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돌개바람의 눈. (5)
한편 베아트릭스는…
“박성진!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돼?”
“잘 숨어있어. 네 차례는 알아서 올 거야”
“여기 답답해!”
함께 움직였던 천현우, 카타리나, 백성연과 달리, 베아트릭스는 처음부터 내부 병동 발전실의 구석에 숨어있었다.
베아트릭스는 자신이 이번 계획의 조커가 되었다며 기뻐했지만, 실상은 박성진이 베아트릭스의 경망스러운 태도가 일을 그르칠까 두려워 계획에서 제외시킨 것에 가까웠지만.
“밖이 소란스러워지면 나와. 알겠지?가만히 잘 있고.”
“그럼 피자 사주는 거지?”
“그래, 그래. 사주고말고.”
베아트릭스는 기쁜 마음으로 통신을 끊었다.
* * *
카타리나 벨랴예바는 무인(武人)으로써, 감이 굉장히 뛰어난 사람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녀는 분명히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멈춰라. 그 이상 접근할 수 없다.”
카타리나가 위압감을 내뿜으며 말했다.
그러자, 공간이 일렁이더니, 텅 빈 공간에서 정장 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대체 우리가 습격할 건 어떻게 알아차린 거야?”
“그건 네 놈이 알 바가 아니다. 당장 트리니티 아카데미에서 꺼져라.”
“그럴 순 없지. 대가를 받았거든.”
정장 신사의 모습이 다시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카타리나는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듯, 단숨에 공격했지만, 놈은 이미 그 자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카타리나!”
“백성연?”
“잘 들어. 내가 너한테 퍼스트 어빌리티, 영혼 결속을 걸어줄게. 그러면 내가 유령화를 써도 너는 나를 인식할 수 있어. 우선 내가 유령화를 쓰고, 놈을 찾아낼게. 그리고 놈을 찾는데 성공하면, 너에게 신호를 보내줄 테니 나를 공격해. 알겠지?”
“너를 공격하라고?”
“난 유령화 상태니까 물리적인 공격은 받지 않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런데 놈을 어떻게 찾아낸단 말이냐.”
“박성진이 알려준 거야! 한시가 급하니까 일단 내 말을 따라줘.”
“…알겠다.”
백성연은 결속과 유령화를 사용한 뒤,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백성연이 이기(異氣)를 감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물체를 무언가를 통과하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보기에는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공간임에도.
‘여기다! 카타리나! 지금!’
“알았다!”
카타리나는 퍼스트 어빌리티, 초살을 발동하고, 주먹을 내지른다.
“커헉!”
뼈가 박살나고, 살점을 휘젓는 감각이 손등을 타고 카타리나의 몸에 전해진다.
어지간히 튼튼한 녀석이 아니고서야 즉사했을 일격이다.
아니, 그랬어야 한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가슴팍에 커다란 구멍이 난 빌런의 몸뚱이가 나타나 쓰려졌으니까.
돌연, 그 시체는 먼지처럼 흩날려 사라지고, 놈은 멀쩡한 모습으로 어깨와 옷소매를 털며 나타났다.
“어떻게 된 거냐! 백성연!”
“나도 몰라! 다른 사상력인가 봐!”
“꼬맹이들이라 봐주려고 했건만… A클래스… 아니, S클래스인가? 이래선 손대중이 불가능하겠어.”
빌런은 다시 카모폴라쥬를 사용해, 카타리나와 백성연 앞에서 사라졌다.
불안감이 피어오른다.
시리얼 카드가 몸에 이식된 이상, 사상력의 지속적인 사용은불가능하다.
일종의 리미트가 걸려있는 것이다.
이 놈은 그런 제약 없이 마음껏 사상력을 사용할 수 있다.
물론, 사상력에도 한계가 존재하는 만큼,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
다만, 그 비교 대상이 시리얼 카드가 이식된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생도라는 전제 하에선 그것이 무제한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과연 시리얼 카드라는 큰 제한이 걸려있는 상황에서도 자신들이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의심과 불안은 이 상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지만, 그것이 엄습해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백성연, 나는 너를 믿는다. 버티는 건 내가 할 테니, 너는 놈을찾는 것에만 신경을 집중해라.”
