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카푸치노.
2식부터 익히기 어렵다는 아이나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강의 시간과 생리 현상에 필요한 시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간을 류진을 연마하는 데 투자하고 있었음에도, 내 실력은 그다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때때로 프리실라의 독촉을 못 이겨 프리실라를 만나는 날이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훈련에 매진한 시간이 훨씬 길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니.
그럼에도내가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은 기껏해야 앞회전, 회축 정도를 섞어서 쓰는 게 전부였다.
원체 노력하기를 싫어하는 내 성향상, 도중에 관둘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들었지만, 아이나의 얼굴을 봐서라도 그런 짓은 하지 못했다.
더딘 내 성장에도 화 한번 내지 않고 묵묵히 옆에서 날 지도해주는데, 어떻게 이제 와서 그만둔다고하겠는가.
“그만,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왜? 아직 시간 많이 남았잖아?”
“하루 정돈 쉬는 것도 괜찮으니까.”
뜻밖의 휴식이네.
그렇다고 기분이 특별히 좋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어차피 여가시간이 생겨도 특별히 할 건 없으니까.
하는 것이라 해봤자 기숙사의 방에서 영화를 보는 게 전부다.
그마저도 요즘은 잘 안 보지만.
“그래, 그럼 내일 보자.”
“잠깐, 너 이 뒤로 약속이나 할 일 같은 거 없지?”
“없지. 나 한가해.”
“그럼… 같이 산책이나 할래?”
아이나가 먼저 무엇을 하자고 하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처음이 아닐 수도 있지만, 내게는 처음으로 느껴진다.
내 나쁜 기억력 탓에, 기억을 못 하는 것일 가능성이 더 크겠지만.
“그러지, 뭐. 어디로 가려고?”
“북문이지. 산책할 곳이라 해봐야 거기뿐이잖아?”
“그렇긴 하네.”
“그럼, 가자.”
아이나가 먼저 훈련장 밖으로 나간다.
당연히 나도 그녀를 뒤따라 나섰다.
앞장서는 그녀의발걸음이 오늘따라 유난히 경쾌해 보인다.
경쾌함이라, 정말 아이나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태까지 그녀의 발걸음은, 한없이 차가우며, 무겁고, 조용하기만 했었는데.
아마 다른 사람들 눈에도 신기해 보일 것이다.
“오늘 기분이 좋은가 보네?”
“그래 보여?”
“어, 많이 좋아 보이는데?”
밑창이 딱딱한 단화를 신고 다니면서도 발자국 소리 한 번 내지 않는 아이나가, 저런 걸음을 걷는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눈치가 전혀 없는 사람이 봐도 기분이 좋다는 것쯤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으리라.
“평소보다 기분이 좋은 것 같기는 해.”
아이나는 솔직한 편이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면에선 솔직하지 않은 점이 있다.
바로 자신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다.
그녀는 여태까지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내비친 적이 거의 없으니까.
그것에 대해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 또한 아이나의 성격일지니.
그런 그녀의 입에서 자신의 솔직한 감정이 나올 줄이야.
오늘따라 놀라운 일이 많이 생기네.
“웬일로 네가 그런 소리를 다 하네.”
“기분이 좋아지려면, 마음 속에 있는 걸 털어놔야 한다고 말한 건 너잖아?”
저걸 기억하고 있었어?
멋진 대사인 건 맞지만, 저 말을 아이나의 입에서 들으니 기분이 묘해진다.
“맞네.”
“나도 기분이 좋은 날 정도는 있어. 그냥 표현하지 않을 뿐이야.”
“네가 기분이 좋은 날도 있어?”
“왜 없어?”
전혀 없어 보이는데.
이건 내가 이상한 게 아니다.
평소의 아이나는, 누가 봐도 그래 보이니까.
그나저나, 벌써 북문 공원에 다 왔네.
“역시, 난 서문보단 북문이야.”
“나도 그래.”
“넌 북문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 않아?”
“응, 따지면 서문을 싫어하는 거지.”
아이나의 성격 상, 서문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녀는 쓸데없이 다른 사람과 부대끼는 것을 싫어하니까.
나라고 서문을 그리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아이나처럼 서문을 싫어하는 수준은 아니다.
단지, 그 미래적인 도시 분위기에 적응하기 조금 어려운 것이지.
이젠 미래도 아니네.
여기선 현대지.
“난 북문이 좋아. 아이니르의 몇 안 되는 자연 친화적인 공간이잖아?”
“난 그런 건 별로 신경 안 써. 그냥, 조용한 공간이 북문밖에 없어서 자주 들리는 거뿐이야.”
“확실히 사람이 많으면 불편한 점도 많아지기는 하지. 시끄럽다는 것도 대표적인 불편한 점이고.”
“사람이 많은 걸 싫어하는 게 아니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걸 싫어하는 거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싫어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누구나 그럴 테니까.
“그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면 되지.”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면?”
“좋아하는 사람을 만들어야겠지?”
“…그럼 너는 어떤 사람을 좋아해?”
“그게 어떤 의미로 좋아하는 걸 말하는 건데? 친구? 이성? 가족?”
“그냥, 전부다.”
참 어려운 질문이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느냐’라는 질문은 단순해 보이면서도 대답하기 어렵다.
물론 사람을 좋아하는데 마땅한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나도 그 의견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아무런 이유 없이 호감 가는 사람도 있으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명 어떠한 이유를 가지고 사람을 좋아한다.
