 지게 된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뜯어낼 테니까 걱정할 필요도 없고.”
어떻게 해서든지 뜯어낼 거라니.
농담이겠지만,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녀의 능력과 성격으론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기도 했고.
“내가 바라는 건 단 하나야. 나를 진솔한 마음으로 대해주는 거.”
“그건 늘 그렇게 하고 있지.”
이건 맹세할 수 있는 이야기다.
단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나도 알아. 그래서 네가 허튼 짓거리를 하고 다녀도 늘 너를 용서하게 돼. 너를 좋아하는 이유기도 하고.”
이러니까 별 잘못도 안 한 것 같은데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잖아.
그럼에도 왠지 모를 죄책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게 되었다.
그러자, 아이나는 가녀린 손으로 직접 내 턱을 젖혀 올려, 자신의 눈과 마주치게끔 하였다.
“자, 이젠 네가 말해줄 차례야. 한 번도 들려주지 않았던, 날 좋아하는 이유를.”
이아나의 몸쪽 꽉 찬 직구에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수천 번은 속으로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그녀 말마따나 모자란 나의 머리로는 마땅히 좋은 답안을 제출해낼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냥 생각나는 것을 아무렇게나 내뱉기로 하였다.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었어. 아니, 그, 불쌍하다거나 안쓰럽다는 의미는 아니고. 같이 있을 때 항상 신경 쓰이는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아, 물론 넌 예쁘니까 관심이 가는 건 당연하겠지만, 이야기 쪽도 궁금했어. 자기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나도 내가 뭐라는지 잘 모르겠다.
이 정도까지 긴장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나조차도 병신같다고 느껴지는데, 아이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횡설수설하는 걸로 보일까.
분명 광대짓 할 때는 뇌도, 혀도 유연해지는 게 느껴지는데, 왜 이런 중요한 상황에선 굳은 채로 움직이지 않는지 모르겠다.
애꿎은 혓바닥이 원망스러웠다.
“그걸로 충분해.”
그녀는 기꺼이 나의 죄를 사하여 주었다.
나에게는 그 이상의 어떠한 것도 묻지 않은 채, 자신의 마음을 다시 한번 전해주기 시작했다.
“알고 있음에도 늘 불안했어.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네가 너무 아둔한 탓에 자기 마음도 모른 채 그저 나에게 이끌려 다니고만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널 놓아줘야 하는 날이 오게 되지 않을까 하고.”
“그럴 리가 없잖아.”
“이제 확실하게 그 말을 믿어. 넌 솔직하고 좋은 사람이야.”
“넌 솔직하지만 좋은 사람은 아니야.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지.”
짓궂은 대답에도 아이나는 그 어느 때보다 밝게 웃었다.
그리고, 한 시의 오차도 없이 나와 아이나는 서로를 동시에 부둥켜안았다.
한참이 지날 때까지도 놓아주지 않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