“하지만… 너는 방어에 특화된 사상력도 아니잖아!”
“적어도 격투에 한해서라면 S클래스 누구보다 나을 것이라고 자부한다. 네가 버티는 것보다야 나을 것이다.”
“그래도…”
“시간이 없다! 얼른! 저 녀석을 찾는 것에만 집중해!”
그것이 옳은 판단이었으리라.
자기 주장이 약한 자신에게 판단을 맡기는 것보다야 주관이 뚜렷한 카타리나의 오더를 따르는 것이 백번 낫다는 걸 아는 백성연도 그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백성연이 다시 유령화를 발동해, 이 작은 전장을 횡보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놈도 상당히 신중하게 접근하기로 한 모양인지, 꽤 긴 시간 동안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살갗이 따끔해질 정도의 흉흉한 기류가 발전실 앞을 맴돈다.
범인(凡人)이라면 도망치는 것이 보편적이겠지만,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S클래스라는 이름을 따내는 동안 헛물만 켠 것이 아니라는 듯, 카타리나와 백성연도 이 살갑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가장 먼저 정적을 깬 것은 카타리나다.
굳세게 쥔 주먹이 나아간다.
또 한 번, 무언가를 분쇄하는 감촉이 카타리나에겐 느껴졌다.
상당히 묵직하고 단단한 것이, 두개골인 것 같았다.
‘이번에는 아니여야 한다.’
카타리나의 그 믿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산산조각난 머리통과 함께 등장한 빌런의 시체는, 아까와 동일하게 가루가 되어 사라졌으니까.
하지만,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있었다.
동일한 대상에게 발동할 수 없는 사상력인 초살이 두 번 발동한다는 것은, 카타리나가 박살 낸 것은 놈이 아닌, 분신이나 그와 비슷한 무언가라는 뜻이다.
환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너무 생생했다.
같은 S클래스의 제임스도 같은 환술 계통의 사상력을 사용하지만, 이렇게 정교한 수준의 환술은 아직 무리다.
만일 이게 정말 환술이라면, 박성진이 사전에 고지했던 C레벨이라는 말은 거짓이라는 소리가 된다.
‘그럴 리가 없다. 난 박성진을 믿는다.’
최악의 최악까지도 고려하는 카타리나의 성격상, 최악의상황을 배제하는 것은 있어선 안 될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최악을 상정하자니 포기한다는 답밖에 남지 않은 현재, 그녀는 자신의 고집을 버리기로 마음 먹었다.
지금 마주한 현실에 집중하는 것, 그것만이 최선이었다.
…
잘못될 일은 반드시 잘못된다고 했던가?
카타리나가 한 다짐이 무색하게, 그녀 측의 패색이 짙게 흐르고 있었다.
백옥처럼 하얗던 그녀의 몸은 이제 자상(刺傷)에서 흘러나온 피로 덮여 붉기만 모습을 본다면 누구나 알 수 있겠지만.
찔린 곳에 신경이라도 있었던 모양인지, 몇몇 신체 부위는 잘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그녀가 그렇게 속절없이 당할 인물이 아니었음에도, 이렇게 많은 상처를 입게 된 까닭은, 백성연 때문이었다.
백성연이 유령화를 쓰기 힘든 상황에 다다르자, 빌런은 이때만을 기다려왔다는 듯 집요하게 전투 능력이 전무한 백성연을 노렸고, 카모폴라쥬에 대한 감지 능력을 상실한 카타리나·백성연 측은 오롯이 카타리나의 감으로 놈을 인지해야만 했다.
무인으로 단련된 그녀의 육감이 대단하다곤 하나, 그것이 사람의 범주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당연하게도 상처가 하나 둘씩 쌓여만가는 것이다.