외모가 출중한 점을 좋아할 수도 있고, 현란한 입담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것이며, 또는 막대한 재력에 호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으니.
“질문이 너무 광범위해서 대답하기 어렵네. 단순하게 생각하면, 장점이 많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까?”
“그럼, 너는 너보다 단점이 많은 사람은 싫어해?”
“그건 아니지.”
“뭐야,그게.”
아이나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입을 샐쭉 내민다.
안 그래도 표정을 읽기 어려운 그녀다.
거기에 나무가 드리워져 빛까지 들지 않으니, 정말 어렴풋하게나마 보인 것이었다.
그래도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나도 좋아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아. 모든 사람을 좋아할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해.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 기쁨이 있다면, 좋아하는 사람을 만드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네가 자주 가는 곳에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당연하지.”
사람은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향하기 마련이다.
“자주 가는 곳….”
“반대로 생각하면, 네가 자주 가는 곳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도 되겠지.”
“그런 걸까?”
“불편함을 느끼는 곳에 자주 가고 싶지는 않을 거 아냐?”
“그렇겠지.”
아이나가 생각에 잠긴다.
그녀의 사색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는 말없이 그녀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우리는 한 곳에 멈춰 섰다.
나무가 우거지지 않아,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의 빛이 사이로 스며드는 공간이었다.
“있잖아.”
아이나가 고개를 돌려 나를 마주한다.
이제야 비로소 그녀의 얼굴이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달빛에 비친 그 얼굴은, 아이나스럽지 않게 유난히 밝았다.
“거짓말이었어.”
“뭐가?”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는 거.”
그게 누구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묻지 않았다.
대답을 들을용기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내 질문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쉽지만, 나는 아이나의 고집을 꺾을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결국, 먼저 입을 열게 된 건 나였다.
그게 누구냐는질문은 아니었지만.
“근데 왜 없다고 했어?”
“없다고 생각했지.”
“그럼, 갑자기 생긴 거야?”
“아니, 몰랐던 거야. 그리고 이제 그게 누군지 알아.”
가슴은 욱신거리고, 온 몸에는 오한이 든다.
머리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감각도 올라온다.
그럼에도, 아프지는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너야.”
언제부터였을까.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냥, 외면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녀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부담돼서.
내가 그녀의 수준에 맞는 사람이 아니라서.
지고지순한 그녀의 마음에 발을 들일만큼 깨끗한 사람도 아니라서.
“처음에는 아니라고 생각했었어. 내가 자주 가는 곳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니, 웃긴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지. 근데, 생각이 변했어.”
아이나가 숨을 한 번 고른다.
그녀의 긴장된 얼굴은 나도 처음 본다.
“나는 일평생 가문의 철칙 말고는 생각해본 게 없는 사람이었어. 지금까지는 그 철칙을 잘 지켜왔지. 네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미츠루 가문의 첫 번째 철칙은 ‘너를 적대하는 자는 친히 너의 검으로 베어주어라’야. 그리고, 나는 너를 한 번도 베지 못했지.”
“두 번째 철칙, ‘너를 배신하는 자에겐 급소를 찔러주어라’도 이루지 못했어. 네가 프리실라랑 친하게 지내는 것쯤은 알고 있었어. 그걸 알았을 때, 왠지 모를 배신감이 들더라.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는데도 말이야. 참 이상하지? 그럼에도 난 너에게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고.”
“세 번째 철칙, ‘너를 믿는다고 하는 자를 의심하라’지. 왜일까? 나는 널 의심할 수 없었어.”
“네 번째 철칙, ‘무능한 자를 유능하게 만들어주어라’, 난 네가 무능하다고 생각했어. 근데, 무능한 건 나였지. 널 유능하게 만들어 줄 능력 자체가 내겐 없었던 거야.”
“그러니까, 마지막 다섯 번째 철칙만은 지킬 거야. 아니, 지키고 있었어. 나도 모르게.”
“‘사랑하는 이에겐 모든 것을 내어 주어라. 가문의 철칙을 어겨서라도.’”
아이나가 나에게 다가온다.
결의에 찬 눈이 점점 가까워져만 갔다.
“내가 방금 밟은 꽃의 꽃말이 뭔지 알아?”
그녀의 발 아래 꺾인 꽃들이 눈에 들어온다.
활짝 핀 노란색 꽃은 여전히 그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밤에 활짝 피는 노란 꽃.
그건―
“달맞이꽃의 꽃말은, 기다림이야. 그리고, 난 이제 기다리지 않을 거야.”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 위로 포개진다.
첫 키스의 맛은, 카푸치노 위의 우유 거품의 맛이 났다.
그 다음엔, 비릿한 피 맛이 났다.
그녀가 내 입술을 살짝 짓씹었기 때문이다.
옅은 상흔에서 흘러나온 피를, 그녀가 낼름 핥았다.
“기억했어.”
뭘 기억했다는 걸까.
이 순간을?
아니면, 내 피 맛을?
“이제 넌 내 거야. 지금까지 내가 갖지 못한 건 없었어. 네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원래 내가가져야 할 것들을 네가 모두 훔쳐 갔으니까, 대신 널 가질 거야.”
고백인지, 으름장인지 알 수 없는 말만 남기고, 아이나는 떠났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