사실, 카타리나였기에 지금까지 정신을 다잡을 수 있었던 것이지, 다른 이였다면 진작 쓰려졌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백성연이 퍼스트 어빌리티, 결속으로 생명력을 계속 공급해주고 있었다곤 하나, 어디까지나 죽지 않도록 하는 임시 방편에 불과했다.
방금 실려 간 천현우보다 훨씬 심한 상처를 입은 게 그녀였으니 말이다.
“대단한 년이군.이 정도로 버틸 줄이야. 그래도 발악은 여기까지다. 둘 다 곱게 뒈져라. 원래 같았으면 시체도 수습 못 하게 만들어줬겠지만, 시간이 오래 끌려서 그러진 못하겠군. 부모가 장례식에 올 수 있는 걸 다행으로 알라고.”
놈이 천천히 다가오려는 순간…
“주인공 등장!”
발전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네 명이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냐는 듯, 모두가 입을 떼지 못하고 눈알만 굴린다.
다행스럽게도, 상황 파악이 가장 빨랐던 것은 베아트릭스다.
그녀는 곧장 사상력, ‘피어나는 군청’을 발동해, 빌런의 발을 묶었다.
그리고 잘 벼려진 창을 만들어내, 빌런의 몸을 수직으로 베었다.
양단된 신체가 또다시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놈의 사상력을 처음 본 베아트릭스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백성연, 베아트릭스의 보좌를 부탁한다. 난… 조금 쉬도록 하지. 어지러워서 말이야.”
“정신차려! 카타리나!”
“날 신경 쓸 시간이 없다. 네가 나한테 신경 쓸수록 저 녀석을 죽이는 게 오래 걸린다. 내가 치료받을 시간도 그만큼 지연되는 거다. 진정 나를 위하고 싶다면, 얼른 베아트릭스를 도와서 놈을 쓰러트려라….”
카타리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숨이 잦아들고 있다는 것을 백성연도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백성연은 흐르는 눈물을 얼른 훔쳐내고, 베아트릭스에게 말했다.
“잘 들어. 길게 설명할 시간도 없어. 나는 이제 유령화를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어. 그러니까 저 새끼를 쓰러트릴 기회도 한 번뿐이라는 소리야. 너에게 영혼 결속을 걸고 신호를 줄 테니, 신호를 주면 곧바로 나에게 공격해.”
“그게 무슨 말…”
백성연은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유령화를 쓰고 돌진하기 시작했다.
운 좋게도, 이번에는 놈을 찾는 게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의 기운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그 창을 집어던져! 얼른!’
“오케이! 맡겨줘!”
그녀의 창이 허공을 가로지른다.
그 창이 무언가에 꽂히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것도 분신일 거야. 분신을 만드는 사상력을 사용해도, 놈은 먼 거리에서 나타나진 않았어. 곧바로 유령화를 해제하고, 놈이 거리를 벌리기 전에직접적인 피해를 입혀야만 해!’
백성연은 곧바로 유령화를 해제하고, 분체에 꽂힌 창을 빼내어, 주변을 크게 휩쓸었다.
백성연의 그 판단은 지극히 옳았다.
빈 공간에서, 선혈이 솟구쳤다.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빌런이 카모폴라쥬로 모습을 숨기는 게 의미 없게 만들었고― 베아트릭스는 이내 상황을 완벽히 이해하였다.
피어나는 청록으로 날카로운 쐐기를 바닥에서 만들어내, 피가 흘러나오는 공간을 후벼파냈다.
보이지 않던 정장 신사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명이 다해, 사상력이 끝난 것이다.
“우리가… 해냈어!”
“좋아하긴 일러! 빨리 카타리나를 응급실로 옮겨야 돼!”
“아, 응!”
카타리나와 천현우의 응급 조치가 끝나고, 그들은 각자의 상황을 채널로 보고했다.
모두가 거지 같은 꼴을 하고 있을 거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보다 모두가 신경 쓰이는 것은, 정작 이 상황을 주도한 박성진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었다.